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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1화 (101/224)

00101 모순의 종착지 =========================

내 가장 큰 문제가 가장 좋지 못한 순간에 가장 그릇된 방식으로 튀어나온다.

지금껏 받아온 모든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선준은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마치 시험하듯, 마치 괴롭히듯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나는 침착하다.

이선준과 극적인 화해를 할 수도 있을거다. 맞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선준과 연애를 할 수도 있을거다.

하지만 헤어지게 될거다.

이선준과 나의 마음이 영원히 얽혀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서로를 배반하거나, 서로를 몰이해할 것이다.

양 쪽 다일수도 이다. 그 관계는 지금보다 더 큰 슬픔으로, 더 큰 배반으로 남을거다.

무엇보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순간,

그걸 인정해 버리는 순간 상대에게 얽매인다.

나는 아무리 사랑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메마른 샘이다.

나는 이선준에게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사랑을 요구할거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거다.

그런 건 불가능 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쳐버릴거다.

나는 그게 싫다. 끝날 거라면, 끝이 보이는 사랑이라면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버리자.

우리는 오늘 서로를 할퀴고 떠나가는거다.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다. 아무도 내 독선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도 내 상처를, 분노를 슬픔을 알 수 없다. 설득할 생각은 없다.

나는 미쳤다. 나는 정신병자다. 나는 지금의 상처를 열배의 더 큰 상처로 만들어 미래로 유보하고픈 생각은 없다.

모든것들을 인정한다. 서혜인과 연애하려는 이선준이 싫다.

나를 위한다는 구실로 나를 떠나려는 그 모습이 싫다.

이선준이 나와 계속, 이 모순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내 입으로 그 관계를 무너뜨린다.

나는 미우 침착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말 할 테면 해봐, 나를 상처입히려고 해 봐.

나는 이선준에게 내가 정한 기준, 도덕성, 정의감 전부 부숴버리고 타락해보라고 협박하고 있다.

나는 악마다. 여전히 나는 이선준을 가둬놓고 싶다. 그리고 나는 안다.

침착한 만큼 분노할 때 날뛰는 이선준을 알고 있다.

"너랑 하고 싶어"

이선준이 이렇게 말할 거라고, 나는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이래야만 할 때다.

모든 걸 부숴버리고, 모든 게 깨져버리고, 우리가 함께 짐승처럼 뒹굴어야 할 때다.

언젠가는 와야만 할 순간이었다.

이선준을 기만하면서 나는 이선준을 해방시키려고 한다.

모든 짐에서, 고통에서, 분노에서, 구속에서 벗어나는거다.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 이선준은 더 이상 혼자서 잠 못 드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내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더 이상 무의미한 자기검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나도 안다. 너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다만 욕심어었다.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더욱 알고 있따. 그런 사람 따위는 없다. 역할극은 그만두자. 그래, 그런거다.

너는 이제 나를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나를 겁탈하고, 나를 범하고, 나를 취하고, 내게 사정하면서

그간의 괴로움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 된다.

나는 너무 오래, 너무 진득하게 한 사람을 괴롭혀왔다.

나는 불을 끈다. 옷을 벗는다. 속옷까지 전부 벗는다.

옷이 살갗에 스치는 조용한 소리가 원룸 안에 퍼진다.

이선준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린다. 이선준은 분노와 공포심 때문에 떨고 있다.

"너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냐?"

"내가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이선준을 도발한다. 이선준을 더 화나게 한다.

나를 범하면서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도록. 더 이상 참지 말자, 더 이상 서로를 괴롭히지 말자.

이왕에 끝날 거라면, 더 큰 슬픔이 되기 전에 끝ㄴ내버리자.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

다 지저분하고 구차하다. 더 이상 사람들의 죄책감과 슬픔을 자극하면서

이 지리멸렬하고 악독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

박헌영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박헌영을 두 번째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선준을 첫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헌영과의 연애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선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독하게 비늘려 있다. 박헌영은 잃어도 슬프겠지만, 이선준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선준은 내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다.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 모든 기만과 모순을 버리고, 나는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전부 버릴 생각이다

모든 인연은 고통일 뿐이다. 전부 끝내버리자.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을 갉아먹으며 구차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다.

정상적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어떤 것이 비틀려 버린 순간부터다.

나선이 점점 먼 곳으로, 원점이 보이지 않는 장소로 뻗아가듯, 그렇게 되어버린 거다.

이선준은 나를 붙잡아 침대에 거칠게 눕힌다. 난폭하게 키스한다.

이건 애정이 아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건 그저 욕구다.

나에게 키스하고 싶어했던 이선준은 내 입술을 거칠게 덮는다.

혀가 얽혀 들어온다. 나도 마찬가지로 혀를 밀어넣는다.

우리는 서로의 잎술과, 서로의 혀를 갈망하듯 탐한다. 이선준의 옷을 벗긴다.

그래, 나도 안다. 나도 안다. 이런 욕망에 대해서, 이런 욕망은 이선준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다.

나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나도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깨닫는다. 나도 이러로 싶었다.

이선준과 섹스를 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하고 싶었다.

그저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저 나체가 되어서 뒹굴어보고 싶었다.

오늘 밤, 나는 창녀다.

오늘 밤, 나는 우정을 팔아 한 푼짜리 쾌락을 산다.

우리가 공유하던 우정과 신뢰의 무게가 사라지는 만큼 나는 홀가분해진다.

더 이상 나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내게 가장 소중한 관계를 짓밟아 모든 짐에서 벗어난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말한다.

"미친년."

이선준은 경멸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 신선에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

이선준의 그 말은 마지막 비명이다. 이제라도 내가 그만두고, 울면서 이불을 뒤집어쓴채 그만해달라고 하길 바라는 마지막 비웃음이다.

이선준은 내가 두려움에 떨며 물러서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 순간부터 이선준은 또 자시 한없는 고통과 자기비하 속에서 괴로워할거다.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 발가벗은 채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상각하는지 전부 확인해 버렸다.

말했듯,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버렸다.

알고 있던 것들을 언어로 나눠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멈추는 건 의미가 없다.

어둠과 빗로리 속에서 이선준의 얼굴, 눈, 입술이 분노에 물들어 있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웃는다. 말했듯 나는 아름답다. 알봄의 나는 더욱 아름답다.

나는 고혹적으로, 매력적으로, 요염하게 속삭인다.

나는 도취된다. 나의 언어에, 나의 매력에, 이선준의 홀린 것 같은 표정에 도취된다.

선량하고 착하며 굳건한 한 사람의 이성과 윤리와 양심을 무너뜨리는 나는 지독한 마녀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해."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켜 그런 이선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선준은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설렘이 섞인 표정을 하고 있다.

나는 낙인을 찍어버리듯 말한다.

"너는 그럴 자격 있어."

모든 것을 내던져버렸다. 모든 집착과 슬픔을 내던진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나는 물러서지 않은 채 오히려 이선준을 유혹한다.

이선준은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는다. 나는 몸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

이 밤에 수치심은 없다. 이선준은 성욕 때문에 급한 게 아니다. 분노 때문에 급하다.

나를 제압하고, 나를 업압혀며, 내가 내뱉은 말들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은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은 없다. 하기로 결정한 이상 후회하지 않는다. 그건 실례다.

우리의 마지막에 대한 크나큰 실례다.

어둑한 실내, 원룸의 이 비좁고, 으스스하고, 밀폐된 이 음울한 공간에서 이선준은 내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갠다.

그래, 얼마든지 와도 좋아.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젖어있으니까. 아무래도, 나는 너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네가 나를 원했던 것처럼, 나도 그 만큼이나 너를 원했던 것 같다.

자각하지 않아도, 나는 허락하기 전부터 네가 그런 말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했을 때부터 나는 흥건했다.

이선준이 더 가까이 온다.

이선준과 나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이선준은 배려 없이 난폭하게 몸을 흔든다.

짐승처럼 하기를 원한 내 바람에 꼭 들어맞게 움직여 준다.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지 않다.

생각했던 것만큼 좋지 않다.

생각했던 것보다 슬프다.

생각했던 것보다 괴롭다.

나는 고통을 빙자한 눈물을 흘린다.

고통 때문에 울지 않으면서 아픔 때문에 우는 척을 한다.

아픈 곳은 그 쪽이 아니다.

이선준이 내 눈물을 핥는다. 나는 이선준의 등을 손톱으로 찍어누르며 허리를 움직인다.

우리 둘 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우리는 서로를 강간하고, 서로에게 강간당하고 있다.

섹스는 합일이라고 누가 말했지? 우리는 하면 할수록 서로 유리되어간다.

몸을 겹칠 때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될 우 없는 명백한 개인임을 느낀다.

부딪힐 때마다 하나씩, 우리를 이어주고 있던 것들이 끊어지고 부서진다.

반복할수록 쾌락이 중첩된다. 천천히 모래를 한 삽 한 삽 떠서 모래더미를 쌓는 것처럼,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점점 쾌락이 쌓여간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에 감탄하지 않는다.

탄성을 지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주 조용하다.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란스럽게 움직인다.

우리는 부산스럽다. 황급하다. 나는 끝까지 들어올 때마다 어쩔수 없이 나오는 짧은 신음을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게세 깨문다.

강하게 들어올 떼ㅐ마다 나는 조금씩 억눌린 소리를 뱉는다.

이선준은 내 비명을 바라고 움직인다. 내가 울부짖으며 거부하길 바란다.

우리의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와 폭우소리가 천박하게 울린다.

그 소리는 우리의 침묵과 대조적으로 격렬하다.

번개가 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내가 올라가고, 이선준이 올라가고, 우리는 마치 싸우듯 섹스한다.

이를 악물고 서로를 찍어누르고, 괴롭히듯 섹스한다.

우리는 서로를 물어뜯듯 키스하고, 상대를 짓밟듯 허리를 놀린다.

이선준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듯 거칠게 웁직인다. 이건 섹스라기 보다 그저 섹스를 빙자한 몸싸움이다.

우리는 뭔가 나누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우정과 애정을 나누며 섹스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해소하기 위해 뒹군다. 그저 억눌렸단 고통과 분노와 욕구와 욕심을 풀어내기 위해 섹스한다.

우리는 그 끝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몸을 섞는다.

거기에는 우리의 애정도, 우리의 우정도, 우리 안에 있었을지도 모를 사랑 또한 포함된다.

이 섹스는 무엇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섹스는 모두 죽여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없이, 아무것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거칠게 서로를 탐한다. 오느 밤뿐이다.

오늘이 처음이고, 동시에 마지막이다.

이선준이 몸을 떠는 동시에 나는 아주 세게 이선준을 잡아 뜯어 버릴 듯 매달린다.

이선준이 몸을 빼낼 틈을 주지 않는다. 이선준은 몸을 빼려 하지만 나는 더욱 강하게 이선준의 허리를 양 다리로 감싸고 꽉 조인다.

"야! 너!"

이선준은 당황하지만 나를 밀쳐내지 않는다. 이선준이 내게 사정한다.

두근거리는 떨림이 느껴진다. 내 안에서 그것이 두근거린다.

내 안에 들어온 뭔가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나는 일부러 이선준이 안에 하도록 했다. 나는 그것이 만족스럽다.

모든 죄책감과 양심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느 서로를 더럽힌 만큼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진다.

나는 완벽하게 강간당했다. 나는 완벽하게 이선준을 강간했다.

"너,너…. 미쳤어. 진짜로?"

모든 행위하 끝난다.

이런 거였다. 겨우 이런 것이었다.

내가 참아왔던 것은, 우리가 참아왔떤 것은 겨우 이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겨우 이 따위 일을 참아온거다. 이 따위 일을 두려워해온거다.

"피임약 먹을 거니까 닥쳐."

동공이 흔들리는 이선준을 보며 나는 차갑게 말한다.

나는 이선준을 완벽하게 배신한다. 이선준의 표정에 분노와 고통은 사라진다.

오롯이 당혹감과 처연함 밖에 남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번갯불이 연신 번쩍인다. 이선준의 망연한 표정이 언뜻 보인다.

사정 후의 열패감은 이제 나는 모른다.

내게 남은 것은 떨림과 긴장,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예민해지는 피부다.

온몸의 감각이 극대화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선준은 사정 후의 남자가 으레 그렇듯

후회, 회한, 슬픔, 허탈감 같은 것들이 범벅이 되어 있다. 이선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선준이 운다. 내 가슴에, 내 얼굴에 눈물이 떨어진다. 이선준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본다.

처음이자 마지막 슬픔이다. 이제 나로 인한 분노도, 슬픔도, 욕망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으윽…. 으…."

이선준은 억눌린 울음을 운다. 그 몸이 슬픔 때문에 격하게 떨리고 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말한다.

"남자들은 이게 문제야."

나는 이선준의 머리를 잡아 당긴다. 이선준을 내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는다.

"왜 해 놓고 후회해?"

"으윽…."

이선준은 숨죽여 운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이선준을 마주본다.

약간 지쳐버렸다. 이선준의 일그러진 얼굴은 못생겼다. 웃긴 얼굴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 울어도 돼 다 끝났어."

나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이선준에게 입맞춤한다. 마지막 입맏춤이다. 다음은 없다.

이선준은 숨죽인채 오래 운다. 나는 그런 이선준을 끓어안고 그의 머리를 조용히, 오랫동안 쓰다듬는다.

무엇이 끝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느 무엇이 끝났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이선준이 슬픔에 지쳐 잠들 때 까지 끌어안고 있는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나는 문득 떠올린다.

살아야만 할 이유가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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