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83화 (183/209)

< 경비 업무 일지 : 재단을 위한 산타는 없다(2) >

호국은 의자에 앉아 오랜만에 '생각' 이란 것을 해보았다.

자신의 일천한 지식 수준이나 괴상하게 뒤틀린 사고방식으로 생각이란 걸 해봐야 뭘 하겠느냐마는. 어쨌든 생각이란 걸 해보았다.

흔히 엘리트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으로 수첩을 펼쳐두고, 손가락으로 볼펜을 흔들면서 폼도 잡았다.

"정말로 산타는 존재할까?"

이두근은 호국에게 TF의 보안망을 하찮게 여기는 괘씸한 산타를 잡으라고 했지만, 호국은 먼저 산타의 존재성 자체를 의심했다.

온갖 기이하고 괴상한 ES의 존재는 철썩 같이 믿으면서, 정작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VR 기기 선물 받고 싶다고 매년 크리스마스 전날마다 선물 쪽지에 써놨는데, VR 기기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

23년 인생 중 호국이 크리스마스에 직접 소원을 빌었던 햇수는 자그마치 15년이다. 무려 15번이라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VR 기기를 선물 받은 적은 없었다.

활동적인 호국에게 어울리는 운동화, 호국이 좋아하는 구시대 게임기, 그밖에도 옷이나 자잘한 전자기기는 받은 적이 있지만, 유독 VR 기기만 받지 못 했다.

호국은 수첩에 선을 직직 그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소원을 빈다면 16번째다. 당연히 VR 기기를 소원으로 빌 생각이지만, 산타가 정말 그걸 가져다 줄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산타는 날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가상 현실에 접속도 못하는 병신! 하하!

이런식으로 비웃으면서 루돌프의 말랑말랑한 빨간 코를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국도 루돌프의 빨간코가 만지고 싶었다.

"아니, 삼천포로 빠지지 말자. 산타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산타가 지금껏 내게 일부러 VR 기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 놈은 더이상 산타가 아니야."

불쌍한 김호국을 자그마치 15년이나 놀려먹은 천하의 호로 새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호국은 수첩의 마지막에 '산타 포획' 이라고 썼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동심을 15년이나 무참히 짓밟고, 저 혼자만 치사하게 루돌프의 빨간코를 만져댔다. 이제 그 응보를 받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호국은 원탁에 나란히 둘러앉은 믿음직한 동료들에게 말했다.

호국에게 밀짚 모자를 압수당하고, 대신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있는 농사왕.

머리에 사슴 녹용인지 뭔지를 장식품처럼 달고 반짝거리는 알전구를 달아놓은 신입.

마지막으로 루돌프처럼 빨간 코를 달고 있는, 이전보다 한층 더 개다운 외관을 지니게 된 해피.

호국은 보들보들한 살덩어리를 가지게 된 해피의 턱을 문지르면서 자신의 위대한 계획을 공개했다.

"아직 산타가 침투했다는 보고는 받지 못 했으니까, 녀석은 지금쯤 침투 계획을 짜고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서 몰래 선물을 넣어두고 사라지겠지. 그러니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건 감시체계라고 생각해."

감시 체계.

프롯의 힘을 빌려 시설 내의 모든 CCTV와 동작감지 시스템, 열감시장비로 24시간 감시 체제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국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TF 역사상 벌써 몇번이나 시설에 침투했다가 사라졌다는 산타가 그정도도 예측하지 못 했을까?

분명 산타만의 침투, 회피, 은폐 방식이 존재할 터. 따라서 호국은 기계를 활용한 감시 체제가 뚫릴 것에 대비해 인력 감시 체계도 추가하기로 했다.

"오늘부터 경비팀 79기는 쉬지 않는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음에도 신입과 신입 2호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해피는 매일 산책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진짜 같은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그리고 플라스틱 군대에게도 전해. 빨간 옷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다니는 노친네가 시설 내부에서 어슬렁거린다면 즉시 포획하라고. 아, 가능하면 루돌프도 잡아줬으면 좋겠어."

호국은 빨간코를 만지고 싶었다. 해피의 코에 부착된 인공 빨간코가 아닌, 진짜배기 순도 100% 빨간코를.

"상대가 격렬히 저항한다고 해도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포획해야 해. 그 놈은 내 15년을 무참히 짓밟고! 날 농락한 죄가 있으니까! 내가 그 놈을 직접 고문할 거야."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고문할 생각입니까?

경비팀 79기의 실질적 두뇌인 프롯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모든 연구원들이 연말을 조용히 보내기 위해 휴식기에 들어간 지금, AI인 프롯도 내심 자신이 '심심하다' 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니 이 정신병자행 버스에 기꺼이 탑승하기로 했다.

"산타의 보편적인 행색은 다음과 같아. 주름진 늙은이에, 푸짐한 인상, 덥수룩한 흰 수염, 그리고 짜리몽당한 신체구조. 이것만 보면 어떻게 고문해야 할지 답이 나오잖아?"

-구체적으로는?

"우선 놈의 주름을 다리미로 다림질해서 하나하나 펴줄거야."

-......

"그리고 수염을 한가닥씩 정성스럽게 뽑아주겠어. ...이건 너무 나갔나?"

-너무 나갔습니다.

"그래, 그럼 수염 대신 코털을 뽑자. 산타는 수염이 너무 많으니까. 한가닥씩 뽑다간 올해 안에 못 끝낼걸."

-그정도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연구 목적으로 제공된 화학약품을 배합해서 자백제와 신경통증제를 제조하겠습니다.

"자백제는 알겠는데 신경통증제는 뭐야?"

-신경계를 비정상적으로 자극해서 실제로는 타격을 주지 않았음에도 고통을 느끼게 하는 약물입니다. 약효가 끝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극제의 일종입니다. 명칭은 제가 임시로 지었습니다.

"훌륭해. 그럼 이제 이번 작전에 걸맞는 장비를 지급해줘."

-통상 업무에 사용되는 1번 장비 세팅은 이번 작전에서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 2번 세팅은 대인 전투에 특화되어 있으나 기동력의 저하를 불러옵니다. 따라서 3번 세팅을 추천합니다.

프롯은 호국의 전투 스타일에 맞춰 다양한 무기와 장비로 프리셋을 구성해두었다. 그 구성은 각기 다른 특성과 조합으로 10개의 세팅이 존재했다.

덧붙여서 3번 세팅은 전술적 대응(tactical response)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다.

경비팀 79기의 숙소 회의실 천장이 열리면서 거대한 기계 팔이 3번 보급 상자를 내려주었다.

-일단 대략적인 구성은 갖춰둔 상태지만, 세세한 부분은 직접 맞추셔야 합니다. 오더를 내려주십시오.

"빠른 움직임."

-그렇다면 자신있게 글록-19Auto를 추천합니다.

기계팔이 집어준 글록 권총을 받아든 호국은 슬라이드를 당겨보거나, 탄창을 꺼내서 직접 살펴보는 등 세밀하게 권총을 분석했다.

찰칵, 찰칵. 마치 연필로 사람 셋을 죽인 한 남자처럼 총기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방아쇠를 당겨서 손가락에 얼마나 힘을 줘야 하는지도 파악을 끝냈다.

"가볍고, 전자동과 반자동 교체 가능, 관통력은 어때?"

-산타의 두꺼운 뱃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꼭 관통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작열탄을 추천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효과가 있는데?"

-기존의 9mm 파라블럼 탄환과는 달리 탄환이 폭발하면서 주변에 금속파편을 흩뿌립니다. 상대의 발밑을 맞춰도 상대의 발목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는 겁니다.

"나쁘지 않은데. 그것도 좀 챙겨줘."

파괴력 목적인 9mm 충격회전탄 탄창 4개와 작열탄 탄창 2개가 호국의 탄약 벨트에 채워졌다.

다음 상품으로 나온 것은 호국의 손에 딱 맞는 30cm 길이의 군용 단검이었다.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길쭉한 칼날이 인상적이었는데, 무시무시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발리스틱 나이프입니다. 손잡이 끝의 버튼을 누르면 칼날이 발포되며, 최대 10m 거리 내의 적에게 확실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또한 칼날이 비교적 얇으면서도 날카로워 산타의 살점으로 회를 뜨는 것이 가능합니다.

"산타가 이걸 보면 좋아 죽겠어."

칼을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호국은 저글링을 하는 것 처럼 휘리릭 돌려보더니, 허리춤의 칼집에 끼워넣었다.

-이제 주무장을 몇 개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강력한 한 방으로 산타의 비대한 몸뚱아리를 볼품없는 육편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더블배럴 샷건은 어떠십니까?

현대의 발전된 총기에 비하면 지금까지 추천받은 것들은 하나같이 구식 총기에 해당했지만, 오히려 구식 총기이기에 시설을 박살낼 위험이 적었다.

펄스 라이플이나 유탄 발사기 같은 걸 미친듯이 쏴댔다간, 그야말로 산타 잡으려다 초갓집 태워먹는 꼴이다.

하지만 호국은 샷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묵직한 반동, 차진 총성, 강력한 한 방은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게 맞다.

다만 전술적 상황에서 샷건은 큰 빛을 보지 못 한다. 유효 사거리가 너무 짧고, 재장전이 귀찮으며, 산탄 쉘을 생각보다 많이 들고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샷건은 됐어. 그보다 기관단총은 어때?"

-기관단총계의 명품으로 유명한 MP5-k(단축형), 기동력과 화력 모두 살린 MP7-mag(확장탄창형), 상대에게 자비를 주지 않는 Uzi-X2. 좋아하는 것을 골라주십시오.

호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Uzi-X2를 골랐다. 한 손에 하나씩 쥘 수 있는 2개의 Uzi 기관단총이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양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미친놈처럼 총알을 퍼부을 수 있는 모델이다. 게다가 경량화를 끝낸 주제에 확장 탄창을 장착해서 무려 80발을 먹여줄 수 있었다.

"예전부터 이걸 해보고 싶었어."

한때 카우보이 덕분에 붐이 일어났던 쌍권총 유행이, 호국의 세대에선 쌍기관단총 유행으로 거듭났다. 비록 그 세대가 VR 세대는 아닐지라도.

-마지막으로 전술 장비를 고를 차례입니다. 제가 접근 가능한 TF의 모든 데이터베이스 속에서도 산타의 무장에 대한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단순하면서도 메이저한 세팅을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프롯이 추천해준 전술 장비 세트는 섬광탄 2개와 연막탄 1개, 수류탄 1개와 방탄복이 전부였다.

"이걸로는 2% 부족한 것 같은데...만약 산타가 작정하고 화력을 전개하면 어떡하지?"

-가드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산타는 단 하루만에 지구를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게끔 선물을 두고 가는 초인입니다. 혹은 광속에 준하는 속도의 썰매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 놈이 이런 상황에 대응하지 못 할리가 없잖아. 분명 막대 사탕 지팡이로 위장한 레이저 총을 사용한다거나, 선물 주머니에서 변신 슈트라도 꺼내 입을 게 뻔해."

-아니면 분당 1만발 이상 퍼붓는 기관총을 꺼낼 수도 있습니다. 일단 TF의 시설 내구도는 경이로운 수준입니다만, 그정도의 화력을 지속적으로 버티는 것은 힘들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니 전술 장비에 변화를 좀 줘야겠어. 우선 투척물은 전부 유탄으로 바꾸자. 산타의 운동 신경도 고려해야지."

-가드가 던진 투척물을 산타가 되받아던질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이해했습니다. 산타의 전투력 예측 계산을 전면 재수정합니다.

"그리고 이런 레벨 3 수준의 방탄복으로는 치명상을 피하기 힘들어. 경량 방탄갑이 필요해."

-기동타격대에서 사용하는 모델을 말한다면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케블라 방탄복 대신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반신에 걸치듯이 착용할 수 있는 경량 흉갑이었다.

티타늄에 특수 합금을 섞어서 고열, 고강도의 충격에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거기에 일회용 세라믹 판을 추가로 덧대서 폭발에 의한 파편도 방어할 수 있게 했다.

-해피에게는 2번 무장을 업로드 하겠습니다.

호국이 경량 흉갑을 착용하고 있을 즈음, 프롯은 해피의 체내에 감춰진 무장을 살짝 손봤다.

그러자 해피의 등 뒤에서 회전식총열 기관총과 실시간 동작감지기가 튀어나왔다. 추적, 말살에 특화된 터미네이터풍 무장이었다.

-신입 2호에게는 너무 위험한 관계로 지금껏 전용 무장(곡괭이, 낫)을 압수해두었습니다만, 지급을 허가하시겠습니까?

"팀 단위로 움직이는 건데 당연히 돌려줘야지. 하지만 밀짚모자는 안 돼."

호국은 신입 2호의 버릇이 형편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밀짚모자는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만약 지난번처럼 반항을 한다면 녀석이 보는 앞에서 밀짚모자를 똥통에 빠드릴 생각이었다.

-신입은 표준 무장을 제공해도 상관없겠습니까?

"쟤는 아무것도 안 줘도 알아서 잘 하잖아. 그래도 원하는 게 있으면 거기에 맞춰줘."

그 말에 신입은 뛸듯이 기뻐하며 호국과 같은 무장 세트를 골랐다.

산타 포획(말살) 작전 준비가 끝난 경비팀 79기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를 자랑했다.

"자, 그럼 시설 주민들한테 작전 협조를 요청하러 가자."

가장 먼저 그들이 향한 곳은 시설 내의 ES들이 곧잘 모이는 카지노였다.

-------

< 경비 업무 일지 : 재단을 위한 산타는 없다(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