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88화 (188/209)

< 경비 업무 일지 : 자연스러운 자연재해(1) >

실패.

그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나락까지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힘이 있고, 위대한 성공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며, 마지막 희망을 마지막 절망으로 바꿔버리는 악독함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 실패가 꽤 오랜만에 김호국이란 남자를 짓눌러버렸을때, 호국이 택한 것은 자신의 사무실에 찌그러진 빨간코 루돌프의 머리 박제를 장식하는 일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은 널 벌써 잊었겠지만, 난 널 잊지않을 거야 루돌프."

자신의 주먹에 맞아 반쯤 찌그러진 루돌프의 빨간코에는 작은 알전구가 삽입되었다. 덕분에 보기엔 흉할지 몰라도 제대로 빛나고 있었다.

설마 그 타이밍에 눈앞에서 산타를 놓치게 될 줄이야.

호국은 얼마전 B55에서 마주쳤던 산타를 허무하게 놓쳐버린 사실 때문에 기분이 착잡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비쩍 마른 몸에, 척봐도 따뜻해보이는 산타복이 아니라 붉은 재킷에 솜털만 달아놨을 뿐인 인상착의. 그건 어딜 어떻게봐도 가짜 산타였다.

'하지만 그 놈 외에 달리 쳐들어왔던 산타가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그 놈이 산타였던 거겠지. 요즘은 산타도 일용직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산타라는 직업이 절대 정규직이 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1년 중 쉴 수 있는 날은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1월 1일이 오기 전까지뿐. 그 다음은 다시 1년 내내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선별하고,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 병신같은 직업을 정규직으로 삼느니, 차라리 1년 중 대부분을 등대에서 살아가는 등대지기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산타들이 제풀에 꺾여 직장을 그만두면, 산타 본부에선 일용직 노동자들을 구할 수밖에 없었겠지. 말 되네.'

우선 산타 본부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만, 이미 산타에게 흥미가 사라진 호국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때 마주친 산타는 호국의 면전에 대놓고 '나쁜 아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쁜 아이였다고 하니까 VR 기기를 못 받은 거겠지. 산타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 어쩔 거야.'

자신이 15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동안 VR 기기를 받지 못 했던 이유는 그것으로 납득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그 괘씸한 놈을 사로잡아서 고문을 해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웠지만.

설마 산타라는 작자가 폭탄 조끼를 껴입은 부하 산타들을 잔뜩 데리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산타의 기술력이나 화력을 염두해두며 준비한 호국이었지만, 역시 거기까진 예측하지 못 했다.

"에이, 일이나 하자."

이제 '진짜'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12월 24일, 즉 크리스마스 이브.

TF 상층부에서 12월 24일부터 1월 1일까지는 공식적인 휴무라고 공문을 내렸기 때문에, 반대로 가드인 호국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졌다.

크리스마스 장식도 호국이 달아야 하고, 난방 설비 점검도 호국이 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직접 공수해와서 모니터룸 중앙에 떡하니 박아놔야 한다.

그리고 연구원들이 진짜 휴일을 즐기는 동안 자신은 시설의 안전을 책임지면서, 올 한해도 자신은 모태 솔로에서 벗어나지 못 했음을 한탄할 예정이다.

꽤 화려해진 경비 사무실에서 나선 호국은 텅 빈 엘리베이터에 홀로 탑승했다.

일전의 전투에서 경비팀 79기의 전력을 분석한 프롯은 해피를 다시 정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신입 2호에게는 겨울철에도 시설 지하에서 농사 짓고 살 수 있는 땅을 제공해주었기에, 지금쯤 녀석은 정신없이 밭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신입은 그 날 이후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서 농땡이나 부리고 있는 거겠지. 잡히면 엉덩이를 때려주겠어.'

최근 들어 갑자기 무거워진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면서, 호국은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던 B1 대기실로 향했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통로와 엘리베이터 사이에 존재하는 B1 구역. 그곳은 일단 외부 방문자들의 대기실로 명명되어 있었다.

'바쁠 때에 왜 나만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르니까 가봐야지.'

상층부에서 내려오신 높으신 분의 호출이라고 하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TF내에서 호국의 위상이 대단한 것과는 별개로, 호국 본인은 위계 질서와 매뉴얼을 철저하게 지키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프롯도 없고, 해피도 없고, 신입들도 없다. 오로지 혼자서 B1 구역으로 올라온 호국은 정장 차림에 방한 재킷을 덧입고 있는 한 무리와 마주쳤다.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딱 한 명만은 호국과도 인연이 있는 사내였다.

"오, 아재. 취직하셨나봐요?"

"아재 아니다."

"30대 이상에 수염 났으면 아재죠."

"듣고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일부러 잔뜩 무게 잡으면서 대답하던 그는 곧 피식 웃으며 호국과 악수를 나눴다.

자칭 333번. 훤칠한 키에 살짝 색이 빠진 것 같은 금발, 조금 어색하게 다듬은 턱수염과 세상만사에 찌들어 있는 듯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일전의 휴가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징징거리던 그에게 TF를 소개해줬었는데, 몇 개월만에 같은 직장의 동료로 만나게 된 것이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TF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면 다 받아준다니까요?"

"그런 것 같더라고. 내가 생각해도 너무 스무스하게 일이 풀리던데. 혹시 내 추천서라도 썼던 거냐?"

"아뇨. 제가 왜요?"

"...나한테 TF를 소개해줬으면 당연히 추천서도 써줬어야지. 알고보니 너 꽤 유명하던데 그정도 능력은 있었잖아."

"추천서는 능력없는 놈 낙하산으로 꽂을 때나 쓰는 거죠."

순간 333번은 호국에게 '너도 추천 받고 들어왔잖아' 라고 말하려던 것을 참았다.

호국이 전직 기동타격대 대장의 추천을 받고 TF에 입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무능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유능하다. 그래서 더욱 많은 시선과 불필요한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넌 내가 왜 아랫것들 끌고 이 추운 날에 여기까지 왔을 것 같냐?"

"휴양하러 오셨어요? 제주도 탄산온천이 유명하잖아요."

"진짜? 왜 말 안 해줬냐?"

"연락도 없이 왔잖아요."

"내가 잘못했네."

"그만들 하십시오!"

두 사람의 시답잖은 꽁트를 보다못한 부하중 한 명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진지하게 공무에 임해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수다나 떨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대뜸 두 사람을 시장통 주부들로 치부해버린 사내는 목에 '3급 감찰관 로니 웨슬리' 라는 ID 카드를 걸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과 급이 같은 것을 확인한 호국은 그러려니 했다. 조직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커리어를 달성한 인간들은 대개 콧대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상병이 된 병사, 중사가 된 하사, 중위가 된 소위. 그밖에도 과장으로 진급한 대리 같은 놈들. 이상하게 어중간하면서도 적당한 권력을 가진 놈들일수록 근거없는 자신감을 마구 '뿜뿜' 한다.

그들이 왜 눈치없이 그런 짓을 하는 건지는 눈썰미가 좋은 호국도 아직 알아내지 못 했다. 사회생활의 미스터리 같은 개념이었다.

"조직내에서 왕따 당하세요?"

"아니. 나 완전 인싸야. 다들 내가 일 잘 한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니까?"

"근데 부하가 왜 상사의 대화에 끼어들어요?"

"내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부하한테 먹히셨네. 미리 축하드려요?"

"아니."

빠악!

깔끔한 레프트 훅으로 로니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린 그는 차분하게 피묻은 주먹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순식간에 상사의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진 로니는 벽에 처박힌 채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턱뼈가 나가거나 이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무심코 다리에 힘이 풀렸을 만큼 묵직한 한 방이었다.

문제는 그걸 다른 부서나 시설 소속 직원이 아니라 직속 상관에게 맞은 결과였다는 것이지만.

당황한 로니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333번은 그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나한테 목숨 하나 빚진거다. 여건 되면 나중에 갚아라."

"무슨......!"

그가 이의를 제기하려던 찰나, 팀원들이 나서서 로니를 뜯어말렸다.

그래도 명색이 감찰국장(1급) 바로 아랫급인 감찰대장이라, 로니가 하극상이라도 일으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팀원들은 그래도 눈치가 있다는 걸 확인한 333번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제 자신이 좀 인싸처럼 보이느냐고 되묻는 듯한 태도였다.

사실 그가 인싸인지 아싸인지, 아니면 찐따인지는 호국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호국은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어필하며 본론을 요구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데요? 이두근 팀장님이라도 불러드려요?"

"아니. 볼일이 있는 건 너뿐이라서 다른 사람들은 필요없어. 당연히 초지능 AI나 ES, 바이오로이드도 필요없고.

호국은 재빨리 기억을 되짚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산타를 못 잡아서 징계라도 내리려는 건가?'

속으로 이마를 탁 치며, 호국은 자신의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를 떠올렸다.

경비씩이나 되는 놈이 시설에 침투한 산타를 잡지 못 했으니 징계감이 분명했던 것이다.

"먼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가지씩 있어. 어느쪽부터 듣고 싶냐?"

"나쁜 소식이요."

"호오, 이유는?"

"원래 맛없는 반찬부터 먹고 맛있는 반찬을 먹는 게 제 방식이라서요."

황천의 뒤틀린 명태순살튀김과 소시지 야채볶음이 같이 나왔을 때, 호국은 코를 막고 명순튀부터 먹곤 했다.

호국의 말을 이해한 333번은 자신의 품 속에서 잘 봉인된 서류 한장을 꺼내들었다.

"요즘 같은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이런 구닥다리 종이가 웬 거냐 싶겠지? 그런데 때론 이런 구닥다리가 가장 안전하고 신뢰가 있는 법이야."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그럼 됐고."

그가 넘겨준 서류의 봉인을 풀어 휙 펼쳐본 호국은 눈에 확 들어오는 내용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인사발령?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멀쩡하게 제 6 처리 시설에서 일 잘 하고 있던 자신에게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이라니. 호국은 기가 찼지만 일단 본문 전체를 확실하게 읽어나갔다.

우선 인사이동은 어디까지나 '임시' 이며,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에 호국이 임시 인사발령을 받게 되는 이유가 조목조목 쓰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해당 직원의 인사발령에 대한 합리적이면서도 합법적인 근거(by 제임스 마커스)

-해당 직원의 업무 능력은 제 6 처리 시설에 국한되기엔 소모가 극심하다.

-해당 직원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다수의 FCD 의원들이 인사발령에 동의했다.

-해당 직원이 TF의 발전과 인류 보호, 나아가 '쉘터 프로젝트'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인물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해당 직원이 제 6 처리 시설 ES와 필요 이상의 접촉을 하고 있기에 일정 기간 '정신 오염' 안정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해당 직원의 (ES에 대한) 업무 능력 및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위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해당 직원에게 제 6 연구 시설부터 제 1 연구 시설까지의 순차적 인사 발령을 시행한다.

*해당 직원을 임시직급인 '경비단장'에 위임한다.

*경비단장은 휘하에 2개 경비팀을 둘 수 있으며, 시설 관리 외에도 외부 작전을 통해 ES를 포획,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단 기동타격대와의 합동 작전을 벌일 경우, 기동타격대의 명령에 따른다.

*경비단장은 휘하의 경비팀을 구성하기 위해 직접 면접을 진행할 수 있다.

"오우 쉿......"

제 6 처리 시설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있던 호국에겐 확실히 청천벽력같은 나쁜 소식이었다.

------------

< 경비 업무 일지 : 자연스러운 자연재해(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