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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3화 (103/224)

00103 모순의 종착지 =========================

나는 죽을 생각이다. 살 이유는 별로 없고, 죽어야 할 이유는 꽤 있다. 죽겠다고 생각한 건 단지 그 이유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당장 죽지는 않을거다.

살아야 할 이유가 혹시 있을까 싶어 나는 터미널로 간다. 죽고 싶지만 반드시 죽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서, 나는 사람들을 만날거다. 나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있다.

부모님을 만나고, 생각을 좀 더 해볼거다. 내가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부모님들 때문일 테니까.

학교에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살아도 나는 이 거리로 돌아오지 않을거다. 이 도시에 돌아오지 않겠다. 살기로 한다면 대체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죽는 건 참 쉽다.

한정운을 만날까 했지만 그만뒀다. 한정운은 내가 죽으려고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거다. 박헌영과 이선준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이선준에게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박헌영은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설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설훈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보게 될거다.

설훈하고도 한 번 자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고 내가 자살하면, 설훈도 아마 자살 같은 걸 하지 않을까?

죽으면 나 혼자 죽는 게 낫다. 설훈이 싫지만, 그 정도의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다. 죽지 않기로 했던 약속이 생각난다.

하지만 싫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다. 내가 유지하려 했던 관계들은 모든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국 변해버렸다.

그게 죽어야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그냥 평범하게 연애를 하다가 끝나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 정도로 소중한 관계였다. 그리고 나는 정확하게 말하면 이선준과 박헌영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 때문에 자살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모든 관계가 고통이라는 걸 깨달아버렸을 뿐이다. 사랑만이 고통이 아니었다. 친구라는 것도 결국은 고통으로 남는다. 앞으로 고통밖에 남지 않았다면, 행복한 날보다 이런 식으로 고통받을 날들만 남았다면,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선준과 박헌영은 내가 변한 채 그대로 살기를 결심한 이유였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고통 이상의 것을 줄 수밖에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살기로 했던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이유 없는 모함과 몰이해, 비난을 받아내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를 탐내고, 나를 위협하는 사람들과 살아야 할 당위가 없다. 참아내고 견뎌내면서,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거지?

어제의 일은 단지 계기에 불과하다. 그냥, 어제의 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 살아봐야 그런 일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자인 친구가 있어야 했나? 그런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다 필요없다. 이미 모든 것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

표를 끊고, 대전으로 가는 버스 승차홈으로 걸어간다. 차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 나는 거기서 멍하니 서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어, 일찍 오셨네요.”

“……너 뭐야? 왜…. 어떻게?”

“뭐, 다 방법이 있죠.”

한정운이 버스 승차홈에 서있다. 한정운은 내게 다가오더니 내가 들고 있던 버스표를 낚아챈다.

-찌익

그리고, 한정운은 가차없이 버스표를 찢어버린다.

“야, 야! 뭐, 뭐야 너!”

“그냥 환불하면 수수료 빠지니까. 제가 전액 환불해드리죠.”

“그 말이 아니잖아!”

한정운은 여전히 웃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표정이다. 평소와 같은 그 모습으로 한정운이 날 어딘가로 끌고간다.

“잠깐 얘기나 해요.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똑같아요.”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나는 홀린 것처럼 한정운을 따라간다.

잠시 뒤, 나는 터미널 안의 카페에 한정운과 앉아있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수업은 어쩌고?”

“한 번 정도는 빠져도 돼요.”

어지간하면 결석도 안 하는 한정운이 이런 말을 하니까 어쩐지 어색하다. 저런 말은 나 같은 사람이 습관처럼 하는 말인데. 나는 대체 뭘 알고 온 거냐고 물었다.

“이선준 선배한테 연락 받았어요.”

이선준은 내가 어디로 갈지 대충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터미널을 통하지 않으면 내가 대전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다. 지하철 타고 서울로 가지 않는 한. 서로 잘 안다는건 이런 상황에서는 참 더럽다. 내가 자살하더라도 집에 한 번은 갈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본인이 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건가. 하긴, 이선준이 있었으면 나는 도망가버렸을거다.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

“얘기는…. 들은거야?”

“전혀요. 그냥 설원이 아마 터미널로 갈 거니까 한 번 만나보라고 한 것밖에 없어요.”

“다 아는 것 같은 표정인데.”

내가 말하자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쁜 결말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화가 나길 바란 거라면 실패인 것 같은데.”

한정운이 비아냥조로 이야기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아무런 미련이 없다. 한정운은 내 표정과, 자신을 싫어하는 이선준이 굳이 전화까지 한 걸 토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론해냈을 것이다. 그게 진실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는 건 나도 안다. 한정운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한다.

“꼭 그래야 되는 거에요?”

“…꼭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나는 따뜻한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아메리카노, 전혀 달지 않은 쓴 물이다. 지금 나는 딱 이 정도 느낌이다. 향기는 있지만 막상 먹어보면 쓴맛밖에 없다. 이선준은 나와의 섹스를 아마 그렇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꼭 죽어야만 하나? 아니다.

꼭 살아야만 하나? 그건 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죽는 게 차라리 낫다. 차악을 선택하듯, 나는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다.

죽으려는 건 한 번 해봤다. 두 번째는 더 쉬울거다. 나는 컵을 만지작거리며 한정운을 쳐다본다.

“하나 물어볼게.”

“네.”

“너는 왜 살기로 했어?”

“……알고 계셨어요?”

어제 깨달았다. 한정운이 ‘이성애자이기를 선택했다.’ 라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알게 됐다. 그런 것을 선택하는 것은 이상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TS바이러스 감염자들은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어제 여자이길 선택했다. 그러니 그 비슷한 말을 했던 한정운도 TS바이러스 감염자다. 나와는 정 반대의, 여자에서 남자가 된 경우일거다.

“그냥, 어제 문득 떠올랐어.”

아마 형, 당시에는 한정운의 오빠이자 언니가 보유한 바이러스가 옮겨갔을거다. 한정운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린다. 항상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들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정운은 나를 쳐다보더니 말한다.

“일반론으로 말할까요?”

“아니, 그건 지겨운데.”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느니,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느니, 자살은 세상에서 제일 큰 불효라느니 하는 말들은 짜증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살 또한 하나의 선택이다. 거기에 도덕관을 들이미는 건 열받는 일이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효도를 하고 살았는지부터 궁금하다. 한정운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냥요.”

“응.”

가장 쉽고 명쾌한 대답이다. 원래 사람은 그냥 산다. 삶에 목적 같은 건 없다. 그냥 살아있으니까 산다. 신념은 삶의 목표가 아니다. 그걸 이룬 다음에 죽을 건 아니니까. 한정운이 시킨 커피는 카페모카다. 이번에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안 대고 있다.

“나는 그냥 죽고 싶어.”

내 말도 그냥 평범하다. 죽어야만 할 당위 같은 건 생각해보면 없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완벽한 이분법이다. 하나가 싫으면 다른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싫다. 그러니까 죽고싶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한다.

“흐음, 저는 어떻게든 선배가 안 죽었으면 하는데요.”

“왜?”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뭐?”

한정운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드문 말이다. 나를 좋아한다거나, 관심이 있거나 이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선배나 저나 처지가 비슷하잖아요. 하지만 정반대죠.”

“그래서?”

“남자에서 여자, 여자에서 남자. 누구랑 연애해도 뭔가 이상하고 께름칙하잖아요? 뭐, 저도 시스젠더 여성이었어요. 그냥 이성애자였죠.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니까. 남자도 좀 이상하고, 여자도 좀 이상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평범한 게 정의고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남자에서 여자로 TS된 사람이랑 연애를 하는게 논리적으로 옳지 않나 생각해서요.”

뭔가 김빠지는 대답이다. 내가 좋고 어쩌고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한정운과 나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잘 맞는다. 둘 다 애매하고, 둘 다 회색이다. 그러니까 우리끼리의 연애는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저는 이성애자에요. 그리고, 선배는 저한테 완벽한 이성이에요. 아니, 선배만이 제 유일한 이성이에요.”

문득 깨닫는다. 과거에도, 현재도 나는 한정운에게 이성으로 존재한다. 한정운은 남자이길 택한걸까? 한정운에게 이성은 여자가 아니다. 나의 이성도 남자가 아니다. 나의 이성은 한정운이다. 한정운의 이성도 나다.

나는 TS바이러스 감염자 남성이다. 한정운은 TS바이러스 감염자 여성이다. 이건 어찌보면 하나의 새로운 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트렌스젠더와는 확실히 다르다. 내가 아는 세계에서, 한정운은 내게 유일한 이성이다. 한정운이 아는 세계에서, 나는 한정운의 유일한 이성이다.

한정운은 세상에서 이성을 가장 찾기 힘든 이성애자다. 세상에 여자가 하나뿐이다. 남자가 하나뿐이다. 한정운은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거다. 한정운이 세상에서 사랑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하지만 뭔가 저 기계적인 논리는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정자은행에 기증을 하는게 낫지 않겠어?”

“음, 저는 성애(性愛)를 하고 싶은걸요.”

이렇게 점잖게 섹스하고 싶다고 말하는 놈은 세상에 또 없을거다. 나는 맥이 빠져서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너 지금 나랑 섹스하고 싶어서 내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이거야?”

“안 될 건 뭐에요? 남들한테 패악질 부리고 혼자 죽어버리려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렇게 뻔뻔할데가. 화를 낼 기운도 없다. 하지만 한정운의 비난은 옳다. 그러니까 나도 한정운에게 싸가지가 없네 뭐네 하고 싶지는 않다. 뭐, 그게 목적이라면 나도 딱히 거부감은 없다.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하자. 이 근처에 모텔 있을텐데.”

“뇌 반쪽이 어디 가셨나봐요.”

한정운은 내 승낙을 비난한다.

“성애라고 했지 성교라고 하진 않았잖아요. 저는 짐승처럼 흘레붙는 건 싫어요.”

흘레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로맨스 드라마를 찍어야 하는데, 엔딩이 베드신이어야 한다는거지?”

“음, 비유가 늘었네요? 칭찬을 해줘야 하나.”

한정운이 피식 웃는다. 한정운이 오늘처럼 농담을 많이 한 날이 있기는 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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