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203화 (203/209)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후우, 시원하다."

나는 메인 모니터룸 안쪽의 연구원 숙소에 위치한 샤워실에서 깨끗이 몸을 씻고 나왔다.

더러운 점액질과 피가 뒤섞여 퀴퀴한 냄새를 흩뿌리고 있었는데, 이게 땀이랑 섞여서 방구석에 양말과 함께 처박아둔 치즈 냄새가 났던 것이다.

'역시 사람은 청결하고 봐야 한다니까.'

그래서 제대로 씻지 않았던 과거에는 사람들이 툭하면 전염병에 걸리곤 했던 거다. 공익광고협회의 만년 단골인 '손 씻기 운동'이 아직까지도 죽지 않은 이유다.

"인물이 훤한데?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만 역시 옷걸이가 좋아야지."

"원래 깨끗하게 씻고 나면 20% 정도 더 잘생겨 보인다고들 하잖아요. 괜히 남자들이 샤워하고 거울 앞에서 폼 잡는 게 아니라니까요?"

여자들은 주로 화장을 고치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면, 남자들은 있지도 않은 근육이나 턱선을 메만지며 '나정도면 꽤...' 같은 생각들을 한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멋들어지게 쓸어넘기면서, 자신도 여자친구를 만들 자격이 있다고 멋대로 착각한다. 안타깝지만 그건 매우 높은 확률로 정말 착각이다.

그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건 여자에게 먼저 연락이 올 만큼 잘 생겼거나, 휴지 대신 돈을 써도 될 만큼 부자인 사람들 뿐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아, '처형' 얘기까지 했었죠."

나는 신입이 던진 망고를 받아 군용 단검으로 9번의 칼집을 낸 뒤 껍질을 벗겨 먹었다. 잘 익은 망고는 과육이 포도 수준으로 부드럽지만, 포도보다 덜 물컹거리면서 잘 녹아내린다.

괜히 노인들 선물로 열대과일을 준비할 때 망고가 인기 1위를 먹는 게 아니다. 참고로 2위는 리치다.

나는 정육면체로 작게 썰린 망고 조각을 입에 털어넣으면서,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내가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나 자신을 인식하고, 주변을 돌아본 게 얼마만이지?

지금까지는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호국'이라고 불러주며, 이런저런 설명을 대신 해줬던 것 같지만, 이제 정신도 멀쩡해졌으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후우, 처형이라......"

심장과 혈관을 되찾았을때, 내 안의 빠져있던 퍼즐이 자리를 되찾은 것은 느꼈다. 혼탁했던 정신도 어느정도 멀쩡해졌고, 기억도 더욱 뚜렷해졌다.

구석을 살펴보니, 그곳에 마침 나의 기억에 대해 언급했던 '현재'가 곰방대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저 왜소한 체구에 곰방대라니. 김복순(79세, 반로환동, 합법)을 보는 느낌이다.

나는 다시 맞은 편에 앉아있는 333번에 시선을 돌렸다.

"다들 여기서 끝내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가장 먼저 답한 것은 역시 그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저 사람의 눈동자 속에는 떨쳐낼 수 없는 영혼의 피로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본인 오피셜로 1천 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니, 볼 꼴 못 볼 꼴 많이 봤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끝'을 원한다면 그냥 기다리면 되잖아요? 굳이 저한테 와서 부탁할 필요가......?"

"네가 핵심이야. 애초에 네가 아니면 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우습게 들리지만, 이 자리에 모인 제 6 처리 시설 출신 ES들과 333번은 모두 내게 처형을 원하고 있었다.

처형이면 그냥 처형인데, 저들은 그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넌센스였다.

물론 죽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 심적으로 편해지겠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연할 텐데 왜들 그렇게 처형에 목메는 건지 모르겠다.

"다들 왜 그렇게 처형을 못 받아서 안달이예요? 죽으면 어떻게 끝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도 있고, 벌레나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세계로 전생할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無)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서 다들 죽음을 두려워하잖아요. 죽음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인류가 가진 미지에 대한 공포는 DNA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첫 인류가 느낀 미지의 공포는 바로 '불'이었으며, 이윽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류는 더이상 불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불을 이용하면서 진화와 발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인류가 진화하고 발전할수록 더욱 많은 미지가 다가왔고, 그럴때마다 인류는 이해해서 공포를 극복하거나, 반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전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고, 후자는 종교적 신앙에 해당한다.

과학 기술은 가상 현실과 영원한 정신체의 거주지인 전뇌세계까지 만들어낼 만큼 발전했지만, 인류는 여전히 죽음의 뒤에 일어나는 일을 알아내지 못 했다.

그건 인류의 과학 기술로도, 대쪽같은 종교적 신앙심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인류 최초의 비밀이자 최후의 비밀이다.

그리고 내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있는 저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닌, 이미 체념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였다.

"처형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내가 시선을 살짝 돌리자, 천장에서 굵은 전기 배선이 뱀처럼 튀어나와 흔들거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붉은 서적에 대상의 이름을 새겨넣기만 하면 처형이 집행될 것이다.

지금까지 집행된 처형은 혼탁한 정신으로 돌아다니던 나를 대신해서 '눈'이 해준 것 뿐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질문을 받는다면...글쎄. 인간은 왜 숨을 쉴 수 있는 건가요? 라고 묻는 것 만큼이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지 싶다.

그냥 내 기억 속에 그런 지식이 담겨 있었고, 지금의 내 정신은 그걸 온전하게 자각하고 있으니까? 그게 내가 생각해낸 최선의 대답이다. IQ 84 치곤 꽤 열심히 생각했다.

"다들 이 세계가 또 한 번 무의미하게 반복되기 전에, 끝내고 싶어하는 것 뿐이야. 죽음 뒤에 어떻게 될지는 더이상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거지."

"똑같은 삶을 살기 싫은 게 이유라면 다른 삶을 살아보면 되잖아요."

"모든 생명체에겐 부여된 역할이 있어.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장난으로 일반화할 생각은 없지만, 아마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되겠지."

"왜요?"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약속이란 건 깨버리면 더이상 약속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틀이나 규율, 법 같은 것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깰 수 있다. 뒷감당이 힘들 뿐이지.

그런데 고작 자신의 인생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 뿐인데, 어쩌면 숨 쉬는 것 다음으로 가장 쉬운 일일 텐데, 그마저도 할 수 없다고 하니 조금 의외였다.

다들 의지박약이 좀 심한 것 같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야."

"오우 쉿...혹시 독심술도 써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여. 넌 우리가 왜 처형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잖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죠. 따지고보면 저더러 한 사람씩 목 비틀어 달라는 얘기인데, 그러면 좀......"

꿈자리가 뒤숭숭해진다고 해야 하나, 치킨에서 닭모가지가 나오면 괜히 찝찝해진다고 해야 하나. PTSD 비스무리한 것이 생길까봐 조금 걱정된다.

"물론 지금 당장 처형을 시켜달라는 건 아니야. 네가 할 일을 모두 끝냈을 때, 더이상 이 세계에 미련을 남기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네가 '해방'될 때, 우리도 함께 해방시켜주길 바라는 것 뿐이야."

"이 세계로부터?"

"이 운명으로부터."

가만 생각해보니 썩 나쁜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마침 잃어버렸던 기억 일부와 정신을 되찾으면서 할 일이 생긴 참이고, 눈앞의 호구들은 내게 원하는 게 있다.

즉 저들의 등골을 뽑아 단물을 쪽쪽 빨면서 모든 할 일을 끝마치고 나면, 마지막에 옛다 인심썼다 하는 식으로 처형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건 좀 건방진가?

'그래,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너무 싸가지가 없지.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아주면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해."

이렇게까지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거 보면, 사실 난 꽤 예의바른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분명 '좋은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장담한다.

"그럼 계약서를 쓰죠."

"그래.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계약서에 서명하길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지, 333번이 미리 복사기로 뽑아온 수십 장의 계약서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계약서라고 해봤자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갑인 나는 을에게 일거리를 주고, 을은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면 갑은 을에게 보상으로 처형을 제공한다.

약속을 어기는 놈은 레고 블록 1천 개 맨발로 밟기 형에 처한다는 내용도 추가했다.

"좋아요. 그럼 이쪽은 얼추 마무리 됐고. 이제...뭐가 필요하지?"

여행의 시작길에 필요한 것은 모두가 손을 모아 위로 처올리면서 '화이팅!' 하고 외치는 것이지만, 그것말고 좀 더 상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 예를 들면 거대한 바다로 떠나는 고무인간을 상징하는 '그 모자' 처럼.

나는 신입에게 턱짓을 해서 ES들 사이에 숨어있던 놈을 끌고 오게 했다.

이윽고 신입의 손에 붙들려 질질 끌려나온 것은 밀짚모자를 손에 꼭 쥐고 있는 농사왕이었다.

"내놔."

녀석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국 내게 밀짚모자를 넘겨주었다. 허수아비에게 씌워주는 볼품없는 밀짚모자였지만, 나는 이 모자에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널 만들어준 농부 할아버지가 이 모자를 만들어줬다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아무리 봐도 내 스타일이라 포기할 수가 없네."

노후 계획으로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이런 올드 빠-쑌에 사족을 못 쓴다.

성공적으로 농사왕의 밀짚모자까지 빼앗아 쓴 나는 메인 모니터룸의 컴퓨터에 접속해 고문재단의 현 상황을 파악했다.

'모든 인류가 이미 전뇌세계로 강제 이주 당했다라......'

접근권한이 미치지 못해 고문재단의 공동창립자인 최고 수석 연구원과 레이크 제레미의 행방은 알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친척'들의 행방 역시 오리무중인 상황.

나는 멀뚱멀뚱 서있는 일행들 중 현재를 콕 집어 물었다.

"최고 수석 연구원이랑 레이크 제레미 어디 있는지 알아요?"

"레이크 제레미는 북극 벙커, 최고 수석 연구원은 남극 벙커에 있다."

의외로 쉽게 답이 돌아오자 살짝 맥이 빠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쌍놈들이 자신들을 최대한 찾기 힘들게 하려고 북극과 남극으로 갈라져 숨었다는 게 괘씸해졌다.

따지고보면 그 놈들은 흑막이 아니다. 그저 이 세계와 고문재단이라는 무대를 뒤에서 준비해준 감독과 각본가에 불과할 뿐. 제작비를 대고 기획을 명령한 건 친척들이겠지.

두 놈의 위치를 쉽게 알아냈으니 더 볼 일은 없다. 사람을 보내기도 귀찮고,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도 귀찮다. 솔직히 말해서 구경꾼이었을 뿐인 놈들을 위해, 놈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진 않다.

내가 놈들 앞에 나타나 '세상에...이 모든 일들을 네 놈들이 기획한 거냐?!' 라고 외쳐봐라. 놈들은 아주 좋아 죽을 거다.

비정하면서도 냉청하고, 살짝 싸이코 같은 기질이 있는 과학나 나부랭이는 필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 최고의 쇼였습니다!' 라고. 일전에 집주인 아주머니의 저택에서 놈과 나눴던 짧막한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틀림없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은 특등석에 앉아 즐거운 구경을 했다며, 이제 굽든 삶든 알아서 하라며 삶을 포기해버릴 것이다. 마지막까지 썩어들어가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 꼴을 직접 봐야하는 것도 좆같고, 굳이 그 꼴을 보기 위해 남극과 북극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한 놈씩 가정방문을 해야 한다는 점이 2배로 좆같다. 두 놈이 가정 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마침 좋은 심부름꾼이 하나 있지."

나는 유일하게 제 6 처리 시설에서 탈주에 성공한 ES, 점멸분쇄기의 위치를 '현재'로부터 확인받았다.

놈은 복수를 원하고 있다. 복수를 위해 제 1 연구 시설을 방문해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모습을 감췄을 만큼, 자신을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고문재단의 상층부를 갈아마셔 버리고 싶을 것이다.

점멸분쇄기라면 전등이 존재하고, 대상이 혼자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다만 현재 최고 수석 연구원과 레이크 제레미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점멸분쇄기는 방황하고 있을 터.

핀 포인트로 위치를 찍어주면 좋다고 달려가서 두 놈을 갈아버릴 것이다.

"그 포인트를 어떻게 찍어주느냐가 문제인데......"

놈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의지를 가진 믹서기 라는 괴상한 표현이 어울리는 ES인지라, 빛 말고는 좀처럼 연관성을 찾기 힘들었다.

"빛...빛...레이저."

남극과 북극에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타이밍을 맞춰 인공위성이나 우주정거장에서 빛을 쏴준다면?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은 대충 모스부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메인 모니터룸의 통신 시스템을 이용해 고문재단 산하 우주정거장에 메시지를 보내둔 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우주정거장에 있는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

"일처리가 빠른걸. 지금의 널 보면 누구도 멍청하고 어리버리했던 널 떠올리지 못 하겠어."

"필요한 일은 다 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다들 한시가 급하잖아요? 나도 그래요."

일행들은 내게 처형 당해 안식을 얻길 원하고, 나는 본래 내가 가졌어야 할 것을 친척들로부터 되돌려 받아야 한다.

일은 이미 터졌고,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유속이 빨라진 강물처럼 급격한 변화로 느껴지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강물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던 이유는 아슬아슬하게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던 보호장치(둑)가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호장치는 다름아닌 재단의 시설들이었고.

하지만 시설의 기둥(조각)이 빠지고, 하나둘씩 둑이 무너져 내리면서 물살은 다시 폭풍같은 기세를 얻었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인지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이렇게 될 것도 예상했었지."

시설 밖으로 나선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한 남자가 있었다.

수백 만은 가볍게 넘을 듯한 호문클루스와 안드로이드 대군단을 이끈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처럼 비장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간 정이 있어서 마지막까지 건드리고 싶진 않았는데요."

"난 처음부터 널 죽이고 싶었다. 그런 '계시'를 받았으니까."

"그럼 제가 군에 입대했을때 바로 죽이시지 그러셨어요?"

"널 감싸고 도는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동시에 널 속이기 위한 계획도 필요했지."

나는 가볍게 손목을 풀고 목을 꺾어 뭉친 근육을 풀었다. 컨디션은 한결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은 상태로 몸을 움직여보는 건 처음이다. 솔직히 말해서 조절이 잘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적에게 칼도 주고, 칼을 쥐는 방법도 가르쳐주셨다? 이러면 원수인지 은인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한 우물만 파라는 옛 선인들의 말씀을 잘 지키셨어야죠."

"사실 맥없이 끝내버리기엔 조금 재미없다는 생각도 했다. 누님이 받은 '계시'와는 관계없는, 순수하게 나 자신이 품은 사심이었지만."

"그래서 강남중 불주먹이랑 관악중 뭉게뭉게 주먹이 토요일 저녁 7시에 모여서 맞짱뜨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으셨다?"

다 늙은 노인네가 쓸데없이 로망을 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하다못해 저 사람만은 고문재단과는 관계없는 노후를 보내길 바랐건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나를 몇번이나 죽이려 했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멍청했던 내게 가르침을 주었던 은사가 아닌가.

"처형은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남자답게 끝내드릴게요."

"좋지."

조원석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나온 순간, 필리핀 섬 일대를 가득 메운 호문클루스와 안드로이드 군단 역시 전방위에서 쓰나미처럼 밀고 들어왔다.

나는 돌진하기 직전, 333번에게 외쳐 물었다.

"여기서 내가 고향과 유산을 되찾겠다고 외치면 표절이겠지?!"

"제작사가 망해가는 중이라 아무도 신경 안 써!"

하긴 이 꼴이 되어버린 세상에 뭐가 중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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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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