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96화 (196/209)

< 경비 업무 일지 : 고독(蠱毒)의 왕(2) >

---------

"설마 이런 식으로 복직을 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네만."

"서로 좋고 좋은 것 아닙니까?"

FCD 최고 위원회 소속중 한 명인 제임스 마커스는 홀로그램 아바타가 아닌, 진짜 현실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조원석 전 기동타격대 대장.

전성기 시절에는 최전선에서 기동타격대 2개 대대를 직접 통솔, 지휘하면서 FCD도 무시할 수 없는 공훈을 세운 남자였다. 기동타격대 내에선 최고 수석 연구원과 견줄 만큼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될 정도였다.

그런 남자가 선뜻 복직을 하겠다고 밝혔을 때, 사실 제임스 마커스는 썩 내키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TF를 위해 수많은 사건 사고에도 대응해주었다.

하지만 조원석이란 남자는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내고 싶다며 모든 것을 내던지고 한 번 은퇴했던 작자다. 그런 그가 갑자기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TF로 돌아와 복직을 요구한다면, 그건 속셈이 너무 뻔하지 않은가?

"무언가 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마굴에 다시 기어들어올 이유가 없을 것 아닌가?"

"이제와서 더 숨겨야 뭣 하겠습니까?"

그는 은퇴 후에 보였던 껄렁껄렁한 태도를 버리고, 다시 직장 상사를 대하는 듯한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가드-079."

"음......"

"FCD에서 가드-079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처리'할 생각인 것 아닙니까?"

"어디서 들었나?"

"전직 TF 기동타격대 대장입니다. 제가 그정도 정보통도 없을 것 같습니까?"

제임스 마커스는 꽤 오랜만에 책상 서랍을 열어, 케케묵은 필터 담배를 꺼내물었다.

평소라면 고급진 시가나 입에 물었겠지만, 다른 FCD 의원에 비하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지라 아직은 필터 담배가 더 익숙했다.

AI 비서가 전자 라이터를 뜨겁게 달궈 그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

거칠게 담배 연기를 흡입한 제임스 마커스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높은 자리에 있다보면 이런 상스러운 행동도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FCD가 TF 공동창립자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사건의 발단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겁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역시 하와이에서 벌어진 인공 ES 탈주 사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게 누구의 작품이었겠나? 최고 수석 연구원의 끄나풀들이 시도한 작품이야. 다행히 능력있는 감찰관 한 명을 딸려보내서 가드-079에게 처리하게끔 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드-079의 진면목을 '실제로' 확인했을 겁니다."

지금껏 제 6 처리 시설에 처박혀, 해당 시설의 관리봇과 파견된 조사관들에 의해 철저히 감춰져 있는 가드-079의 진면목.

그가 하와이에서 거리낌없는 행보를 보여주면서 FCD 의원들 모두 가드-079에 대한 평가를 전면적으로 재수정했다.

"...놈은 괴물이야."

"제가 말했잖습니까. ES보다 놈이 훨씬 더 무섭다고."

최근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은 FCD를 제외하면 재단 직원 대부분이 자세히 알지 못 한다.

피해자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력하게 당해버렸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안전한 장소에서 숨어 지냈기 때문이다. 기동타격대도 뒷처리를 위해 파견했을 뿐이라 널리 퍼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드-079의 진면목에 대해 알아챈 자들이 적다. 그가 ES를 부하처럼 자유자재로 부리고, 인공 ES라고 하더라도 육체적 능력으로 압도할 수 있을 만큼 비정상적인 강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현재 TF 공동 창립자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나?"

앞뒤 다 자른 질문이었지만 조원석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모든 인류의 정신체가 쉘터 프로젝트를 통해 전뇌세계로 이주할 경우, 두 번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없도록 모든 인류의 텅 빈 육체를 인공 ES로 바꾸는 것."

"그래. 우리가 확보한 기밀 자료에는 그런 어마무시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어. 최고 수석 연구원의 끄나풀들을 붙잡아 심문하니, 놀랍게도 놈들은 인류가 더이상 이런 망가진 세계에 미련을 가져선 안 된다고 지껄이더군."

"이 세계를 버리고 전뇌세계로 떠나야 한다. 기존의 TF 방침과 크게 다른 것은 없지만, 그들의 주장은 여차하면 '돌아올 수 있는 집'까지 완벽하게 부숴버리자는 것 아닙니까?"

"그 말대로일세. 만약 쉘터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시 돌아와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해. 이 세계가 망가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모든 인류는 이 망가진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이 세계는 우리의 고향이 아닌가? 그 고향을 인공 ES들에게 모조리 넘겨버릴 계획을 짜두고 있었다는 건...정말이지 그냥 넘기기 힘들더군. 속이 뒤틀리다못해 구역질이 나."

정신체만 쏙 빠진 인간의 빈 껍데기 같은 몸에, 인간의 몸을 통해 번식(분여)해나가는 인공 ES들을 심는다면 이론상 이 세계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다만 정신체가 된 인류가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사라진다. 혹시 모를 보험이 최고 권력자 두 명에 의해 팔려나갈 뻔 했던 것이다.

"놈들의 계획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다름아닌 가드-079였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그에게 쉘터 프로젝트의 최종 승인을 맡길 생각이었던 거지."

쉘터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인원들 모두 TF와 연결되어 있는 VR 기기에 접속한 상태여야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바깥에서 쉘터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 하니, 결과적으로 가드-079만이 유일한 적격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인류퇴화연맹, 미스터리 콜렉터, 진리교단. 놈들은 우리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모두 처리할 생각이야. 오히려 방해만 되니 전뇌세계로 이주하기 전에 싸그리 몰살시켜두는 게 낫겠지."

"안 그래도 대량의 정밀 타격 미사일과 자폭 안드로이드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TF 내에 존재하는 내통자들 역시 감찰관들이 돌아다니며 잡아내고 있던데, 그걸 위한 준비였습니까?"

"전뇌세계로 이주하는 걸 이제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네. 다만 우리가 돌아올 수 있는 집은 원형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 야만인들이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모든 안드로이드와 자동 기계들이 우리의 육체를 이 세계가 끝나는 그날까지 보존해주는 세계로. 그래야 안심하고 전인류가 전뇌세계로 이주할 수 있을테니까."

한쪽은 일말의 미련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쉘터 프로젝트 가동과 동시에 이 세계의 주인을 인간이 아닌 인공 ES로 바꾸려 한다.

다른 한쪽은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집을 남겨두기 위해 미리 프로그래밍해둔 안드로이드와 자동 기계들만이 활동하는 세계로 보존해두려고 한다.

두 계획에서 가드-079의 유일한 쓰임새는 쉘터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것 뿐이다. 기계가 아닌, 유일하게 인간의 몸으로 쉘터 프로젝트를 가동할 수 있는 최후의 낙오자가 그 뿐이니까.

그가 쉘터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나면, 그 뒤에는 어느쪽이든 쓸모가 없다.

인공 ES들이 주인으로 자리잡게될 더럽혀지고 망가진 세계에도, 안드로이드와 자동 기계들만이 남아 활보하는 무채색에 무의미한 세계에도. 그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가드-079를 먼저 처리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경우, 쉘터 프로젝트가 가동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의미를 제임스 마커스도 모르는 건 아닌지, 곧바로 조원석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쉘터 프로젝트 가동 전에 가드-079를 처리해도 상관은 없네. 그를 대신할 인물이 한 명 더 추가되었으니까."

"그게 누굽니까?"

"자신을 333번이라고 소개한 사내인데, 감찰관의 직위를 주고 가드-079와 함께 인류의 걸림돌이 될 TF 산하 시설들을 정리하라고 파견한 상태일세."

"그 자가 순순히 우리를 위해 쉘터 프로젝트를 가동해주겠답니까?"

"본인 말로는 너무 오래 살아서 지쳤다는군. 전뇌세계도, 이 망가진 세계에도 더이상 미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만 하면 본인이 직접 쉘터 프로젝트를 가동시켜주겠다고 약속 했네."

"믿을만 한 자입니까?"

"삶에 찌들어 있는 자였지. 그렇기에 믿을 수 있었네. 실제로 그는 이 세상의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자였으니, 천 년 가까이 살아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한다면, 삶에 미련도 없을테니 충분히 믿을 만 하지."

"그럼......"

조원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친누나인 조혜원이 말한 불길한 미래. 그 싹을 잘라내고 모든 인류가 안전하게 전뇌세계라는 미래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사명.

그건 바로 가드-079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가드-079는 너무 위험해. ES가 놈을 따르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을 입수한 이상, 더이상 그를 인간으로 볼 수는 없는 상황이지."

"그렇다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저만큼 놈에 대해 잘 아는 인간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담배 꽁초를 재떨이 위에 비벼 끈 그는 굳은 결의로 가득 찬 조원석에게 명령서를 전달했다.

"이 시각을 기점으로 FCD 최고 위원회 소속 겸 대표인 제임스 마커스의 권한으로 조원석에게 특급 처형관의 직위와 권한을 부여한다. 준비된 처형관들의 모든 지휘, 운용 권한이 주어질 것이며, 이는 가드-079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 그와 관계된 주변인들을 모두 말살할 때까지 유효하다. 물론 그 주변인에는 인류의 고향을 파괴하려는 두 배신자도 포함되어 있다."

"......"

조원석은 말없이 경례를 해보였다.

집무실의 천장을 열고 튀어나온 기계팔이 조원석의 가슴팍에 새로운 명찰과 ID 카드를 걸어주었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의 금속 ID 카드에는 특급 처형관이라는 직급이 새겨져 있었다.

"거슬리는 테러리스트 조직들 따윈 신경쓸 필요 없네. 놈들은 조만간 무차별적인 폭격과 자폭에 휩쓸려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니까. 자네는 사형수들을 처형하기만 하면 돼."

ES만큼 위협적인 놈들도 아니라 지금껏 봐주고 있던 테러리스트들의 본거지는 이미 파악이 끝난지 오래였다.

TF가 전세계, 모든 정부와 기업을 장악한 것도 모르는 피래미들이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TF의 각종 감시 자산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특히 가드-079를 처형하는 타이밍이 중요한데...그래, 가드-079가 TF의 모든 산하 시설을 처리한 뒤에 처리하는 게 좋겠군. TF를 위해 마지막까지 일해줄 그에게는 가능한 덜 고통스럽게, 짧고 편안한 죽음을 부여해주도록."

"본부대로."

TF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다.

그 말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인류가 이 지독한 운명으로 묶인 망가진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TF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스스로 모아둔 세계의 오물(ES)들을 잘라내면서 도약 준비를 하는 것 뿐이다.

마침내 마지막 오물이 사라지고나면,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난 TF는 전인류를 전뇌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이는 그것을 위한 자해(自害)다.

"쉘터 프로젝트 시행에 앞서, 모든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외과적 수술(Surgical Operation)을 진행한다."

-----------

< 경비 업무 일지 : 고독(蠱毒)의 왕(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