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2 모순의 종착지 =========================
죽어야 할 이유는 몇 가지 떠오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야만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잠든 이선준을 눕혀놓은 뒤 화장실로 들어간다. 몸이 좀 아프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쪼그려 앉아 쏟아지는 물을 맞는다. 온몸이 따끔거린다. 말라붙은 땀이 씻겨진다. 나는 몸을 씻고, 머리를 대충 닦은 뒤 알몸으로 나온다. 이선준은 아직 자고 있다.
나는 옷을 입는다.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 현관으로 간다.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이제 한밤중이다. 나는 비가 싫다.
“가지 마라.”
내가 이선준을 붙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선준이 나를 붙잡는다. 역시나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이선준은 나를 보고 있다.
“연애하자. 우리.”
이선준은 침대에 앉아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어둑한 방 안에서 검은 실루엣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건 고백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깝다. 나는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싫어.”
나는 이선준을 붙잡았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너무나 신파적인 단어다. 선이라니,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다는 걸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경계를 지나버린 것만큼은 확실하다. 친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인이 될 수도 없다.
이미 내가 바란 모든 것들을 내 입으로, 내 몸으로 부정해버렸다. 이선준은 내 거부를 듣고 되묻는다.
“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내 감정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나와 이선준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이선준은 나를 감당할 수 없을거다. 사랑받는 순간부터 갑자기 갈증을 호소하는 나다. 괜찮다가 갑자기 미쳐버리는 나다. 나는 병들었다. 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하지 않는다.
결국 가장 원초적인 이유를 들먹인다.
“너랑 하기 싫어. 아파.”
신발을 신는다. 우산은 하나밖에 없다. 우산 없이 집 밖으로 나간다. 이선준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아프다. 할 때보다 하고 난 뒤가 껄끄럽다. 쓰라리다는 표현이 맞을거다.
참을만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딱히 참아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생소한 감각이다.
폭우는 사뭇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고 있다. 나는 인적 드문 폭우 속으로 들어간다. 젖은 머리가 더욱 젖어간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내가 폭우 속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박헌영의 방이다. 온몸이 푹 젖었다. 쥐어짜면 물이라도 주륵 흘러내릴 것 같은 꼴이다. 핸드폰을 켜본다. 그렇게 비를 맞았는데 용케 망가지지는 않았다.
-똑똑
조금 기다려 봤지만 반응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린다.
-똑똑
“누구세요?”
문 건너편에서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야, 문 열어.”
내 목소리를 들은 박헌영이 문을 연다.
“이 밤중에 왜…. 뭐야. 너 왜 다 젖었어?”
“들어가도 돼?”
박헌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비켜선다. 놀람과 당혹, 의문이 섞여있는 표정이다.
“내가 입을만한 것 좀 줘.”
나는 말없이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벗는다. 방금 씻었으면서 다시 한 번 씻는다. 나는 몸을 대충 수건으로 닦고 나온다.
“야, 야 너 뭐 해?”
박헌영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알몸으로 샤워실에서 나왔다. 박헌영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박헌영이 급하게 꺼낸 셔츠와 트렁크 팬티, 반바지를 입는다. 나는 속옷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그것들을 입는다. 티셔츠의 유두 부분이 튀어나와 있다. 이제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다.
“다 입었어.”
박헌영은 그제야 나를 보더니, 다시 눈 둘 곳을 못 찾겠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나는 젖은 옷들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놓는다. 박헌영은 그것들을 드럼 세탁기에 넣더니 탈수를 한다.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수치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듯 행동하자 박헌영은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 컴퓨터 화면에는 워드 프로그램이 켜져 있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다. 나는 별로 슬프지 않다. 말해야 할 게 있어서 온거다.
“나랑 할래?”
박헌영이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나는 지나가듯 말한다.
“너…. 어디 안좋아? 무슨 일 있었지.”
박헌영에게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나는 내 마음이 박헌영에게 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기만하느니, 모든 걸 정리해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미안하니까 적선하듯 박헌영에게 한 번 대주러 온거다. 지금 나는 창녀와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박헌영은 아무 말 없는 나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뭘 떠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한밤중에, 이 폭우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을거다.
“설마 선준이 형이….”
이선준이 날 강간했다고 생각하는지 박헌영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내 부정에 박헌영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아마 박헌영은 내가 이선준과 한 게 아니라고 내 말을 받아들였을거다. 물론 내가 부정한 것은 강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 건 맞아. 강제로 한 게 아닐 뿐이지.”
“어…. 어? 그게 뭔 소리야?”
“하고 싶어서 했다고.”
박헌영은 갑자기 듣는 그런 말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 약간 얼이 빠져 있다. 박헌영은 척 보기에도 내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너도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무슨 미친 소리 하는거야 너?”
박헌영은 부아가 치미는지 약간 언성이 올라간다. 나는 박헌영을 빤히 쳐다보고 일어난다.
“싫으면 말아. 나 자도 돼?”
“어?”
“피곤해서. 좀 잘래.”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 나는 박헌영의 침대에 눕는다. 박헌영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나를 보며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야, 너…. 진짜.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 왜 이러는데?”
“듣고싶어?”
“그래. 무슨 일인지 좀 알자.”
“이리 와 봐 그럼. 불도 좀 끄고, 나 엄청 피곤해.”
박헌영은 순순히 불을 끄고 내 옆으로 온다. 나는 박헌영을 잡아당겨 침대에 눕힌다. 나와 박헌영은 누운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서로한테 상처주는 게 싫어서, 그냥 섹스하고 끝냈어.”
나는 담백하게 말한다. 그 긴 고뇌와 모순과 분노와 폭력적인 일들은 사실 단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나는 박헌영을 보며 말한다.
“너한테 미안해.”
다른 사람과 해서 미안하다는 뜻도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해서 미안하다는 뜻도 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다고 한 그 날 서로 친한 친구와 해버려서 미안하다는 뜻도 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잖아.”
박헌영은 얼이 빠져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있다.
“욕해도 돼, 때려도 돼, 뭐든 해도 돼.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박헌영은 화도 내지 못한 채 나를 보고있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어렴풋이 눈치채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약간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화가 나는 것도 맞을거다.
박헌영은 병신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와서, 다른 남자랑 했다고 하는데 사람 좋게 웃는 모자란 놈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박헌영은 그런 나를 때리고, 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박헌영이 분에 차서 나를 강간해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를 걸레라고 욕하면서 하려고 해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선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박헌영도 그럴 권리가 있다. 내가 기만했던 이들에게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걸 주는거다.
박헌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이 상황에서 하자고 하는 미친놈이 어디있냐?”
박헌영이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게 보인다.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할 수 있어. 스타킹 신고 밟아줄까?”
나는 장난치는 게 아니다. 진짜로 원한다면 뭐든 다 해줄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박헌영은 내 말이 반쯤 장난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장난이 치고 싶은 모양인데, 진짜로 복장 있거든?“
“응, 줘. 입을 테니까.”
“……너 미쳤구나.”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박헌영은 기가 질린 듯 고개를 젓더니 뒤로 돌아눕는다.
“더 지껄이지 말고 자. 화 날 것 같다.”
박헌영은 마지막 선을 넘지 않는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나하고 그런 걸 한다는 자체가 이미 짜증나고 역겨운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져 버렸을 수도 있다.
원하지 않는다면 안 하면 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억지로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다 깨버리고 전부 없애버리고 싶다. 박헌영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죄책감을 이런 식으로라도 갚아버리고,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버리고 싶다.
차라리 박헌영을 강간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건 역시 더욱 나쁜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등신….”
나는 박헌영을 비난한 뒤 돌아눕는다. 박헌영은 이선준보다 못난 놈이다. 그 지점이 어떻게 보면 잘난 면이기도 할거다. 솔직히 너무 피곤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온다. 몸이 무겁다. 첫 섹스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 잘 모르겠다. 잠들기 직전, 박헌영이 날 잡아당긴다. 눈이 마주친다.
“너 존나 짜증나.”
“나도 내가 짜증나.”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박헌영은 더 이상 말이 없다. 박헌영은 울고 있다. 폭우 소리에 울음소리는 묻혀서 잘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박헌영을 끌어안는다. 등을 쓸어준다. 병 주고 약 주는 내 자신이 내가 봐도 웃기다.
“왜 다 우는거야?”
나는 눈물이 안 난다. 공허해진 탓이다. 나는 박헌영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말한다.
“나를 혐오해. 나를 욕해. 나는 지저분하고, 모순적이고, 너희들을 갖고 놀았잖아. 당연히 당할 일 당하는거야. 나는 너를 갖고 논거야. 응? 마음대로 해. 하려면 해. 때리려면 때려. 욕하려면 해. 나는 미친년이잖아.”
박헌영은 눈물이 한 번 터지니까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박헌영이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다. 나는 이를 악문다. 이 자식은 너무 착하다. 너무 여리고 나약한 놈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긴 싫다.
“…미안해.”
나는 결국 말해버린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니까…. 알겠어.”
박헌영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덜덜 떨고 있다. 아, 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이런 녀석에게 상처를 줘야만 한다. 안 그래도 될지 모르지만, 나는 박헌영을 상처입히기로 결정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말이다. 나는 박헌영에게서 떨어져 눈을 마주보며 말한다.
“나는 너보다 이선준이 더 좋아.”
“…….”
“그러니까 너랑은 연애 못해.”
결국 눈물이 난다. 박헌영이 나를 미워하길 바란다. 박헌영의 표정이 죽는다.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음 날,
박헌영이 학교에 간 다음, 나는 말려놓은 옷을 입고 나왔다. 박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환멸을 느꼈거나,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을거다.
이선준의 자취방에 가서 챙겨야 할 것들을 챙긴다. 학교에 간 건지, 어딜 간 건지 이선준은 방에 없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선준이든 박헌영이든 끝내기 위해서는 뭐든 해버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이었다. 박헌영은 이제 나를 혐오할 수 있다.
박헌영이 나를 혐오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나 천박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가버리면, 그냥 떠나버리면 박헌영은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나를 생각하며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짓밟아버릴 필요가 있었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혐오하도록, 실망하도록, 증오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나한테 더 미련이 없도록 만들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산부인과에 가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다. 내 표정을 본 의사가 나를 동정하는 걸 은연중에 느꼈다. 그 사람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다.
사실 피임약을 먹는 행동에 별 의미는 없다. 먹으나 안 먹으나 상관없다. 피임약을 굳이 처방받고 먹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뿐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와 함께 죽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 작품 후기 ============================
전편의 공지는 연재분이 아니니까 삭제했음. 볼 사람들은 거의 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