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세일럼 마피아 게임(4) >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모두가 Yes를 외칠때 한 번쯤은 No를 외치는 게 남자라고.'
그래서 호국은 모두가 마을 중앙 광장으로 몰려가는 틈을 타, 어젯밤에 미처 털지 못 했던 자칭 퇴역군인의 집으로 숨어들어갔다.
어제 막 사람들이 찾아와 살기 시작한 이 세일럼 빌리지는 마치 예전에도 누군가 살았던 것처럼 대부분의 생필품이 갖춰져 있었다.
집은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 같지만,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있었으며 정원이나 밭도 잘 가꿔진 상태였다. 이제 막 이틀째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오, 총."
모두가 마을 광장에서 북치고 장구치는 사이, 호국은 퇴역군인의 집을 뒤져 기어코 장총 한 자루를 찾아냈다. 서부개척시대에서 흔히 사용하던 장총으로, 윈체스터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보통 퇴역군인이 머무르는 집은 언제든지 총을 뽑아들거나, 반대로 장식해둘 요량으로 잘 보이는 장소에 총을 놔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 장총이 발견된 장소는 부엌 아래의 작은 보관고였다.
"무기 관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만."
장총 총구 끝에 남아있는 화약흔이나, 그 주변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는 전용 탄환들이 호국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무기는 자신의 애인과도 같은 것인데, 이렇게 먼지 가득한 지하 보관고에 총을 아무렇게나 처박아두는 건 군필자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백 번 양보해서 보관해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 창고에 던져뒀다고 치자, 진짜 문제는 무기 관리마저 소흘히 했다는 점이다.
사용한지 얼마 안 됐는지 총구 끝에 그대로 묻어있는 화약흔은 계속 내버려두면 나중에 큰일이 난다.
게다가 나무로 만들어진 개머리판도 살짝이지만 균열이 있었고, 탄약도 제대로 분류해두지 않고 마구 가져다 쓴 것 같았다.
만약 이 총의 주인이 호국의 군 후임이었다면 함께 연병장 50바퀴를 돌면서 설교를 퍼부어줬을 것이다.
"불쌍하니까 이제부터라도 내가 잘 관리해줘야지."
가죽 주머니에 총과 탄약을 챙겨넣으려는 순간, 호국의 머릿속에서 또 다시 어젯밤과 같은 경고가 울려퍼졌다.
-현재 습득하려는 '윈체스터 라이플'은 다른 직업의 소유물입니다.
-당신의 직업은 '동네바보' 입니다.
-동네바보는 총기와 탄약, 폭약 일체를 습득,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유물의 소유권이 양도되지 않았습니다. 즉시 무기를 내려놓으십시오.
"하지만 이 불쌍한 총을 여기에 내버려두면 내 양심이 찔리잖아!"
호국에겐 빈집을 털어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보다, 이 먼지투성이 보관고에 총을 처박아두고 모른척 하는 게 더 큰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왔다.
결국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국은 기어이 가죽 주머니 속에 윈체스터 장총과 전용 탄약을 챙겨넣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호국도 불쌍한 유기견을 구출하는 동물보호단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불쌍한 총을 여기에 처박아 둘수는 없어.'
차라리 멋들어지게 벽에 장식되어 있었고, 관리 상태도 훌륭했다면 호국도 입맛을 다시며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 자신을 퇴역군인이라 자칭했던 괘씸한 양반은 제 애인에게 사랑을 주기는커녕 홀대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것은 합법적인 NTR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빈집털이를 끝내는 김에 호국은 집안에서 돈될 만한 것, 음식 같은 것을 싹 쓸어서 나왔다. 그 괘씸한 양반이 정말 시민 측 진영이라고 해도 곱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윈체스터 장총을 구출(?)한 호국은 그밖에도 여러 집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미처 밤 사이에 알아내지 못 했던 것들을 조사했다.
조사라고 해봐야 행보관에게 배운 기술을 이용해서 누군가의 집에 몇 명이 침투해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는 게 전부였지만.
"여긴 싹 쓸렸네."
다이너마이트 폭발과 함께 집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곳은 매케한 연기와 타고 남은 잿더미로 가득했다.
정신병자의 집에 방문했던 마부는 정신병자와 함께 나란히 폭사. 그의 소유물이었던 마차와 두 마리의 말은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마부와 정신병자가 함께 죽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저 말과 마차도 내버려두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국은 곧 마을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주운 놈이 임자라는 걸 모르다니!'
누구도 보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한 호국은 말들에게 대충 훔쳐온 당근을 나눠주고,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하게끔 살살 구슬렸다.
본래 마피아 게임의 법칙에 따르면 호국은 이 말들을 건드려선 안 된다. 마부가 사망한 것이 공식화된 이상, 다른 누군가가 마부를 대체한다는 게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직업도 까발려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피아 게임에서 사망한 타인의 직업을 그대로 계승하는 건 도굴꾼이라는 중립 직업이다.
필요에 따라 다른 직업의 시체를 뒤져서 그 사람의 직업을 계승하고, 중립에서 해당 직업이 소속된 성향으로 갈아타는 게 가능한 게임 메이커 중 한 명이다.
물론 호국은 그런 자잘한 이유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놈들이라면 날 좀 더 편하게 만들어주겠지.'
그 폭발에서도 게임의 특성 때문인지 마차와 말들은 멀쩡했는데, 이걸 잘만 이용하면 호국은 마을 어디든 편히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대자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호국의 직업 특성상 밤낮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니, 마피아가 노리는 목표를 이동시켜버리거나, 반대로 마피아를 이동시켜서 골탕을 먹이는 것도 괜찮았다.
일반적인 마피아 게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역대급 트롤링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지만, 호국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게임은 원래 재미있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 빡치라고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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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이번' 게임은 뭔가 잘못 됐어요!!"
"맞아요! 버그라고요! 버그가 있었어요!!"
"닥쳐라 이 사이비 광신도 새끼들아!"
처형대에 나란히 올라선 두 남녀는 처형을 진행하는 시민 측 직업인 '처형자'에 의해 채찍질을 당했다.
첫 처형자 투표가 진행되면 자동적으로 직업이 밝혀지는 직업 중 하나인데, 처형자는 투표를 받아 처형된 인물들이 마피아, 사이비 광신도, 살인마일 경우 두당 처형 포인트를 1점씩 획득한다.
반대로 투표를 받아 처형된 인물이 시민 측이거나, 중립일 경우 처형 포인트가 1점씩 감소한다.
그렇다면 그 처형 포인트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밤에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이나, 혹은 자신이 지목한 대상을 즉시 처형해버릴 수 있는 '즉결처형' 스킬 사용에 필요한 포인트였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모종의 사건으로 확실하게 사이비 광신도임이 밝혀진 두 남녀가 처형대에 오르자, 처형자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둘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대체 어떤 원리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간밤에 둘의 직업이 모두에게 공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형자는 그저 공짜 처형 포인트를 벌어서 이득이라고만 생각했다.
처형 포인트 2점이면 즉결처형 스킬을 1회 사용할 수 있다.
처형 포인트가 -4점 아래로 떨어지면 반대로 자신이 처형을 당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직업이지만, 첫 시작부터 2점을 얻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들의 최후 변론 기회는 이미 끝났다. 얌전히 내 포인트가 되어달라고."
"자, 잠깐! 이건 정말 잘못된......!"
"기다려......!"
덜컹! 덜컹!
차례대로 두 남녀가 선 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올가미가 그들의 경추를 사정없이 부러뜨렸다.
곧 두 사람이 사망하자 모두의 머릿속에 나레이션이 울려퍼졌다.
-사이비 교단 사제와 견습사제가 처형 당했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시민이건 마피아건,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이나 살인마도 너나할 것 없이 다함께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만인의 적인 사이비 광신도가 첫 투표 처형으로 인해 한꺼번에 둘이나 죽었으니 시민이라면 다들 기뻐하는 게 정상이었다.
첫 투표부터 분위기가 좋게 흘러갔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둘씩 앞으로 나섰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백주대낮이며, 처형 투표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다들 그 사이에 각자 쥐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상대 진영에 추가 피해를 입힐 생각으로 가득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특정 무리들 중 몇 명인가 튀어나와 도떼기시장마냥 외쳤다.
"직보!(직업 보안관)"
"직보!"
"늦직(늦은 직업 공개)이다!"
"대립각이 섰네요."
"일단 둘의 의견부터 들어봅시다."
보안관이나 마피아는 몇명이나 존재한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전문직업끼리는 서로 연락 수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편끼리 충돌할 일이 없다. 즉 둘 중 한 명은 보안관이 아닌 다른 직업이라는 것.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같은 직업 공개로 대립각을 세운 두 청년들에게 몰려들었다.
진짜 보안관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일반 시민이나 다른 직업군은 긴장했으며, 적극적으로 시민 행세를 해야 하는 타 진영 측 또한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첫째 밤이 지난 후, 둘째 낮부터 곧바로 터진 같은 직업 대립은 대개 '선'을 점한 쪽이 이긴다. 아니면 모두의 물타기에 의해 둘다 처형 당하거나.
먼저 직보를 외친 사람이 누군가의 집을 수색했고, 그는 마피아가 아니었다고 말하든, 늦직을 외친 사람이 아무나 집어 마피아였다고 말하든 크게 관계없다.
처형해서 직업을 밝혀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타면, 일단 둘다 달아보자는 게 군중심리로 작용하는 법이니까.
물론 합리적으로 늦직부터 처형시킨 다음, 그가 정말 보안관이었다면 먼저 보안관을 외쳤던 사람을 다음 처형 대상으로 예약해두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피와 광기에 절여진 마녀사냥이란 건 으레 그러하듯 예약같은 건 없다. 오직 다이렉트뿐.
"둘다 달아!"
"맞아! 둘다 달아보면 돼!"
시민 입장에서도, 다른 진영 입장에서도 둘 모두 갈아마실 수 있다면 공평하게 주고받는 셈이니 다들 물타기를 시전했다.
"그럼 둘다 달아봅시다."
이미 2점의 처형 포인트를 획득한 처형자는 둘 모두를 달아도 점수가 변동 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는지, 양측 모두 격렬하게 반발했다.
"저는 선직(선제 직업 공개)을 외쳤는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달려면 우선 늦직부터 달아야지요! 그 뒤에 저를 달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웃기는 소리! 은근슬쩍 자기만 빠져나가서 밤이 오면 한 명 더 잡아죽이려고 그러는 거지? 내 처형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처형대에 오르겠다! 물론 너도 함께!!"
"개소리 집어쳐! 언제부터 늦직에게 발언권이 있었지?!"
"쫄리나? 쫄리면 뒈지시든가!"
결국 서로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좋지 않은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분위기가 격앙되면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흐려지고, 처형 투표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결국 둘의 진짜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이들은 없었기에, 은연중에 거주민들 사이에선 일단 하룻밤 더 넘겨보고 내일 얻게될 새로운 정보로 판가름을 내리자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밤중에 두 사람중 누군가가 죽으면 정체가 밝혀질 것이고, 죽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조사해줄테니 결국 정체가 밝혀질 터. 그 과정에서 추가로 고발되는 사람들이 발생하겠지만 그건 내일의 일이었다.
"정 뭣하면 처형 투표는 이만 폐정하겠습니다."
결국 두 보안관을 처형하지 않는 선에서 2일째 낮의 처형 투표가 완전히 끝나버렸다.
다시 각자의 거주지로 돌아가게 된 자들이 곧 마주한 광경은, 누군가에 의해 싹 털린 자신들의 집과 어느새 사라진 마부의 마차였다.
-동네바보의 가죽 주머니 한계 용량을 초과했습니다.
-동네 바보는 마차를 운용할 수 없습니다.
"물건은 마차에 실으면 돼. 그리고 내가 마차를 타는 게 아니라, 말이 끌어주는 것 뿐이야."
동네바보가 마차 도둑으로 전직한 것을 거주민들 중 누구도 알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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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세일럼 마피아 게임(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