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고독(蠱毒)의 왕(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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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먼 인류의 조상이 이 땅에 나타났을때부터 통용되었던 사실이다.
처음에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고, 함께 협력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해나갔던 것이 초기의 부족 사회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같은 도시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지만, 정작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나날이 감퇴하고 있었다.
단체를 단체로 느끼지 않고, 개인이 개인을 우선시 하는 극한의 개인주의 사회. 덕분에 인류는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을 통해 점점 더 서로를 마주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가상 현실 속에서 구성된, 거짓으로 점칠된 상대의 '아바타' 일뿐. 그것은 진짜 모습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누구도 진짜를 고집하지 않는 실정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미 진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모든 관계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실처럼 가늘고 연약하다.
가장 가깝다고 하는 가족 관계(혈연)조차도 무심코 끊어질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선생님, 저는 저 아이가 정말 무서워요. 저는 도저히......
-오늘 그 XXX 어린이한테 에피네프린 50mg 투여했습니까?
-뇌를 녹여버릴 작정으로 투여해. 심장을 터뜨리고, 혈관을 찢어버려도 상관없어.
-심정지 왔습니다.
-그 학계에서 보고된 적 없는 새로운 세포의 구성을 발견. 이거라면 인류는 전뇌세계로 가지 않고도 영생을......!
-지적 지수(IQ)의 급격한 감퇴를 확인했습니다. 그것 외엔 별 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지각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했는데요? 외부에서 끝없는 자극을 받다보니 신체가 위험을 느끼고 일부 감각을 극도로 발달시킨......
-오늘도 그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경비를 불러서 쫓아내버려.
-부부가 병원 앞에서 시위를......
-예, 저 XXX원장입니다. 그 부부를 처리해주셨으면 해서......
'나'는 기억력이 좋다.
떠올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즉시 수면 위로 부상한다. 거기서 필요한 것을 골라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절대기억능력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변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의 '나'는 혼탁한 기억 속에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보다, 혼탁한 정신 속에서 멀쩡한 기억을 유지하는 게 덜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에 행복한 추억 같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것만 끝없이 반복하다보면 정신이 혼탁해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체내로 들어오는 온갖 약물들로 인한 반동과 통증에도 버틸 수 있었고, '나'를 괴물 취급했던 의료인들의 불쾌한 시선이나 뒷담화도 적당히 흘려넘길 수 있었다.
정신이 멀쩡했다면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매우 고통스러웠겠지. 그래서 나는 멀쩡한 기억을 택했다.
'나'를 대신해서 눈이 세계를 보고, 귀가 세계를 들었다.
좁은 병실 안에서도 '나'는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없어도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는 없었지만, 병원이라는 현실과 바깥이라는 가상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쪽이든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리가 있었다면 정말로 걸어나갈 수 있었겠지. 손이 있었다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과 악수를 나눌 수 있었겠지. 입이 있었다면 그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을 것이고, 코가 있었다면 다양한 냄새를 맡으면서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 거다.
그밖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많은 요소들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무결했다면 그런 시시한 고민은 하지않아도 됐을 텐데. 병원에 처박혀 또래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것을 구경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의 '부모님'이 소리소문없이 처리당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영원히 불완전하고 무력한 존재로 남게 되는 걸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가족을 구원할 수 없고, 어쩌면 세계도 구할 수 없는 찌꺼기로 살다가 조용히 죽게 되는 걸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병석에 드러누웠다. 또 여느때처럼 시간에 맞춰서 간호사가 식사를 가져올 것이고, 의사는 약병과 주사기를 들고 나타나겠지.
그래, '나'는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다. 그런 미래가 확정되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을 놔버렸던 그때, 아마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게임이 하고 싶지 않나요?
게임 좋지. 병실에는 TV도, PC도, 게임기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게임이 몹시 하고 싶었다.
-이미 당신을 제외한 12명의 참가자들이 게임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 명쯤 더 끼어들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12명이나 같이 놀고 있다니! 그들 사이에 살짝 끼어들어서 노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12명이나 모였으니까, 13명이 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보고 듣기만 하는 건 솔직히 질리기도 했다. 그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더더욱 질렸고.
-하지만 처음부터 선택받은 그들과는 달리 당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하긴.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여기에만 처박혀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게 맞다.
-그러니 지금부터 20년 동안 '준비' 하기로 해요. 20년 뒤의 당신이 저들만 즐기고 있는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서.
하지만 어떻게 준비하지?
-제가 당신의 보호자가 될게요.
부모님은 이미 사라졌는데.
-괜찮아요. 이미 구했으니까.
다음 날, 나를 괴롭히던 모든 의료인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들을 처리한 것은 김선열과 이혜령이라는 남녀였다. 그들이 말하길 오늘부터 '나'의 새로운 부모가 되었다고 한다.
가족이 다시 생겼어! 게다가 여동생도 있어!
행복해!(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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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초코 척결!"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던 호국이 괴상한 기합성과 함께 일어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무슨 헛소리야."
"아, 방금 꿈을 꿨거든요. 민트초코 산에서 민트초코 산사태가 일어나서 민트초코 더미에 파묻히는 꿈이요."
"개꿈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호국은 뻑적지근한 근육을 풀면서 333번이 던진 영양팩을 받아들었다.
간밤에 열이 꽤 심했던 것 같은데, 신입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 사이 열이 싹 내려간 듯 했다.
빈 속에 영양팩을 흡입하면서 티슈로 땀을 닦아내니 제법 시원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 어디예요? 한국?"
"아니, 필리핀."
"바나나라도 먹으러 가요?"
"이상하게 한국인들은 필리핀의 대표적인 과일을 꼽으라고 하면 꼭 바나나를 선택하더라. 진짜 유명한 건 망고스틴이라고."
"필리핀을 가본 적이 없어서요."
텅 빈 영양팩을 손으로 힘껏 구겨서 아무데나 던진 호국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만에서 밤새 날아왔는지 때마침 목적지와 가까워진 참이었다. 이 상태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착륙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필리핀으로 날아온 거예요?"
"필리핀에 다음 목적지가 있었으니까. 현대 인류는 VR에 처박히면서 더이상 해외 여행을 가지 않게 됐어. 관광지로 유명했던 하와이에 가봤으면 알 거 아냐?"
"거긴 TF에서 통제했으니까 사람이 적었던 것 아니었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관광객이 적었어. 덕분에 하와이에도 시설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지. 지금은 그 시설도 폐쇄됐지만."
하와이의 시설이 폐쇄됐다는 얘기에 호국은 의아함을 느꼈다.
"우리가 갔을 때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우리가 하와이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폐쇄 처리 했어.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던 놈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더라고. 지금은 어디에 숨어있을지 감도 안 잡혀."
누굴 얘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호국은 높으신 분들만의 비밀스러운 사정이라고 생각해 적당히 무시했다.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착륙을 하면서 잠들어있던 감찰관들 역시 하나둘씩 깨어났다.
신입은 진즉에 깨어있었는지 호국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괜히 친한 척을 해보였다.
"떨어져 인마. 어디서 선임이랑 맞먹으려고 해."
이상하게 질척거리는 신입을 떼어낸 뒤, 호국은 착륙한 헬기에서 가장 먼저 내렸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루손(Luzon) 섬의 중심부. 관광객은커녕 현지인의 발길도 닿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에 '복합 시설'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제 5 연구 시설과 제 5 처리 시설은 같은 장소에 건설되어, 일반적인 시설의 약 2.5배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다.
연구 시설과 처리 시설이 나란히 붙어있었기 때문에, 같은 시설이라도 굉장히 넓을 것이라는 333번의 충고가 있었다.
"TF 산하 필리핀 지부. 여기도 제 6 처리 시설과 맞먹을 만큼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라지."
"저희 쪽은 사고 없었는데요."
"아직 만우절 아니다."
가볍게 코웃음 치며 호국의 곁을 스쳐지나간 333번이 시설 입구의 인식기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시설 직원들이 돈 될만한 것을 들고 나르진 않았는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입구가 개방되었다. 당연히 마중을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왜소한 체구에 심약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 달려나와 333번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꽤나 격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333번도 살짝 당황한 듯, 그를 따라나온 다른 연구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입을 열 수 없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신 자신을 자르니아 폰스라고 소개한 시설 관리자가 일행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제 5 연구 시설 소장과 처리 시설 소장은 어디 있는 겁니까?"
"그, 그것이...일단 안에서 얘기했으면 합니다."
이곳은 복합 시설인 만큼 소장직과는 별도로 시설의 관리자를 따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감찰대장의 방문에 소장이 아닌, 관리자가 직접 나왔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시설 관리자는 잘 쳐줘도 2.5급. 감찰대장이 직접 이끄는 감찰단과 마주하기에는 급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폰스나 휘하의 연구원들이 워낙 필사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일행도 군말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안내받은 장소는 연구동의 B5 메인 모니터룸. 처리동의 메인 모니터룸 통로는 격벽이 내려와 막힌 상태였다.
메인 모니터룸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다수는 감찰단이 온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반대로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도 바쁜 몸이라......"
"전 안 바쁜데요."
호국은 한 연구원이 가져온 열대과일 접시에 냉큼 손을 뻗었다.
망고스틴이고 나발이고,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열대과일은 역시 바나나였다.
"이 놈은 무시하시고. 누구라도 좋으니 한 번 설명해보십시오. 어째서 처리동에 있어야 할 경비나 직원들도 죄다 연구동에 모여 있는 건지. 메인 모니터룸의 모니터는 왜 대부분 맛이 간 상태인건지."
"사고가...있었습니다."
"사고라고 한다면?"
"사, 상층부에서 내려온 지시가 있었습니다. 최고 수석 연구원님의 직접 결재를 통해 내려온 프로젝트 시행령 말입니다......"
프로젝트라는 말에 333번은 눈을 부릅떴다.
"혹시 '조각'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이미 제 6 연구 시설을 다녀온 참입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제발 우리좀 살려주십시오!"
갑자기 그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엉엉 울자 가장 당황한 것은 호국이었다. 충격 때문에 열대과일이 담긴 접시가 튀어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입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캐치해서 다시 호국의 앞에 내려놓았다.
칭찬해달라는 듯 머리를 내민 녀석에게 호국은 파워 스매싱을 갈겨주었다.
"과일이 찌그러졌잖아 인마. 지금 내 앞에서 악력 자랑하냐?"
"...계속 하십시오."
333번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를 재촉하자, 폰스는 안경을 고쳐쓰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연구동의 B40 아래, 처리동의 B5 아래는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괴상한 식물이...아니, 그걸 식물이라고 해야 할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마치 '혈관'을 연상케 하는 붉은 식물이 끝도 없이 번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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