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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0화 (100/224)

00100 모순의 종착지 =========================

“처음부터 그래. 너는 액자를 쿨하게 버리는 나를 상상했겠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응? 네 머릿속의 나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니까. 맺고 끊는 게 확실하고,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안 그래?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지. 너는 네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는 내가 싫은거야. 맞지?”

이선준의 말에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무섭다. 이선준은 무섭게 내 마음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뭣보다. 너는 나보다 액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잖아. 저 액자는 너한테 더 소중하잖아! 그래서 그 따위로 함부로 다루면 내 기분이 좆같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왜? 너나 나나 서로 생각하는 게 똑같으니까! 내 말이 틀려? 틀리냐고! 말해. 너는 진짜 저걸 버리고 싶었어? 정말로 저게 쓰레기라고 생각했어? 말해!”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나는 결국 진심을 말한다.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거짓으로 모든 것을 덮으며 가버리기에 우리는 마음의 날카로운 조각들을 너무 많이 보여줬다. 이선준은 이를 악물고 있다.

“너는 나를 일부러 화나게 했고, 일부러 싸움을 걸었어. 맞지.”

“…….”

맞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섬뜩하고 처절할 정도로 모두 맞는 말들이다.

“너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

이선준의 비난은 옳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그랬다.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말로 꺼낸 적 없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연애 못하는 건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내가 싫어했다. 그런 관계가 되는 걸 내가 거부했다.

“너는 박헌영이 너한테 고백해도 친구도 지낼 수 있으면서, 왜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아버리는데? 너는 너한테 항상 추잡한 농담이나 지껄이는 그 새끼는 계속 웃으면서 대해주는데 왜 내가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굴지? 너는 왜 내가 완벽하길 바라는데? 나도 사람이고, 나도 불완전해. 나도 못난 지점이 있어. 나는 너의 우상이 아니야! 나도 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라고! 내 절제와 인내가 너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냐! 나도 욕망이 있어! 나도 갈망이 있다고! 네 환상 속에서 정의한 모습대로 내가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마! 너는 지금 나를 어떤 한계와 정의 속에서 가두고 있어. 왜 너는 내가 너한테 끌린다는 말을 하는 것까지 죄악처럼 말하는데! 나는 캐릭터가 아니야! 사람이라고!”

이선준의 서운함은 지금 생긴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아챈다. 그리고 충격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이선준은 숨을 고르며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나 격하게 감정을 쏟아내며 분노하는 이선준을 처음 본다.

"박헌영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면서, 왜 나는 안돼? 말해봐, 대답해."

이선준이 내 마음을 찌르고 들어온다. 이선준의 지적이 옳다. 나는 박헌영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으면서, 이선준은 절대로 안 된다고 못박아 놓았다. 그런 기미를 보이기만 해도 질색해왔다.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너가 나한테 제일 소중하니까."

지독하고, 끔찍할 정도의 모순을 나 스스로 밝혀버린다.

"너가 나한테 제일 중요하니까."

이선준은 감동하지 않는다. 감동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나를 역겨워하길 바라며 한 말이다. 이선준이 제일 소중하고, 제일 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연애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너만큼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제일 헤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연애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나는 내 모순과 마주하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입으로 내뱉는 순간 내가 얼마나 구차하고 역겨운 인간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딴 이유로, 네 바람 때문에 내 모든 감정과 욕망과 바람은 전부 묵살되어야 한다는거냐? 너는 나하고 연애 하기 싫어서, 너는 나를 그딴 식으로 무슨 어장관리 하듯이 네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냐고!"

이선준이 분노를 터뜨린다. 무언가 부숴버릴 것 같은 이선준의 모습을 평소에 봤다면 나는 공포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차분해져서 말한다. 내 모든 마음을 쏟아내버리는 순간부터 나는 집착을 포기해버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말들을 내뱉지 않았다.

"아니, 이제 안 그래도 돼."

맞다. 내 모순이다. 나는 모순이 있다. 알고 있다. 정신을 반쯤 놔버렸을 때부터 나는 이런 모순이 불러오는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이선준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해왔다. 그러기를 바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이선준은 그렇게 행동해왔다. 그런 것들은 전부 당연한 게 아니다. 이선준은 원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내 기대에 맞춰 행동해온 것이다. 나는 이선준에게 세상에서 가장 질 나쁜 폭력을 행사해왔다.

믿는다는 미명 하에 이선준을 계속해서 시험하고, 유혹하고, 손짓하며, 저지해왔다. 다가오려 하면 밀고, 멀어지려 하면 당겼다. 그 밀고 당기는 순간들 속에서 이선준의 마음이 어떻게 찢겨지는지에 대해서,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박헌영은 정말 이상한 자식이다.

이 지독한 모순덩어리인 내 내면의 어디에 사랑할 만한 지점이 있지?

나는 최저인 동시에 최악의 쓰레기다.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선준도 나도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의 모든 대화는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한바탕 쏟아낸 다음, 우리의 말들을 부정하는 또 다른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가 한 말들을 우리의 입으로 부정한다.

이선준은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으면서, 결국에는 그 모든 말들을 부정한다. 나 때문에 힘들다고, 내가 신경쓰여서 괴롭다고 말한다.

나도 이선준과 찍은 사진을 버리려 하면서, 결국 그것이 내게 소중한 것임을 고백한다. 내가 쏟아내는 모든 내 감정의 모순대로 행동해 달라고 이선준을 협박한다.

우리는 서로를 단순히 친구로 여긴다고,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해오다가 결국 그 말들을 전부 부정한다. 우리는 서로가 눈에 밟힌다.

우리의 말은 모두 모순이다. 이건 그냥 비명이다. 오늘, 우리의 말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서 비롯한다. 우리의 모든 언어들은 지금 감정이 생산해낸다. 감정이란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궤변에 불과하다. 우리는 궤변을 토해내며 서로를 물어뜯고 있을 뿐이다. 궤변으로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 자신의 망가진 부분을 절망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나로 인해 일어났다. 그것만큼은 명확하다. 더 이상 이선준을 괴롭히지 않기로 한다. 억지로, 폭력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 한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사과한다. 사과할 수밖에 없다.

내 잘못을 인지하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한다. 이건 타성이다. 이건 관성이다. 내 감정이 달리던 속도 때문에 나는 멈출 수 없다. 아직 멈추기에는 내 이성이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니다. 모든 것이 깨져버린 이 순간에, 더욱 확실하게 깨뜨려 버리기 위해서다. 산산조각으로 분해해 버리기 위해서다. 서로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는다. 한정운의 말이 맞다. 우리의 관계는 상처로 끝나버리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멈추는 방법은 없다. 이제 우리의 선택지는 조금 덜 아프게 부서져버리는 것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부서져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지껄여왔던 모든 광기의 단어들을 부정한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내 잘못된 욕심이 이선준을 점점 병들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된다. 이런 꼴로 친구라니, 이런 꼴로 동거하면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다니.

조금이라도 빨리 싸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싸운 이유가 어떻든 중요한 건 하나다. 와야 할 것이 조금 일찍 왔다. 그리고 그게 다행이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한다.

“뭘 참았는지, 뭘 원하는지 말해.”

이선준도, 나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전부 하게 해줄게.”

이선준이 멈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건 사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안함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분노하고 있다. 이선준을 틀 안에 가두고 있었던 내 자신에 대한 분노와, 그걸 결국 못 참고 터져버린 이선준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다.

나는 지금 생색을 내고 있다. 생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싸구려적 속성만큼이나 지금 나는 싸구려처럼 굴고 있다. 그걸 나도 전부 알고 있다.

그런 내 싸구려 같은 태도 때문에 이선준은 더욱 분노한다. 그저 사과나, 화해, 혹은 마음을 교환하길 바라던 이선준의 마음을 내가 다시 한 번 짓밟는다. 나는 평범하지 않다. 내 성격은 뒤틀렸다. 내 성격은 꼬였고, 지독하고, 엿같다.

나는 씨팔놈이고, 씨발년이고, 개 같은 놈이고, 좆 같은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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