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77화 (177/209)

< 경비 업무 일지 : 세일럼 마피아 게임(3) >

"다들 눈빛이 장난아닌데?"

싱글 플레이 게임에서 마주치는 NPC와 사람이 직접 캐릭터(아바타)를 조종하는 멀티 플레이 게임은 역시 분위기부터 달랐다.

세일럼 빌리지에 도착한 호국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하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본적으로 마피아 게임은 일부 직업을 제외하면 모두 시민인 '척' 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세력이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시민에게 들러붙은 중립이고.

시민, 시민측 조력자, 그리고 시민에 들러붙은 기생충 중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차례차례 의심을 받고, 이내 처형대에 오른다.

이따금 트롤링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이나 세력을 속이면서 처형을 유도하는 정신나간 놈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 세일럼 빌리지에 그런 트롤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동, 서양인. 온갖 인간군상들이 세일럼 빌리지라는 무대에 모여 있으니 상당히 기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의 인상착의에 신경쓰기보단,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령 주부로 보이는 아낙네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농부는 집 앞의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스러운 시민 역할을 연기했다.

그밖에도 해맑게 웃으며 또래 아이 캐릭터와 우르르 몰려다니는 유저들이나, 총을 허리에 차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들까지.

물론 호국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동네바보를 연기하기 위해 축 늘어진 가죽 주머니를 한 손에 쥐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이따금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열띤 연기를 펼쳐도 주변 사람들이 믿어줄지 말지는 미지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라도 다른 직업인 척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마피아가 아무것도 아닌 가죽 주머니를 들고 다니며 동네 바보 노릇을 할 수도 있다. 동네 바보를 연기하는 건 너무 쉬우니까. 게다가 고유 능력조차 조작이 쉬운 '랜덤 정보 수집'이다.

마피아 게임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곧잘 사용되는 직업은 경찰(보안관)이지만, 의외로 그런 쪽은 강하게 의심을 받는다. 시민 측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피아의 진짜 고수들은 의심을 덜 받으면서도 당장 처형 가능성이 적은 중립 연기도 꽤 하는 편이다.

호국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상가를 흐느적흐느적 걸어다니며 길가의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그리고 동네바보가 보기에 왠지 진귀해보이는 것들을 주머니에 쓸어담았다.

깨진 유리병이나 화려한 색상의 상품 포장지, 낡고 헤진 밧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골목길과 대로변을 자유롭게 거닐면서 호국은 최소 서넛 이상 모여있는 집단들을 찾아나섰다.

1일째에 알아낼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정보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은 이 게임에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울타리 너머의 수풀 속에 몸을 감춘 호국은 남몰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집단을 감청했다.

"이 총 보이시죠? 전 보안관입니다."

"저는 상인 조합원이예요."

"난 퇴역군인이요. 그리고 여기가 우리 집이지."

허리에 리볼버 권총을 차고 있는 껄렁해보이는 남자 한 명, 말끔한 옷차림에 표독스러운 인상을 지닌 여성, 그리고 둘보다 조금 더 늙었으면서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중년 남성이 각자의 직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저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고작 1일째에 강력한 시민 동맹 3인방이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호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대화를 허투로 넘기지 않았다.

'저 총은 쓸만해보이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뺏자. 저 양반도 집에 총이 있을테니 밤이 되면 훔치고, 저 여자는 돈이 많을 것 같으니 훔치자.'

호국은 저들이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여 상대를 기만하든, 아니면 진심으로 서로의 목숨을 지키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동맹을 만들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칭 보안관이 허리에 차고 있는 총, 여상인이 허리에 차고 있는 돈이 두둑해보일 것 같은 주머니, 그리고 퇴역군인의 집이 더 신경쓰였다.

게임의 특성상 낮에는 마피아든 살인마든 처형 외에는 절대로 타인에게 해를 가할 수 없기 때문에, 호국은 어서 밤이 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자칭 시민 3인방이 흩어지고, 머지않아 밤이 찾아왔다.

어떠한 처형도, 의심을 자아내는 소문도 없이 1일째의 낮이 소모된 것이다.

-밤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존자들은 '활동' 해주십시오.

밤의 어둠과 사회자의 진행 멘트가 머릿속으로 직접 찾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활기와 시끌벅적함으로 가득했던 세일럼 빌리지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으며, 일부 가정집에서 현관에 내걸어놓은 등불을 제외하면 그 어떤 불빛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부분은 엄청 게임 같네.'

실제로 가상 현실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 없는 호국은 주변 환경이 휙휙 바뀌는 모습에 살짝 긴장했다.

현실과 달리 게임 속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스템에 의한 강제적인 제약을 받거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첫 게임을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내버리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호국은 거북이처럼 바짝 엎드려 어둠 속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동네바보는 특정 거주지가 없는 '노숙자' 컨셉이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거주지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저 밤이 되면 중립 직업의 특성상 시민, 마피아, 사이비 교단 모두의 시야에 들어오게 될 뿐.

특히 시민과 마피아 입장에서 중립 직업이란 상황에 따라 빛 좋은 개살구일수도 있고, 이를 갈게 만드는 암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즉 그들은 중립 직업을 처형하거나 살해하는 것보다도, 당장 상대 진영의 정체를 파악하거나 살해하는 것에 더 급할 게 뻔했다.

'저기 한 명 움직이고 있네.'

밤눈이 좋은 호국은 한 주택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어두운 밤의 거리를 예의주시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이 포착된 인물은 자신의 집에서 스리슬쩍 빠져나와 이웃집을 살펴보는 남자였다. 게임의 특성상 호국의 밤눈이 좋아도 그곳에 인간이 있다, 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검은색 전신 쫄쫄이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정확히 어떤 직업을 지녔는지, 인상착의가 어떤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그때였다.

타캉! 타캉!

'총성!'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총성에 호국은 자세를 더욱 낮췄다.

마피아에서 살해 능력을 지닌 직업은 1인당 1명만 살해할 수 있지만, 이제 막 첫 총성이 울려퍼졌으니 다음 살해 대상이 호국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가능하면 마피아들이 자신 말고 다른 놈들이나 족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호국은 주머니를 뒤져 천으로 감싼 깨진 유리병을 꺼냈다.

낮에 미리 유리병을 깨서 조각으로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이것은 거주지가 없는 동네바보의 몇 안 되는 호신용품이었다.

여차하면 상대에게 유리 조각을 죄다 던져버리고 도망칠 심산이었다. 특이하게 사실적인 게임이라 상대가 총을 맞추지 못하면 살해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밤에는 상대의 인상착의를 확인할 수도 없어. 내가 중립 직업이라는 걸 알아도, 정체를 모른다면 처형도 피해갈 수 있다.'

시민들에게 투표권은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에 초반부터 중립 직업이 밝혀져도 건들지는 않을 터. 호국은 지붕 위에서 총성과 비명이 멎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콰앙!

'이번엔 폭음인데?'

저 멀리서 치솟는 폭염을 확인한 호국은 폭탄을 지닌 누군가가 자신의 거주지에 침입한 불청객과 자폭했을 가능성을 염두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매불망 자신의 개똥같은 고유 능력이 발동되길 기다리던 호국에게 드디어 시스템의 계시가 내려왔다.

-1일째 기록 : 정신병자는 자신의 집에 보관해둔 암석 폭파용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밤을 새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민 측 마부가 그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데리러 왔고, 자폭했습니다.

-1일째 기록 : 술집 여인이 시민 측 정보상을 유혹했습니다. 시민 측 정보상은 다음 낮에 투표권과 발언권이 봉인됩니다. 또한 유혹당한 당일 밤에 '정보 수집' 능력을 발동할 수 없습니다.

"시민 꼬라지 잘 돌아간다."

랜덤하게 주어진 정보 2개를 확인한 호국은 1일째부터 기선제압을 당한 시민 진영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마부는 지정한 대상을 지정한 위치로 이동시켜서 그 사람의 거주지에 침입하는 적대 진영의 공격을 회피하게끔 하는 것이 주된 능력인 듯 했다. 문제는 하필 방문시기와 방문지가 기가막히게도 똥같았다는 것이다.

호국과 같은 중립 직업인 정신병자가 첫날부터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기다렸으며, 그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던 마부와 함께 폭사하고 말았다. 시민을 지켜줄 수 있는 방어 직업 하나가 어처구니없게 사망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정보상은 또 어떤가? 첫날부터 터진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이 봉인되면서 다음날까지 틀니와 투표권을 압수당하게 된다.

게다가 총성도 꽤 울려퍼졌으니, 중립 직업이나 시민 측에서 죽어나간 사람도 적지 않을 게 뻔했다. 그야말로 총체적난국인 상황.

호국은 한숨을 쉬며 지붕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슬슬 각 진영의 '활동'이 끝나고 다시 낮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면에 착지하기가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호국의 앞에 선 인영이 둘이나 있었다.

남자 목소리를 지닌 쪽이 먼저 호국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도를 아십니까?"

-사이비 교단 신도에게 포교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중립 직업이며, 성향은 혼돈입니다.

-사이비 교단의 성향은 혼돈입니다.

-포교를 받아들이......

"아뇨, 도는 모르겠는데요."

"...예?"

"도가 뭔데요? 도레미파솔라시도 할때 그 도는 아닐 것 같은데."

"어, 그러니까...음?"

상대는 호국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사람이 자기는 도를 알고 있다는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냥 이해를 못 한 것 아닐까요?"

"아니, 이해를 못 하고 자시고 왜 포교가......"

-포교를 받아들이.....

"저 이제 가봐도 되나요? 오줌 마려운데."

"잠깐만요. 이거 뭔가 이상한데? 왜 포교가 안 되는 거야?"

여자 목소리로 말하는 파트너도 금시초문인지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포교를 하는 순간 직업도 밝혀져야 하는데, 직업도 안 보여."

"버그인걸까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반복 했...아니. 됐다."

두 사람이 호국에게서 뒷걸음질쳐 되돌아가려는 순간, 호국은 두 사람과 적당한 거리가 벌어지자 손에 쥐고 있던 보따리를 던졌다.

천에 감싸여있던 유리조각들이 두 사람에게 흩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전신 쫄쫄이 같았던 두 사람의 형상이 올바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이비 교단 광신도 사제와 견습 사제의 정체가 공개되었습니다!

-오류 발생!

-포교를 받아들이십시오.

"어림도 없지."

호국은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하고 당황하는 두 사람에게서 재빨리 벗어났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누군가의 신음과 비명 소리 가득한 세일럼 빌리지에서의 첫날 밤은 밑도 끝도 없는 도주극을 벌이는 와중에 끝나버렸다.

-2일째 낮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존자들은 정보 공유 및 토론과 처형 투표를 진행해주십시오. 제한시간내에 처형 투표가 진행되지 않으면 다음 날이 되기 전까지 더이상 처형 투표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칠흑같던 어둠이 물러가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던 지옥같은 공포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맑고 푸른 하늘과 중천에 뜬 태양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괴된 집이나, 거리에 널부러진 시체, 집안에서 사살당한 누군가의 변고만 빼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즐거운 세일럼 빌리지도 돌아온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중앙 광장으로 모여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해피해피한 마녀 사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경비 업무 일지 : 세일럼 마피아 게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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