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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4화 (104/224)

00104 모순의 종착지 =========================

“솔직히 선배가 감염됐을 때. 미안한 일이지만 기뻤어요.”

“……너 내가 지금 무기력하다고 너무 심하잖아.”

하지만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TS바이러스는 흔한 질병이 아니다. 한정운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S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가 나타나길.

한정운이 답지않게 나를 계속 간호했던 게 떠오른다.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된거다. 하지만 한정운에게는 기적이나 마찬가지였겠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뭐, 점진적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이었는데, 역시 이 상황에서는 친구들이 어드밴티지가 너무 컸던 것 같기도….”

“너 취향 있었구나. 처음 알았어.”

이 자식도 박헌영급의 매니악한 취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소름 돋네, 진지한 표정으로 TS관련 창작물 보고 있는 한정운이라니. 무엇보다 한정운이 나한테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였다니, 그것도 너무 놀랍다.

하나도 티 안 나잖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너, 애초에 로맨스에 아주 중요한 뭔가가 결여된 인간인 것 같은데. 사람이 있으면 뭐 해, 접근 방식이 이상하잖아. 학습을 같이 하자고 하는 게 꼬시는거냐?”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 그리고 웃으면서 놀란다. 한정운은 그런 나를 보며 말한다.

“그건 제 문제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지금 죽어도 별 거 없고, 나중에 죽어도 별 거 없어요.”

“죽으라고 부추기는거지?”

이 자식이 여기 온 목적이 대체 뭘까 궁금해진다. 한정운은 옆에 밀어놓은 카페모카를 들더니 마신다. 커피를 그 따위로 마시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인걸까. 한정운은 커피잔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놓는다. 한정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윽…. 맛없어.”

“그렇게 들이부으면 뭘 먹어도 맛 없을건데.”

“그래도, 참고 마셔보면 혹시 몰라요.”

한정운은 커피잔 아래를 가리킨다. 채 녹지 않은 초코시럽이 고여있다.

“이런 게 있을지도.”

“나 단 거 싫어하는데.”

거짓말이다. 여자가 된 이후 나는 단 게 좋아졌다. 즐겨 먹기도 한다. 한정운은 내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애초에 그 말은 단 것에 대한 피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참고 살아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뭔가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한정운은 창밖을 본다. 거리에 차들이 돌아다닌다.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썩 흉한 풍경은 또 아니다. 그냥 풍경일 뿐이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정운은 빨대로 컵 밑바닥에 가라앉은 초코시럽을 긁어낸다. 검은 초코를 한정운이 입가로 가져가 핥는다. 유혹하는건가? 한정운이 나를 보며 웃는다.

“안 죽어서 다행이다.”

매력적인 웃음이다. 잘 생겼고 아니고를 떠나서, 한정운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놀랍다. 잘 안 보여주는 웃음이니만큼 그 웃음을 나는 잠깐 홀린 듯 바라본다.

“죽었으면 선배를 못 만났을 테니까요.”

“……어떤 경위로 나에게 반한거냐?”

“음, 선배의 지랄맞은 성격은 이렇게 변하면서 캐릭터의 일부가 되었잖아요. 예전에는 그냥 단순하게 단점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보면 매력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죠. 그 꼴로 성질 부리면서 날뛰면, 가끔 재롱 부리는 걸로 보여요.”

“너 성차별 하는 것 같은데.”

“아뇨, 예전의 선배가 그리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하는건데요.”

“너 자꾸 시비 걸 거면 가버려.”

나는 그렇게 말하지만 입은 웃고 있다. 허탈해진다. 뭘까, 정말 죽어야 하는걸까 싶기도 하다. 그런 게 남아있나? 나는 한정운이 했던 것처럼 빨대로 컵 밑에 있는 초코시럽을 긁어내 맛본다. 조금 쓰다 싶을 정도로 달다.

내 인생의 발견하지 못한 부분에 아직 이런 게 남아있을까?

“나는 무서워.”

“뭐가요?”

“나는 애정결핍이 심해.”

어쩐지 어린애 같은 말이다.

“연애를 하면, 나는 항상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어렸을 때.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거든. 그 이후로 무슨 사랑을 받아도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내 마음은 그 부분만 어쩐지, 어린 상태로 남아있는 것 같아. 내 부모가 가짜라고 생각해서 그런가봐. 물론, 내 부모님들은 잘 해주시고, 이제 그런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고 그러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겪었던 과거의 결핍은 없어지지 않아.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러니까 여자친구한테 엄청 매달리고 집착했어. 그 관계는 진짜잖아. 내가 진짜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뻤지. 내가 생각해도 내 그 때 감정은 이상해. 나는 내가 엄청 비틀려 있다는 걸 알아.”

나는 길게 말하다가 결국 손끝을 살짝 떤다.

“이선준이랑 연애를 하건, 박헌영이랑 하건, 너랑 연애를 하건 똑같아. 분명히 지치게 될거야. 솔직히 내가 너희들 세 명이랑 동시에 만나도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할거야.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헤어지겠지. 그러면 전부 끝이잖아. 그게 싫어. 친구로 남아있는 것도 그 둘을 힘들게 해. 혹시 모르지, 박헌영하고 이선준은 이미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을지도.”

이선준은 박헌영을 부러워하고, 박헌영도 이선준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 감정은 결국 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느니 차라리 전부 버리는 게 나아. 연애도 못 하고, 친구도 못 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솔직히 안 들어. 나한테 허락된 자리가 없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음, 상당히 겁쟁이 같은 관점이지만, 선배의 말도 일리는 있네요. 그러면 좀 어른이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어른?”

이미 성인이지만, 어른은 아니다. 어른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법이 정한 대로 나는 성인일 뿐이다.

“애정결핍이 설마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지는 것도 아닐테고. 맨날 안아달라고 징징대는 애인이라니, 저도 좀 싫네요.”

“너는 그걸 장난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나는 진짜로 그래. 꼭 붙어있어야 안심이 된다고. 그리고 너랑 만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설레발이냐?”

사실이다. 내 말에 한정운은 살짝 질린 것 같다.

“선배한테 문제가 있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도 되는 거에요. 점차 나아지겠죠.”

한정운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좀 부담스럽다. 저번에 서영하에게 말했던 거하고 똑같다. 나는 진심으로 정신병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치면 되는거다. 나는 내 안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랑 연애 꼭 안 해도 돼요. 다른 누구랑 해도 괜찮은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겁먹고 있으면 결국 죽는 게 낫다는 생각밖에 안 하게 되잖아요. 내가 이제 누군가를 만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때 결정하면 돼요. 그러면 평범하게, 온전하게 연애 할 수 있잖아요.”

맞는 말이다. 나는 단지 겁을 먹고 있을 뿐이다. 내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결과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너무 늦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굳이 이선준이 아니라도, 박헌영이 아니라도 좋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될 때까지, 내 마음이 좀 성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가지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자든, 남자든 누굴 만나서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모든 문제가 꼭 연애 때문에 일어난 것 같네.”

“반쯤은 맞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네가 날 살리려고 한 거면, 잘 한 것 같네.”

나는 웃는다. 기운이 없지만 그래도 약간, 기운을 낼 마음 정도는 생겼다.

“궁금해졌어. 내 인생 참고 살아보면 뭐가 있을지. 정말 나는 나아질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

하지만 나는 하나만큼은 명확하게 결심했다.

“그래도 돌아가지는 않아. 지금은 내가 있어봐야 피해만 주니까. 아마 내가 떠나고, 너나 다른 사람들이나 전부 졸업할 테니까 내가 돌아갈 곳은 없겠지. 돌아갈 생각도 없어.”

한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 만나서 살거야.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결국 나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유지하려고 했던 것들이 전부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

물론 거짓말이다. 미련이 많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혹시 내가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결심을 했기 때문일거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는 더 멀리 가버리는 수밖에 없다.

“다른 곳은….”

“이거.”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다. 넣어놓은지 오래 된 탓에 조금 너덜너덜해져있다. ‘진원물산 물류팀 과장 김현식’ 이라고 쓰여 있다. TS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난 국정원 아저씨가 준 명함이다.

“신변보호 프로그램, 다시 신청해도 받아주겠지?”

“음……. 잘 모르겠네요.”

아마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아예 가버리려고요?”

“응, 너도, 이선준도, 박헌영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릴거야.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지낼거야.”

“저는 상관없지 않아요?”

“깔끔하지 못해서 좀 그렇거든?”

나는 웃는다. 한정운은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네요.”

“개가 누군데?”

“그거야 저는 모르죠.”

한정운이 비아냥거린다. 항상 한 모금만 먹고 버리는 녀석이, 오늘은 처음으로 커피를 다 마셨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메일 정도는 쓰세요 그럼.”

“너 은근히 지저분한 면이 있네.”

나는 결국 한정운에게 이메일을 알려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정운이 날 서운하다는 듯 쳐다본다. 왜 끝장날 것 같으니까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걸 보여준대?

“그럼, 간다.”

“……진짜 너무하시네요.”

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올 생각은 없다. 이선준과 박헌영이 나를 아주 잊기를 바란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더 좋은 인연이 있을거다. 그들을 다시 만나서 상처를 헤집고 싶지는 않다. 갈라서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 돌아가는 건 코미디다.

한정운은 떠나는 나를 카페 안에서 바라본다.

나는 터미널을 나온다. 어제 그렇게 비가 왔는데, 어느 새 하늘이 개었다.

내 인생에 아직 뭔가 남았을까. 나는 그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정운의 말에 공감했을 뿐이다.

지금 죽어도 아무것도 없다. 나중에 죽어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그냥 조금 나중에 죽겠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 작품 후기 ============================

1부 분량 끝이다. 다음 편은 에필로그다.

다들 여기까지 멘탈 지키면서 보느라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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