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89화 (189/209)

< 경비 업무 일지 : 자연스러운 자연재해(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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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서를 천천히 읽어보던 호국은 이내 그것을 돌돌 말아서 갈무리했다.

"그럼 이제 좋은 소식을 들을 차례인 것 같은데요?"

"물론 좋은 소식도 준비되어 있지. 하지만 그전에 먼저 결정해줘야겠어. 정말로 그 명령서를 따를 거냐?"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당연히 상층부에서 하라고 했으니 해야죠."

"아니, 넌 부당한 대우나 명령 같은 걸 그대로 넘기는 타입이 아니야. 너도 부당한가 아닌가에 대해 판단하고 거기에 반발할 수 있는 주변머리 정도는 있잖아?"

마치 자신에게 왜 반발하지 않는 거냐고 되묻는 듯한 질문에 호국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그는 상명하복과 위계질서, 매뉴얼에 철저히 따르는 FM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융통성이란 걸 가지고 있었다.

필요이상으로 과하다, 부당하다 싶은 건 즉각 반발하고 바로 잡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올바르다고 판단할 경우, 곧이곧대로 납득해버린다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 호국은 이 명령서에 약간의 불만을 품었을지언정,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직장 생활에서 인사이동이나 직위 변경, 해제 같은 건 합당한 근거가 있으면 당연하게 시행되는 것들이니까.

오히려 이 명령서를 부당하다고 느껴야 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자기변호를 하자면 '이 시설에 익숙한 동료들이 남아있다' 정도?

하지만 동료랑 헤어지기 싫다고 상층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호국이 아무리 멍청해도 이 명령서를 대놓고 까는 일은 없었다.

"상층부의 명령을 따라야죠. 그러라고 돈 받는 건데."

"그래...그렇단 말이지."

호국의 의중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333번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럼 임시 파견 임무에 저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을 수락하셨으니 이 팔찌를 착용해주십시오."

가장 먼저 로니를 뜯어말렸던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호국에게 금속제 팔찌를 내밀었다.

과거 A사에서 유행했던 XX워치와 비슷하게 생긴 구조였다.

"이건 뭐죠? 실시간 건강 측정기?"

"...트래커입니다. 그걸 착용하고 있는 동안 당신이 어디에 있든, 누구와 대화를 하든, 어떤 신체 변화를 맞이하든, 모든 정보가 감찰본부 서버로 전송됩니다."

"왜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고 하니 더 따질 것은 없었지만, 필요할 때 벗어두면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주로 화장실을 갈 때.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한 번 착용하면 감찰대장의 허가 없이는 벗을 수 없습니다."

"벗겨지는데요?"

"...어?"

파직!

호국이 자신의 팔에 살짝 힘을 주자, 팔찌가 쇼크를 일으키며 멋대로 잠금이 해제되었다.

팔찌를 건네준 사내가 놀란 얼굴로 333번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생각하고 있든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창고에 너무 오래 처박아놔서 고장이 난 모양이야. 불량품을 사용할 순 없으니 그냥 버려."

"디자인이 예쁜데 아쉽네요."

파직파직 스파크를 튀기는 팔찌를 휙 던져버린 호국은 다시 333번을 돌아보았다.

"좋은 소식."

"아, 그래.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우선 나와 함께 한다는...아,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마. 이 임무가 모두 끝났을 때 너는 네가 간절하게 원하는 한 가지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오. 주황색 구슬 7개를 모아서 드래곤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요?"

"그건 나도 모르지. 다만 TF의 최초 설립자 나으리께서 말씀하시길,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라던데?"

"무엇 하나 확정된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그게 어떻게 좋은 소식이예요? 순 사기꾼이네!"

"물론 그 외에도 자잘하게 임무 수당이 있어. 특수 근무 수당, 위험 수당, 조사 수당, 작전 수당, 기타 등등. 싹 모아서 계산해보면 이론상 1일당 1천 만원씩 버는 셈이야."

월급도, 주급도 아닌 일급이 1천 만원이라는 얘기에 호국은 입을 떡 벌렸다.

감히 날 돈으로 날 사려는 건가! 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금액이었다.

"생각해봐. 이 임무를 성공리에 끝내면 너는 막대한 부를 얻게 되는 거야. 덤으로 간절한 소망을 하나 이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좋은 소식 맞지?"

"확실히 좋은 소식이네요. 바짝 벌고 퇴사하면 나한테 맞는 VR 기기도 사고, 마당딸린 으리으리한 저택도 사고, 효도도 하고......"

최고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연봉이 1억이 넘는 상황이라 10년 정도만 바짝 일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굳이 10년이나 일할 필요가 있는가? 당장 333번이 가져온 임시 파견 임무를 수행하면 10일에 1억이다. 한달만 일해도 3억이라는 거금이 들어온다.

"아,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뺀 금액이거든? 성과가 좋으면 배 이상의 수당이 들어올 거야."

팔랑팔랑. 또 다시 김씨 가문의 유일한 허점인 유전적 팔랑귀가 호국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운이 좋으면 한달에 10억도 땡길 수 있을 거야.'

10억!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10억이면 못 할 일이 없다. 전체적으로 물가가 많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장밋빛 찬란한 미래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럼 이제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다 들었으니까 가볼까요?"

"그래. 복잡할 거 없어서 좋네. 그리고 네 동료들과는 따로 인사할 필요없어. 이미 공문을 보내뒀으니까. 네게 맞는 장비도 이쪽에서 다시 지급해줄거고. 정 뭣하면 나중에 따로 연락해도 상관은 없어."

"일처리가 빨라서 좋네요."

일이 일사천리처럼 진행되자 호국은 싱글벙글 웃으며 감찰대의 뒤를 따라나섰다.

자신이 시설을 벗어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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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079의 생체 신호가 소실되었습니다.

"빌어먹을!!"

-여러 은폐 구역에서 폭동에 준하는 ES들의 과격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B41에 은폐된 6-01은 구속구를 풀어헤친 뒤 자신의 피로 'execution' 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고 있었다.

식인 식물로 형성된 소규모 밀림인 6-04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넝쿨을 채찍처럼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블록을 쌓은 사람을 즉시 죽여버리는 6-09는 탱탱볼처럼 은폐실 내부의 벽과 천장을 마구 튕기며 돌아다녔다.

B42의 카지노는 제 6 처리 시설 역사상 단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Close' 팻말이 걸렸다. 카지노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게임 소리도 울려퍼지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황금 달걀을 낳는 24마리의 닭들이 사육되고 있는 6-11에선 더이상 황금알이 배출되지 않았다. 닭들은 얌전히 자신들의 사육 케이스에 갇힌 채 잠들었다.

매우 피로하고 건강하지 않은 직장인들만 타겟으로 삼아 짓뭉개는 6-13은 미동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직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생성해주는 음료 기계 6-15는 더이상 조합식대로 음료를 배출하지 않았다. 쏟아내는 것은 피처럼 짙은 붉은빛의 액체뿐.

싸구려 백귀야행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어있는 6-20(다수개체)은 더이상 광란의 파티를 벌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급되는 '목격자'를 고문하지 않고 단숨에 목을 베어 죽였다.

트릭없는 마술사 6-30은 자신의 파트너인 바니걸, 모자 쓴 토끼, 그리고 매직박스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무대 위에 남긴 카드에는 붉은 글씨로 'execution' 이라고 쓰여 있었다.

리틀 아미 플라스틱 병정들은 소집 해제 나팔을 불며 자신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고, 시설 측에 플라스틱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밖에도 여러 ES들이 기이한 현상을 보이며 은폐실에 틀어박히거나, 반대로 난폭한 파괴 행위를 보여주었다.

"젠장...B-80...B-80에 있던 '억제 장치'는 어디로 간 거야?!"

-그 붉은 표지의 책이라면 가드-079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예. 중요한 물건이라 또 도둑들에게 노려지면 곤란하니, 경비인 자신이 안전하게 들고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미친!!"

모니터룸의 계기판을 힘껏 내려친 이두근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가드-079가 가져간 B-80의 고서적. 그것은 단순한 문화적 가치를 자랑하는 유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고문재단이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 최초 창립자와 그의 파트너인 최고 수석 연구원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한 괴서적들을 인간의 용도에 맞게 변화시킨 억제 장치였다.

그들이 말하길, 모든 시설의 B-80에는 어떠한 지식 일부가 담겨있는 조각(고서적)들이 쐐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B-80에 쐐기가 박혀있는 한, 자잘한 사건사고가 일어날지언정 재단에서 상상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조각은 모두 12개. 12위 방위에 맞게 찢어서 형태를 복원한 뒤, 그것을 억제력으로 삼아 쐐기처럼 박아두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두근도 가드-079를 담당하게 되면서 최근에야 알게 된 지식이라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조각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가드-079가 슬쩍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 오염 방지 및 기밀 유지를 위해 B-80 내부에 CCTV를 설치해두지 않은 것도 한몫 했다. CCTV를 통해 시설 내부를 감시하는 연구원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 하나의 지식이었던 것을 12개로 쪼개어 책으로 만들어 쐐기로 박았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그 쐐기를...제 6 처리 시설의 기둥이었던 가드-079가 들고가버렸다.'

본래 제 6 처리 시설은 가드-079라는 거대한 기둥이 없어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튼튼한 쐐기 덕분에 ES들이 쉽사리 빠져나오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둥과 쐐기가 함께 빠져버린 지금, 제 6 처리 시설은 ES들의 발작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프롯 너는 왜 가드-079를 막지 않았던 거야?! 그 침입자들이 가드-079와 접촉하지 못 하게 했어야지!!"

-그들 중 한 명이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전자기기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가드-079의 스마트패드 통신 기능을 망가뜨렸습니다. 엘리베이터 또한 그가 직접 조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미친! 설마 FCD에서 초능력자를 보내기라도 했단 건가?!"

그거야말로 진짜 도시전설 중의 도시전설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두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거대한 상황판을 올려다보았다.

시설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기둥과 쐐기를 잃어버린 ES들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며, 당장이라도 시설을 작살낼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까지 은폐실을 파괴하고 탈주를 시도하는 ES는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다.

'점멸분쇄기는 이미 탈주한 상황이라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인 건 역시 B79의 쌍둥이 세포다.'

자신의 온전한 세포를 되찾은 6-380(쌍둥이 세포)은 언제라도 인류를 멸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무적의 대량학살병기다. 이전과 같은 제압 수단이 통하지 않을테니, 사실상 놈이 날뛴다면 인류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상황.

"...음?"

CCTV 화면을 몇번이나 넘겨보던 이두근은 의아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러다 시퍼래진 안색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쌍둥이 세포 본 사람 손 들어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선 연구원들은 모두 질린 얼굴로 이두근을 바라보았다.

이들 중 오늘 6-380을 관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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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자연스러운 자연재해(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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