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70화 (170/209)

< 경비 업무 일지 : 민트초코 냄새(3) >

"병신같은 놈들!"

호텔에 비치된 내선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크리스 기어링은 파티 내내 꾹 참아두었던 평상시의 불같은 성격을 터뜨렸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여기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 모였는지 모르는 건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들!!"

허공에 삿대질까지 해대며 목에 핏대를 세운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한바탕 뒤집어 엎은 후에야 간신히 진정했다.

하지만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분노가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들도 꼴에 경호국이랍시고......!"

자신이 대체 누구인가?

제 1 연구 시설을 담당했던, 당대 최고의 수석 연구원을 제외하면 크리스 기어링이야말로 가장 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다.

처리 시설의 소장들은 끗발 떨어지는 뒷방 늙은이들 뿐이니, 최고 수석 연구원이 잠적한 지금 연구 소장 중에서 날아다니는 건 자신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제 2 연구 시설은 제 6 처리 시설 다음으로 실적이 좋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게 자랑은 아니었지만, 만약 가드-079라는 이레귤러만 없었다면 당당하게 실적 1위를 차지했을 만큼 그의 운영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자신이 이런 대우라니?

첫 파티에서부터 젊고 예쁜 파트너와 함께 고위 인사들과 담화를 나누며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제 1 연구 시설이 무너진 지금, 제 2 연구 시설이 비상할 때라고 판단했는지 꽤 많은 물고기들이 낚였던 것도 사실이다.

총책임자인 자신이 미끼를 살살 흔들면서 그들의 '개인적인' 협력 및 후원을 받는다면, 무사히 제 2 연구 시설의 소장직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뒤 자신은 FCD로 올라설 일만 남았다.

그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번 파티 스케줄 동안 열심히 물밑 작업을 해둘 계획이었건만, 치명적인 보안 사고가 파티 첫날부터 초를 치고 말았다.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넘어가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내 파트너가 하마터면 위험에 처할 뻔 했다는 사실은 용납할 수가 없어!'

크리스는 힐끔 시선을 돌려 문이 닫혀있는 욕실을 바라보았다.

현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자신의 파트너 제인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그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온 지금은 벌써 30분이 넘도록 욕실에 박혀 흐느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능글맞게 그녀를 위로해주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파티 참석자들 중에서 가장 보안 등급이 높은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어 따지기까지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과와 보안에 좀 더 신경쓰겠다는 사무적인 대답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보안 등급을 앞세워 경호국 국장에게 직접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여력이 조금 부족했다. FCD 승급이 확정된다면 또 모를까, 아직 연구 소장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FCD 그 늙은이들에게 미리 약좀 쳐둬서 망정이지, 그마저도 안 했으면 일개 경호 팀장 놈에게도 무시 당할 뻔 했겠어.'

당연히 크리스를 제외하고도 경호팀 측에 따진 사람들이 많았다. 보안이 허술하다느니, 파티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느니.

물론 그들 모두 경호 팀장인 존에 의해 최소한의 이의제기조차 묵살당했다. 국장 대리로 하와이에서의 안전을 책임지는 그는 1.5등급에 해당하는 권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제인을 인계 받을때 잠깐 마주쳤던 존이라는 남자는 묘하게 상대를 깔보는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변태처럼 느껴졌다.

'이 일은 나중에 확실히 따져주겠다.'

으드득, 하고 이를 갈아댄 그는 겨우 진정된 가슴을 부여잡고 욕실 문을 두들겼다.

"제인? 이제 좀 진정됐나? 진정됐다면 잠깐 얼굴좀 보지. 자네가 즐거워야 할 여행지에서 못 볼 꼴을 본 탓에 충격을 받았다는 건 나도 이해하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을 꾹꾹 담아두기 보단 차라리 분출하는 게 옳아. 뭐든 쌓아두면 병이 생긴다고들 말하지 않나? 그러니 일단 나와서......"

그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사이,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제인이 물기 젖은 머리로 나왔다.

화장과 눈물자국을 지우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한 듯 했는데, 뽀얀 살결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긴 생머리는 뭇 남성의 마음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크흠흠! 괜찮아 보여서 다행일세. 난 또 안에서......"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소장님."

와락. 몸에 타월 한 장만 걸친 그녀가 갑자기 안겨들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정말 노인이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연배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혈기왕성한 청년처럼 열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팔팔하다는 의미다.

"흠흠! 연장자가 걱정을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난 자네의 후원자이기도 해. 자네처럼 재능 있는 사람의 천재성이 행여나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손상이라도 입었다간...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손해 아닌가?"

"역시 절 이해해주시는 건 소장님 밖에 없어요."

그의 품에 안겨 속삭이듯이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크리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그래, 그럼 일단 침실에서 차분하게 얘기를 나눠보자고. 뭣하면 내일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아. 가볍게 하와이 관광지도 둘러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그...데이트로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네."

"맞아요. 확실히 내일 파티에 참석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역시 그런가? 그럼 같이 내일 일정도 짜보자고."

"보안 수준이 오늘보다 훨씬 더 올라갈테니까요. 이제 양을 잡으려면 직접 침투할 게 아니라 울타리부터 박살내야겠죠."

"음? 자네 무슨 소릴......"

으드드득!

"커허?!"

갑작스럽게 허리를 조여오는 강렬한 압박감에 크리스는 헛숨과 피를 토해냈다.

불길한 소리와 함께 찾아온 강렬한 통증은 이미 그의 갈비뼈와 척추가 아작 났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용케 신경은 끊어지지 않았는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통증이 뇌를 마구 헤집었다.

"어, 거어어, 거거거거......!"

미래를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고, 균형잡힌 식단을 챙기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노인은 노인이다.

젊은이와는 다르게 골밀도가 크게 떨어지며, 근섬유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회복력도 더뎌지는 탓에 조금만 큰 상처를 입어도 죽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 노인네의 상반신이 지금 막 착즙기에 짜여지는 것 처럼 쪼그라들고 있었으니,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잘게 부서진 갈빗대의 뼛조각이 중요 장기를 마구 찌르고, 급격하게 상승한 체내 압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대체...왜......?"

"그야 소장님은 필요없으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건 소장님이라는 신분 뿐이예요."

"어, 으아아......"

결국 그는 공포와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자신의 사랑스러운 파트너를 내려보다,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다.

이윽고 그의 숨이 완전히 멎었음을 확인한 제인은 축 늘어진 노인의 몸에 자신의 손을 쑤셔박았다.

본래 다른 무언가였던 것이 제인으로 갈아타면서 분열했고, 그렇게 분열된 제인이 지금 크리스의 몸으로 나뉘면서 재차 분열하기 시작했다.

분열된 제인이 크리스의 몸에 안착하자, 그는 순식간에 비틀린 몸을 복구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는 크리스이자 제인이었고, 제인이자 또 다른 무언가였다.

하지만 일일이 그런 걸 따지려면 끝이 없을테니 미리 정해둔 것 처럼 '우리'라는 호칭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늙은이 몸은 영 아닌 것 같은데...나름 건강좀 챙긴다고 챙긴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약한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들 중에선 대외적 신분이나 인맥 관계가 가장 대단한 사람이예요. 이제 당신이 우리의 자유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거라고요."

"그건 나쁘지 않군."

크리스는 자신의 목에 손을 대고 평소 그가 대화를 할 때 사용하는 목소리를 순식간에 카피했다.

이윽고 말투나 행동까지 교정이 끝난 그는 자신의 짐가방을 뒤져 스마트패드를 꺼내들었다. 살아온 날이 많은 늙은이일수록 심층 기억까지 살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직접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중요했다.

"파티가 끝나고 귀국하는 건 3일 뒤군. 그 전까지 총 26회의 개인적인 만남이 스케줄로 잡혀 있는데다 파티에 참석해서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눌지도 정돈되어있군. 이 늙은이는 어지간히도 권력 욕심이 많았던 모양이야."

"그야 그렇겠죠. 이 몸의 원래 주인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외적으로 나설 때 체면을 차리기 위한 들러리처럼 사용했다는 기억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여자는 그걸 알면서도 붙어있었으니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했던 거겠죠."

이런 관계일수록 연기하는 건 무척이나 쉽다.

진실된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나, 한창 열기가 뜨거운 닭살 커플처럼 진정성 담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는 친밀한 척, 서로 사랑하는 척 하면서 너무 깊은 관계처럼 보이지 않게만 하면 된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다 알면서도 굳이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그런 관계다.

"음, 그보다 기억 속에 이상한 놈이 있는데."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우리 모두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죠."

크리스는 유독 자신의 기억 속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쉽게 떠올렸다.

"통칭 가드-079, 본명 김호국, 나이 23세, 소속은 제 6 처리 시설 경비팀 79기이며, 보안 등급은 3급 경비팀장. 참석자들 중에서 유일한 경비로군."

"우리를 시설에서 억압했던 그 경비 말인가요?"

"그렇지. 게다가 툭 건드리면 죽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이레귤러라는 평가가 존재하는데...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늙은이도 모르는 듯 하다."

경비 치고 실적이 너무 대단하다, 그래서 이레귤러라고 판단했다는 정보밖에 없는 상황. 크리스는 곧 다른 기억을 뒤적이면서 스마트패드 속에 저장된 기밀 문서들을 빠르게 열람했다.

자유를 되찾고나면 이 TF라는 집단을 내부에서부터 잠식한다음, 완전한 파멸로 이끌 작정이었다.

"우선 우리에게 찬동해줄 동료를 좀 더 늘려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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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 룸서비스를 시킨 호국은 드레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세희와 함께 정체불명의 ES 놈(들)을 잡을 계획을 논의해나갔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역시 일반인과 ES의 구분법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피해자와 완전히 같은 행동 유형을 보인다면 유도신문으로 정체를 간파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똑똑한 놈들도 쓸모가 없구만."

"...그건 똑똑하고 멍청하고를 떠나서 이론상 불가능하다는 의미예요."

눈치를 준 세희는 스마트패드의 홀로그램 기능을 이용해 모든 의견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라 불리는 회의 기법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소 무분별할지라도 참가자 모두의 의견을 적극 참고하는 방식이었다.

간혹 겉멋만 잔뜩 든 놈들이 꼴에 멋들어지게 회의좀 하겠답시고 호들갑을 떨어대는데, 실제로는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막 떠오른 걸 막 내던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쓸만한 것 한 둘쯤은 나오기 때문이다.

"ES와 인간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C 게이지 관측 장비 뿐인데, 이건 시설에서 반출 금지라 지금 준비하는 건 불가능해요. 예외적으로 기동타격대가 C 게이지 관측 장비를 현장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동타격대는 지원 오지 않았죠."

"그럼 그건 쓸모없는 계획이네."

호국이 대놓고 홀로그램에 손을 대서 선을 찌익 그어버렸다. 그 모습에 괜히 열받은 세희가 빽 소리쳤다.

"그럼 그쪽도 좋은 의견좀 내봐요! 아까부터 나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민트초코를 먹여본다."

"...지금 장난해요? 이거 장난 아니라고 제가 분명히 말했죠?"

"아냐, 들어봐."

세희의 분노 게이지가 100에 도달하기 직전, 호국은 손을 내저으면서 IQ 84를 총동원한 논리를 내세웠다.

"내가 화장실에서 그 오물 덩어리를 조사하고 있을 때 이상한 냄새를 하나 맡았거든."

"무슨 냄새요?"

"민트초코 냄새."

아니나다를까 헛소리였지만 그녀는 일단 들어나보자는 생각에 팔짱을 낀 채 경청했다.

"생각해봐. 그 놈이 필요없는 거죽과 오물을 뱉어내고 튀었는데, 거기서 민트초코 냄새가 났다? 그건 민트초코가 몸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물과 함께 배출한 게 아닐까? 내가 파인애플 피자를 먹으면 꼭 배탈나는 것처럼."

호국은 파인애플 피자를 먹을 때마다 배탈이 났던 자신의 경험담까지 늘어놓으며 헛소리에 1%의 신빙성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민트초코를 오물과 함께 배출해야 했을 만큼 몸에 안 받았던 게 틀림없어."

"그래요, 그 헛소리가 가령 사실이라고 치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민트초코를 먹일 건데요? 자기는 민트초코가 싫어서 먹지 않겠다며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혹은 반대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거리낌없이 민트초코를 먹을 수도 있다. 식인종이 태연하게 쇠고기 햄버거를 먹는 것처럼.

"민트초코를 섭취한 ES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반응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반쪽짜리 계획일 뿐이예요. 우리가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확실하게 ES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거라고요."

"그럼 그 반쪽짜리 계획에 반쪽짜리 계획을 하나 더 더하면 되잖아."

"또 다른 계획이 있어요?"

세희가 새삼스럽게 놀란 얼굴로 되묻자 호국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건 똑똑한 네가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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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민트초코 냄새(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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