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86화 (186/209)

< 경비 업무 일지 : 재단을 위한 산타는 없다(5) >

-----

"말랑말랑해."

호국은 목덜미에 칼침이 박힌 루돌프의 코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말랑말랑한데! 만지기만 해도 심신이 안정되는 이로운 효과가 있는데!

"왜 귀여운 루돌프가 아닌 거냐고......!"

이런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루돌프를 원하는 건 세 블록 아래의 Fuck↗you↘를 외치는 놈들밖에 없을 터.

호국은 자신의 테스토스테론 기능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축 늘어진 루돌프의 시체를 프롯에게 넘겼다.

곧 천장에서 거대한 기계팔이 튀어나와 루돌프의 시체를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 아마 박제를 만든다던가, 통째로 소각장에 집어넣으려는 의도이리라.

분위기는 이미 라스트 보스 잡고 엔딩 크레딧 봐야 할 것 같았지만, 저 아래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프로틴 덩어리들의 기세는 호국조차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호국은 자신이 머슬 루돌프와 열심히 싸우는 동안, 뒤에서 구경만 했던 신입들을 한 번 째려봐주었다.

해피보다도 쓸모없는 놈들! 월급 루팡들! 똥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어떤 말로도 저 괘씸한 것들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가능하면 얼차려라도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호국은 턱짓으로 팀원들을 불러들였다.

"진짜 그 바퀴벌레랑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그래도 시설에 무단 침입한 놈들이 멋대로 선물을 두고 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혹시라도 지난 번처럼 거대 바퀴벌레가 반쯤 미쳐 자신에게 달려들까봐, 호국은 두 신입을 자신의 방패막이로 세운 채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이윽고 B46의 고위험군 복도에 도달한 일행은, 6-55의 방문에 대형 전기 드릴을 설치하고 있는 루돌프 일당을 포착했다.

무슨 은행 금고털이범들도 아니고, 가드나 연구원의 보안 카드가 아니면 외부인은 절대로 열 수 없는 은폐실의 문을 작정하고 박살내려 하고 있었다.

"그거 건드리지 마 이 새끼들아! 거기 있는 애는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성인 남성과 맞먹는 크기의 거대 바퀴벌레가 사사사삭!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자아내며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 있는가?

호국은 본 적 있고, 직접 몸을 부대낀 적도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VR 기기에 접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빼면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하지만 호국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머슬 루돌프들은 열심히 되새김질이나 반복할 뿐이었다.

저 매력적인 빨간코를 씰룩이면서, 촉촉한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빵빵한 근육을 자랑하는 루돌프라니. 산채로 꼬챙이 구이를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사나이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법.

호국은 자신이 제압했던 루돌프에게서 잘라낸 녹용 조각을 놈들 앞에 던졌다.

"느그 동료 한 명은 이미 내 보신용 녹용탕으로 만들어지고 있을 텐데, 끼고 싶은 놈은 지금 말해."

꿈틀. 근육이 움직이면 정말 그런 소리가 나는가 싶었는데, 정말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대형 전기 드릴이 ES 6-55의 은폐실 문을 박살내기까지 앞으로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꽤 고급 장비를 사용하는군요.

프롯의 경고대로 놈들은 근육돼지 답지 않게 질서와 체계가 잡혀있는 듯 했다. 처음 저위험군 통로에서 매복하고 있던 것도 망을 보던 스카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료의 죽음을 눈치챘음에도 생각보다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역시 나 말고도 산타가 좆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거야. 다들 나처럼 배신 당하고, 동심을 짓밟히고, 불우한 사춘기를 보냈겠지."

하지만 저 놈들이 여전히 멀쩡하게 무단 침입과 무단 선물 기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국은 자신 외의 도전자들이 모두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이름모를 선배들이 산타를 잡아 족치려고 달려들었다가, 놈들의 강력한 기술과 근육 앞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진 호국은 마침 착굴기로 인해 파괴된 복도의 벽에서 적당한 크기의 잔해를 집어 놈들에게 던졌다.

"느그 사장(산타) 나오라고 해!!"

태앵! 철판 하나가 선두에 서있던 루돌프의 이마를 맞고 튕겨나갔다.

"내가! 어?! 느그 사장한테 소원도 빌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다 했어! 인마!!"

가가가가가각!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드릴의 파쇄음 속에서도 호국의 울분에 찬 고함성은 충분히 컸다.

"근데 뭐? 산타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셔? 누가 착한 아이이고, 누가 나쁜 아이인지 다 알고 계셔?! 다 알고 계시면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

10번 뽑기에서 1번쯤은 당첨이 걸릴 법도 한 게 세상이치건만, 호국은 무려 15번의 소원 빌기에서도 VR 기기를 받지 못 했다.

크리스마스 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들뜬 얼굴로 선물 상자를 풀어헤쳤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은 슬픔과 아쉬움 뿐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 원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해맑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VR 기기는 절대로 가질 수 없었지만.

"꼭 그렇게! 날 놀려야만 속이 시원했냐! 이 개새끼들아!!"

고전 영화에서 봤던 인상깊은 대사를 따라하며, 호국은 허리춤에서 기관단총을 뽑아들었다.

"니들 족치다보면 그 새끼도 알아서 기어나오겠지. 오늘부로 빨간코 루돌프는 역사 속에서만 길이길이 기억될 거라고 복창해라."

호국이 괴성을 내지르고, 동시에 신입과 해피가 먼저 돌진했다.

루돌프들은 전기 드릴을 관리할 한 마리만 남겨둔 채, 모두 앞으로 튀어나와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먼저 격돌한 것은 선두에 자리잡은 대장격 루돌프와 신입이었다.

허공에서 격돌한 둘의 주먹은 일순간 공기마저 찢어발기는 충격파를 발생시켰는데, 신입은 부러진 팔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시키며 루돌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으드득!

깔끔하게 올라간 어퍼컷이 루돌프의 턱주가리를 강타하자 튼튼한 이빨이 박살나며 피를 흩뿌렸다. 이제 그 루돌프는 평생 당근을 씹지 못 하게 되었다.

어퍼컷을 정통으로 먹인 신입은 놈의 복부에 기관단총의 총구를 쑤셔넣고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초근거리에서 쏟아넣은 9mm 탄환은 루돌프의 질긴 털가죽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강력한 복근과 질긴 털가죽은 어찌어찌 기관단총 난사를 버텨낸 듯 했지만, 신입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처가 남은 루돌프의 복부에 주먹을 쑤셔넣고, 복근째로 내장을 비틀어 찢어버렸다. 울컥, 하고 각혈을 한 루돌프가 홧김에 양손을 깍지끼고 망치 같은 주먹을 내려쳤다.

콰앙!

인간의 머리와 짐승의 주먹이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신입의 머리통도 헬멧과 함께 박살이 난 줄 알았으나, 신입의 머리는 상상 이상으로 돌머리였다.

'그래, 내가 저 놈 머리통을 자주 때려봐서 알지.'

멀쩡한 머리를 들어올리려던 신입의 등 뒤에서, 갑자기 호국이 나타나 녀석의 뒤통수를 밟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깊은 산속 옹달샘!"

약 5m 위에서 내리꽂는 날카로운 킥. 호국의 발끝이 노리는 것은 선두의 뒤에서 타이밍을 재고 있던 또 다른 루돌프의 꼴통이었다.

"누가 와서 먹나요!!"

빠악!

어찌어찌 두꺼운 팔을 'X'자로 교차시켜 호국의 살인 킥을 받아낸 루돌프는 쉬익! 하고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꼬라지가 저렇지만 않았더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슴이었을텐데. 지난 크리스마스 동안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이 아니라 프로틴 보충제만 쳐먹었나 싶다.

"눈을 그렇게 뜨면? 뭐 어쩔 건데?"

뚜둑, 뚜뚝.

호국도 할 말이 많았던 건 피차 마찬가지라 목의 근육을 가볍게 풀었다.

호국의 '눈'은 루돌프의 초롱초롱하고 투명한 눈동자 속을 아주 깊은 곳까지,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다.

루돌프는 호국을 더이상 선물을 나눠줘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말이 무엇인고 하니, 15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는 동안 호국을 실컷 놀려먹었으니 이제 더는 볼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단물만 쏙 빨고 뱉은 껌처럼, 호국을 끝까지 원하는 선물 한 번 받지 못한 병신으로 내버려둔 채 비웃을 속셈인 게 뻔했다.

'날 바보 취급 하는 건 괜찮아. 실제로 내 머리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주변인으로부터 멍청하다느니, 고작 그런 것도 못 하냐느니 같은 구박을 받아도 호국은 지금껏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한 아이였던 호국을 착한 아이 취급 해주지 않는 것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선물은 산타 같은 겨울철 성수기에 등판하는 양아치가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1년간 고생했다며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그러니 이제 산타의 선물꾸러미를 쟁취해야 할 때가 왔다!

"느그 산타는 김밥에 오이 넣어 먹는다며?"

"!"

루돌프는 설마 자신의 상사인 산타가 김밥에 오이를 넣겠느냐며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김치찌개에 고등어를 넣겠지."

"!!"

참치 김치찌개인줄 알았다가 찌개용 고등어 특유의 비린내와 식감에 두 번 빡친다는 고등어 김치찌개!

벌써부터 루돌프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마지막 일격을 먹일 때가 됐다.

"그리고 생선까스에 타르타르 소스 안 찍어먹지?"

"!!!"

생선까스엔 무조건 타르타르 소스!

호국이 내뱉은 중상모략, 유언비어 속 산타는 생선까스에 돈까스 소스나 뿌려먹는 맛알못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그오오오오!!"

결국 모순을 견디지 못한 루돌프가 먼저 레프트 훅을 휘두르며 호국에게 달려들었다.

모든 싸움에선 기본적으로 먼저 흥분하는 쪽이 불리하다. 인간의 자그마한 두개골따윈 뼛가루로 만들어주겠다는 일념하에 내지른 루돌프의 주먹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상반신을 살짝 비틀어 레프트 훅을 흘려넘긴 호국이 놈의 딸기처럼 새빨간 빨간코에 정통으로 팔꿈치를 꽂아넣었다.

기가막힌 카운터에 루돌프의 빨간코는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며, 더이상 반짝반짝 빛나지 않게 되었다. 저런 찌그러진 코는 산타조차 역겹다며 손절할 것이다.

"부오오오?!"

역시 극한의 근육을 추구한 놈이라도 치명적인 급소를 공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놈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널부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운트를 잡은 호국은 놈의 젖꼭지가 있을 법한 부분을 관수(貫手)로 미친듯이 찔러주었다.

"이건 내가 파릇파릇한 신병 시절 군 선임에게 당했던 부조리 100개중 하나, 무한 찌찌뽕이다!!"

두다다다다다!

호국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플랭크(Plank) 운동을 하는 자세로 양팔꿈치를 동시에 내려찍었다.

흔히 레슬링 선수들이 다운된 상대의 복부나 가슴팍에 팔꿈치를 내리꽂는 엘보 드롭(Elbow drop)의 개량 버전이었다.

전신의 체중으로 내리꽂는 만큼 위력이 상당해서,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내장 파열이나 갈비뼈 골절은 우스울 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구학!!"

호국의 필살 더블 엘보 드롭에 당한 루돌프가 몸을 'ㅅ'자로 꺾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신입도 따라해보고 싶었는지, 주먹을 내지른 루돌프의 팔을 가볍게 꺾은 뒤 지면에 내리꽂고 똑같은 기술을 시전했다.

콰앙! 콰앙! 호국과 신입이 한 놈씩 맡아 놈들을 짓뭉개버리자, 복도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열심히 전기 드릴을 관리하고 있던 기술직 루돌프 한 놈뿐.

놈은 문이 열리자마자 선물을 넣을 생각인 듯 했다. 그 증거로 잘 포장된 선물 박스 하나가 놈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개인적으로 거대 바퀴벌레에게 어떤 선물을 골라주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보다도 호국은 6-55의 은폐실 문이 개방될 것을 우려했다.

'저건 판도라의 상자야. 절대로 열려선 안 돼.'

경비팀 79기가 재빨리 접근해 전기 드릴을 망가뜨리려는 순간, 그보다 먼저 6-55의 은폐실 잠금 장치가 박살나면서 문이 개방되었다.

얼떨결에 모두가 6-55의 방안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들은 살아생전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호국의 '눈'이 멋대로 시각을 차단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국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저주스러운 기억력이 이미 그 '광경'을 뇌내에 저장해버린 것이다.

"미친...산타걸 복장을 입은 거대 바퀴벌레라니......!"

그 순간 만큼은 낙천적인 호국도 자살이 마려웠다.

-------

< 경비 업무 일지 : 재단을 위한 산타는 없다(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