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충격과 공포 작전(2) >
방법을 찾아낸 뒤부터는 일처리가 빠르게 진행됐다.
한국인이 컵라면이 익기까지의 3분을 기다리지 못 하는 것 처럼, 젓가락과 김치까지 준비된 상황에서 2분 30초만에 라면을 퍼먹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당장 내게서 떨어져! 떨어지라고!!"
"좋은 말씀 전하러 나왔습니다."
호국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털어서-TF 앞으로 외상을 달아서-손수 민트초코 풀 패키지 팩과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니며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형제님의 집안에 혹시 아주 나쁜 일이 있지 않나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자기 못 생겨진 것 같고, 평생 섹스라는 단어밖에 말할 수 없게 되는 저주에 걸렸다던가, 상태창을 외치면 스테이터스가 보인다던가 하는 일이요."
"그딴 일이 일어날리가 없잖아! 그것보다 당장 그거 치워!!"
"형제님이 뭘 잘 모르시나본데, 이게 아주 끝내주는 겁니다. 일단 한 입 먹어보면 우주 최초의 빅뱅이 잘못한 건지, 아니면 하나님이 시작부터 잘못한 건지 모를 죄악감을 느낄 수 있어요."
"그딴 걸 느껴서 어쩌라고?! 아니, 입에 넣지 마그으르으으으......!"
호국은 직접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민트초코라는 신성한 교본(?)으로 가르침을 내리며, 정기적으로 아파트에 찾아와 문을 두들겨대는 아줌마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능숙한 말솜씨와 친근한 태도,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혼란을 줘서 교화시킨다는 건 썩 괜찮았다.
"아이고, 형제님. 우주 규모의 죄악감을 버티지 못 하시고 이렇게 망가지시다니...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순식간에 개코로 바뀐 신입이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지목할 때마다 호국이 찾아가 '가르침'을 준뒤, 끔찍하게 변한 그들을 아이스박스에 긁어 모았다. 젤리와 비슷한 상태라 대형 아이스박스에 꽉꽉 눌러담으면 10명분 정도는 채울 수 있었다.
그럼 스스로 똑똑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의 여동생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그녀는 아이스크림 명문대생 출신으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을 모조리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공급에 쏟아붓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 제가 거짓말 하는 것 같으세요? 이번 파티에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니까요? 이미 기획부에서도 결정된 사안이라 바꿀 수 없어요. 오늘 안에, 무조건, 가게에서 공급해줄 수 있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전부 가져다 주셔야 해요! 0.1 갤런에 5달러? 미치겠네! 4달러로 해요! 어차피 우리가 전세내서 관광객도 평소의 10분의 1이나 줄어든 상태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그만한 양의 아이스크림을 팔아보시겠어요? 1갤런에 45달러로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정도 에누리로는 택도 없어요! 깔끔하게 1갤런당 40달러로 하자니까요?!"
그녀의 어머니 이세령은 요리를 아주 좋아하고, 안드로이드가 대신해주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주부치곤 직접 장을 보는 것을 매우 즐기는 활동적인 타입이었다.
그녀가 종종 남매를 이끌고 마트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보여준 합리적인 가성비 분석 스킬은, 조금 좋지 않은 형태로 자식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좋아요! 40달러! 땡큐! ...어휴, 땡큐는 무슨.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악성 재고 처리해주는 건데 감사하기나 할 것이지."
식단 관리에 주의하느라 유지방 아이스크림은 입도 대지 않는 그녀도 아이스크림 가게의 악성 재고에 대해 알고 있다. 민트초코란 그런 것이다.
간신히 화를 삭힌 그녀는 곧 호국이 짊어지고 온 아이스 박스를 넘겨받아 박스테이프로 튼튼하게 봉인해버렸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인간인 척 행동하는 이 기괴한 ES들은 사건이 해결되는대로 모두 TF에 인계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 진득한 도플갱어 점액질들을 지지고 볶든, 용광로에 쳐넣어서 DNA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버리든, 거기까지 두 사람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신입이 데스핑거를 휘두를 때마다 호국이 민트초코의 죽여주는 대단함을 알려주고, 인간의 거죽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ES를 하나도 남김없이 사로잡는 것이었다.
'결코 내가 의도했던 작업이나 계획은 아니었지만, 핵심은 나도 이 계획의 일부로서 동참했다는 점이야.'
들썩거리는 아이스 박스들을 구석에 쌓아둔 채, 세희는 느긋한 표정으로 뭐 빠지게 뛰어다니는 가드-079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미 인명피해가 발생한 대사건이다. 하물며 하와이 존재하는 시설 관리의 부주의로 이러한 참사가 발생했으니 돌아오는 반사이익은 더욱 거대할 터.
'솔직히 정말로 꼴 보기도 싫은 노인네들 상대로 장단맞춰주면서 인맥을 쌓아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이제 막 4급 선임 연구원으로 올라섰을 뿐인 그녀는 여전히 실적에 목 말라 있었다. 보너스나 연봉 인상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양손으로 다 쥐지도 못 할 만큼 넘쳐흐르는 실적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다 3급 연구 팀장이 되는거고, 가속도만 붙으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TF라는 거대 기업(조직)의 중추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4급 선임 연구원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나 기술의 폭이 너무 좁아. 심지어 실시간으로 감시까지 당했었어.'
끝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시설 관리봇, 자신을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직장 선배들, 그리고 업무 기록을 제대로 확인했더라면 자신이 생각만큼 큰 공을 세우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것임에도 파티 초대장을 보낸 TF 상층부.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렇기에 뻔뻔한 인간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악착같이 실적을 긁어모아서 승진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하는 인간의 특이체질을 고칠 방법을 찾지 못 한다면, 쉘터 프로젝트에 탑승하지 못하는 가족 한 명을 두고 전뇌세계로 떠날수밖에 없다.
'그건 안 되지.'
세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대신해서 더욱 열심히 ES를 포획해주고 있는 가드-079를 바라보았다. 그의 언행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을 잘 한다'는 점 만큼은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일을 잘 해주고 있으니까.
사실 오빠란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뼈다귀만도 못한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좋든 싫든 가족은 항상 함께 해야 한다.
가족 모두가 가상 현실에 접속할 때, 오빠는 항상 홀로 남아 뒤쳐진 문화를 즐기지 않았나.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구닥다리 같은 문화를.
TF에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거슬리는 오빠를 가상 현실에 처박아두면 편할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그녀지만.
TF에 입사하고, 쉘터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는 조급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포함한 전 세계의 인간들이 전뇌세계로 떠나는 그날, 이 지구에 그를 홀로 남겨두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실적이 필요하다.
마치 TF의 최정상에 서있는 최고 수석 연구원처럼, 그녀 역시 누구도 태클걸지 못 하는 압도적인 권위와 권력이 필요했다.
최소한 자신이 해결책을 찾아준다면, 그 오빠로부터 '평생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저 뒤에 홀로 남아, 그늘 속에서 편하게 아이스박스를 지키고 서있는 세희를 호국이 좋게 보고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생각으로 고민을 하고 있든, 다급하게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처럼 이런저런 플랜을 짜고 있든, 그건 호국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너도 잘 봐둬. 여동생이란 것들은 다 저런 법이야. 오빠가 라면 끓여 오라고 하면 대뜸 신경질부터 내고, 오빠가 미친놈마냥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남의 입에 쑤셔넣으면서 돌아다닐 때 자기는 편하게 그늘에서 쉬지. 그게 여동생이란 종족이야."
신입에게 또 하나의 진리를 가르친 호국은, 신입이 막 지정했던 남자가 양손으로 입을 막고 있자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행보관님은 물고문 당할 때 어설프게 숨 참지 말라고 하셨지. 그래봤자 다시 숨 쉬려 할때 더 힘들어진다고."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한 번 두고보자며 호국은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 까지 기다렸다.
ES가 호흡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 이 ES는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쓴 채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다. 즉 인간처럼 호흡하고 생리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내 그가 참지 못하고 옅게 호흡하는 순간, 호국은 귀신같은 타이밍에 그의 입속에 아이스크림을 퍼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코와 입을 막아주었다. 친절하게도.
"그르르르르륵......!"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린 것을 신입이 아쉬운 기색으로 바라보다가, 호국의 눈치에 마지못해 놈을 아이스박스에 집어넣었다.
지금껏 관광객이나 현지인으로 위장해있던 ES는 총 72체였으며, 감쪽같이 민간인들 사이에 숨어있던 놈들을 추적, 고문, 포획했다.
하지만 개중에도 특이한 신분으로 위장한 ES가 몇몇인가 존재했는데, 바로 TF의 인간으로 위장한 ES였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개체는 경호 요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신분이라면 호국 일행을 합법적으로 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호국이 직접 찾아나서기도 전에 먼저 접근해서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그들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전혀 다른 존재가 인간 흉내를 내는 것과 인간이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점이 있었다.
진짜 인간인 경호 요원은 직급상, 그리고 이미 떨어진 명령때문에 호국에게 제지를 가할 수 없다는 점이고, 호국 역시 자신의 ID 카드로 신분을 증명해서 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TF에 소속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결과를, TF의 인간으로 위장한 ES들이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당연히 정상적으로 보였을리가 없다.
"누군 무기도 쓰지 말라고 해서 일부러 포크랑 나이프 쓰고 있구만. 누군 총 들고 위협을 하네."
조금 전 건방지게도 숨을 참아보려다 끝내 입에 민트초코가 처박힌 전 경호 요원의 태도는 아주 가관이었다.
같은 TF의 인간인 호국에게 대뜸 총을 들이밀며 이 사태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니 같이 가줘야겠다는 개소리를 내뱉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런 태도는 일을 하면서도 무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호국을 반병신이라고 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니까."
호국은 한숨을 쉬며 자신은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손에 들었고, 경호 요원이었던 ES에게서 노획한 총은 신입에게 넘겨주었다.
다들 알고있다시피 지금의 신입은 TF 산하 제 6 처리 시설 경비팀 79기 소속 경비가 아니라 그냥 호국의 소지품에 불과하니까. 소지품도 무기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때, 호국은 인근의 호텔 안쪽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비명소리에 재빨리 튀어나갔다. 호텔 로비에서 막 뛰쳐나온,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은혜였다.
"당신! 어제도 이 호텔에 접근했었지! 좋은 말로 할때 멈춰요!!"
그리고 그 뒤를 여성 경호 요원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아마 어제 같은 일을 또 하다가 바짝 예민해진 경호 요원에게 잘못 걸린 듯 했다.
쫓기던 남은혜는 용케 호국을 알아보고는 도와달라며 소리쳤다. 척봐도 호국을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 같았지만, 어제 잠깐 어울린 정을 생각하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신입이 호국의 어깨 너머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쫓고 있는 경호 요원은......
"저좀 도와...케흑?!"
빠악!
호국은 자신의 품으로 달려들 기세였던 남은혜의 목에 팔을 뻗어 크로스라인을 시전했다.
"멍청한 내 뇌는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호국은 멀쩡한 인간인 경호 요원이 다가오자 그녀에게 잠시 떨어지라 말한 뒤, 남은혜의 입에 민트초코를 퍼넣었다. 국밥집 아주머니처럼 아주 푸짐하게 담아주었으니 그녀도 틀림없이 만족하리라.
"게흑, 그흐으으윽?!"
아니나다를까, 격한 몸부림과 함께 그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자 경호 요원이 재빨리 총을 뽑아들었다.
"이게 탈주한 ES군요. 호텔 안쪽에서 발견되었길래 어느 틈에 침투했나 싶어서 체포하려 했는데...역시나였네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요?"
"저를 향해 도망치고 있으면서도 눈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통을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민트초코에 쥐약이니 당연히 민트초코가 무서웠던 거겠죠."
그럼에도 최대한 인간답게 보이기 위해 그녀는 주저없이 호국에게 도망쳐왔다. 바로 그 점이 호국의 뇌를 속일 뻔 했던 기가막힌 연기였다.
"...그걸 봤다고요?"
"제가 눈이 좀 좋아서요."
호국은 남은혜였던 것의 처리를 신입에 맡긴 뒤,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호텔로 향했다.
바로 어제 안면을 튼 사이인 남은혜까지 미끼로 내보냈을 정도라면, 슬슬 저쪽에서도 탄약(ES)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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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충격과 공포 작전(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