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고독(蠱毒)의 왕(1) >
"좋아, 데이터도 확보했으니 이만 올라가자."
제 6 연구 시설의 연구소장이었던 제스 소장이 남긴 압축 암호 파일을 B39 개인 연구실에서 확보한 호국은 복귀 준비를 했다.
B39에 있다면 처음부터 자신이 아니라 감찰관 일행이 회수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333번은 호국이 직접 회수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었다. 애초에 접근권한을 가진 것도 호국 뿐이고.
문자 메시지를 수십 개나 보내둔 여동생에게 압축암호파일을 전송하고나니 곧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몸에 안 좋은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어쩌면 기분나쁜 것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호국은 갑자기 펄펄 끓기 시작한 몸이 한층 더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지금껏 잔병치레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어린 시절을 병원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현상인지는 알고 있었다.
체내에서 면역체계가 날뛰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상태로 병원에 가면 항생제와 해열제를 처방해줄 것이리라.
축 늘어진 몸으로 신입의 부축을 받아 시설에서 빠져나온 호국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감찰관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코 말을 걸고 싶어진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저들에게 '명령'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친 놈도 아니고 왜 남한테 그런 걸 시키려고 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어둡고 질척거리는 욕망을 억지로 찢어 없앴다.
혹시라도 자신이 저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로니 라는 녀석에게 '엿이나 먹어라' 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내려간 것 치곤 초죽음이 되서 올라왔군. 그런데 옆의 그 놈은 대체 어디서......?"
아니나다를까, 신이난 로니가 호국의 축 늘어진 꼴을 보고 놀려먹다가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신입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내 부하야. 원래 같이 다니던 사이라고."
"하지만 이 시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어. 우릴 속였던 거냐?"
"속이긴 누가 속였다고. 네 눈이 병신이라 못 본 거겠지."
생전 처음 맛보는 심한 발열감에 호국은 무심코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하! 일처리나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운데? 그 꼬라지인 걸 보니 분명......"
"그만."
로니의 앞을 막아선 인물은 333번이었다.
그는 치켜뜬 눈으로 호국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집어삼켰군. '다리'처럼 충분히 힘을 빼고 집어삼켰어야지."
영문모를 소리를 내뱉은 그는 품 속에서 흰 종이 세 장을 꺼내 검지 손가락 끝으로 인을 맺었다.
그리고 감찰관 3인방에게 나눠준 뒤, 앞으로 24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종이를 떼어놓지 말라는 엄포를 내렸다.
"대장, 이건 뭡니까?"
본이 척봐도 비과학적이며 오컬트적인 냄새가 나는 종이를 팔랑거리며 물었다.
"너희들의 목숨을 지켜줄 부적. 그게 없으면 1시간도 못 버티고 뇌가 녹아버릴 거다."
"뇌가 녹다니...그게 말이나 됩니까?"
"호르몬이 평소의 수천, 수만 배 이상으로 증폭된다면 되겠지?"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거기까지 말한 본이 슬쩍 호국을 돌아보곤 입을 다물었다.
호국과 정체불명의 기동타격대 대원이 등장하자마자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으니, 그들이 원흉인 게 뻔했다.
"그러고보니 주변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전 시큼한 냄새가 납니다."
"그렇게 '착각' 하고 있는 것 뿐이다. 집중력을 끌어 올려라."
팀원들에게 짧막한 경고를 준 333번은 신입에게 턱짓을 해 호국을 헬기로 옮기도록 했다.
"제 6 연구 시설에 대한 FCD의 종말 프로토콜 가동이 승인되었다. 얼른 여기서 뜨자고."
일행을 모두 태운 헬기가 대만 영공을 벗어났을 즈음, 산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제 6 연구 시설 지하에서 폭음과 함께 뜨끈한 열기가 상공으로 터져나왔다.
시설 내부에 숨겨둔 핵폭탄들이 원격 제어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제 1 연구 시설과 제 4 연구 시설에 이어, 제 6 연구 시설까지 TF의 손을 떠나버렸다.
"이대로 제 5 처리 시설로 간다."
제 5 처리 시설은 같은 넘버링인 제 5 연구 시설과 함께 필리핀 루손(Luzon) 섬에 숨겨져 있었다.
본래는 필리핀보다 좀 더 가까운 중국의 시설들부터 도는 게 합리적이지만, 333번은 호국의 상태를 보고서 필리핀행을 결정했다.
'이런 상태로 연거푸 조각들을 삼키게 했다간 몸이 못 버틴다.'
넓은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중국과 러시아에만 TF 산하의 시설이 각각 3개씩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에 2개, 일본에 2개, 이미 거쳐온 한국과 대만에 1개씩. 다 합치면 총 12개의 넘버링 시설이 존재하는 셈이다.
넘버링에 포함되지 않는 우주정거장, AREA 51, 마닐라 해구의 시설들은 당장 주요 목표는 아니지만, 운명이 이끈다면 결국 호국이 발길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최대한 적응시켜야 한다. 이건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시체'로 재조립하는 작업이야. 서둘러봤자 하등 좋을 거 없어.'
333번은 하와이에서 한 번 본적 있는 신입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호국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333번을 노려보고 있다.
'귀'가 333번의 마음의 소리를 엿듣고 있다.
'다리'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힘을 주고 있다.
'호르몬'이 그의 체내에서 격렬하게 반항하며, 집어삼켜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
'지독하군.'
대부분의 힘이 소진되어 반항할 수 없었던 '다리'와는 달리, '호르몬'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육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아직 그것을 인정하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호국의 체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그의 몸을 발열로 펄펄 끓게 만들고 있었다. 그마저도 곧 잠잠해지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처음 흑백의 반전세계에서 호국과 마주쳤을 때부터, 그리고 25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세상에 콘스탄틴이 자신 하나만 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는 이런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이 자각없는 괴물을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성공의 대가나 실패의 결과따윈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저 그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TF라는 범세계적인 비밀 조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인류가 쉘터 프로젝트로 인해 전뇌세계로 도피하든 말든, 살만큼 살았던 333번에게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25년 간의 공백기 동안 전 인류중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볼 수 없었던 결말. 그 결말을 확인해야 한다.'
그들을 태운 수송 헬기는 다음 목적지인 필리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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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재단의 설립 동기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문제들과 위대한 인류의 사명감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이상이 있었지만 능력이 없었고, 능력은 있었지만 세상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던 두 청년이 우연과 필연에 의해 의기투합했던 그 날. 고문재단이라는 괴상한 단체가 발족되었다.
한없이 이상만 높았던 부잣집 도련님 레이크 제레미는 그 지위덕분에 세상의 뒷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둡고, 끈적끈적하며, 일반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면의 세계.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인류에게 위협적인 것들 뿐이라 꿈에서도 나올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좋은 배경과 두둑한 주머니가 있다고 한들, 능력자체는 평범한 일반인보다 조금 뒤쳐졌던 둔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인류를 보호하고자 하는 순수하고도 중2병 스러운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아주 대단한 능력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인터넷에서 만난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였던 MIT 출신의 한 청년과 해당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발 아래로 두고 있을 만큼 거만했지만, 그만한 지식과 능력이 있었던 천재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1.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변칙적 개체들을 특수한 격리 시설에 가둬버리고 엄중하게 관리하면 된다
2. 변칙적 개체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동안 인류는 빠르게 기술을 발전시켜 '피난처'를 마련한다.
3. 피난처는 다른 행성이어도 좋지만, 인류가 영원불멸하게 거주할 수 있는 전뇌세계가 가장 적합하다. 이를 쉘터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4. 만약 인류가 정해진 기한내에 피난처를 마련할 수 없다면, 고통스러운 결말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핵 폭탄을 터뜨려 비교적 '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앤드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5. 쉘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한 명은 현실에 남아 모든 이들을 전뇌세계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미 멸망했다가 복원된 흔적이 있는 세계로부터, 비정상적이며 비상식적인 변칙적 개체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류의 도피는 필수적이었다.
최종적으로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전뇌세계로 이주시키기 위해, 십수 년전에 설립된 고문재단은 세계 각지로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공동 창립자 레이크 제레미와 최고 수석 연구원인......
"쉘터 프로젝트는 얼마나 진척되었지?"
-머지않았다. 곧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종말이 다시 한 번 찾아오겠지. 그 타이밍에 인류의 '정신체'를 모조리 전뇌세계로 이주시키기만 한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촌극이 반복되는 일은 없을 거다.
Sound Only 표시가 떠있는 홀로그램 화상 전화 너머의 상대가 살짝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이상 젊지 않은 고문재단의 공동 창립자, 레이크 제레미는 감찰본부에서 올라온 실시간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며 재차 물었다.
"근거는?"
-내 말이 곧 근거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제 1 연구 시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을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러니 이왕 말이 나온김에 묻지. 네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한 가드-079, 그 자가 감찰관들과 함께 움직이지 시작했다. 이것도 때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인가?"
-아니. 그건 지금껏 그 어떤 역사에도,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물질이다. 마지막 멸망 후의 기록을 살펴봐도 그런 놈은 없었어.
"그럼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 라고 물어야지.
어느 쪽이든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레이크가 인상을 찡그리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사이, 자신의 오랜 동업자이자 파트너인 천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실실 웃는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희생양 후보는 놈을 제외하고도 아직 열 명이나 더 있어.
"그새 하나가 줄었군?"
-생체 신호가 사라졌으니 먹혔겠지.
"그럼 가드-079가 가장 유력한 후보 아닌가?
-놈들이 자리잡고 있는 각 시설들은, 한 번만 실수해도 역으로 상대에게 잡아먹히게 만드는 고독(蠱毒)의 항아리야. 그 가드-079가 역으로 잡아먹힌다면...실로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지겠지.
그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그것이 두 공동 창립자의 의견이었기에 레이크 역시 별 다른 반론을 제기하진 않았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 명이야.
"그렇지. 딱 한 명이면 충분하지."
그것이 이 지옥같은 굴레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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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고독(蠱毒)의 왕(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