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66화 (166/209)

< 경비 업무 일지 : 대충 심각한 사건(4) >

여긴 어디인가.

"슈비두바~ 바라바라 바~ 오뚜기 밥~"

자신은 누구인가.

"어흐, 호텔 거품 욕조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만!"

자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가.

"예쁜이들이랑 놀려면 이 털도 좀 정리해야겠군!"

호국은 호텔 모 호텔에 잠입해 천장 벽을 뚫고 들어가 누군가의 '목욕신'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며, 정확히 15분 하고도 35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제가 좀 빡대가리라 그런지 이해가 잘 안 되서 그러는데, 다시 한 번만 설명해주실래요?"

"우리가 정보를 제공했으니, 이제 피지컬이 자랑이신 젊은 친구가 움직여줘야 한다, 이 말이지."

"그거랑 호텔 침투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가 이 꼴로 저 삼엄한 경비가 돌아다니고 있는 호텔에 침투할 수 있겠어요?!"

남은혜도 자기 꼴이 어떤지는 잘 아는지 따져물었다.

하지만 그건 자기들이 이 하와이 땅에서 몇 안 되는 자연스러운 관광객 연기를 하겠답시고 그렇게 차려입은 거고, 호국은 여전히 정장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와이 번화가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잠입 액션에 어느 쪽이 어울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알로하 복장을 갖춰 입은 얼간이들이겠지만, 그들은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호국을 앞세우려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우선 제가 침투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연기한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누가 그래?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 건 '우리'고, 젊은 친구는 연기를 한 적이 없잖아?"

"아니, 저도 여러분들이랑 같이 다녔......"

"그 차림으로? 그 태도로?"

강백산이 연거푸 지적하자 호국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긴 진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자 했으면 호국도 남사스러운 알로하 복장에 촌뜨기마냥 커다란 디지털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돌아다녔겠지.

지금 호국의 복장은 영락없는 TF 경호국 요원처럼 보였다. 최소한 지금 이 시기에 하와이에서 답답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건 그쪽 사람들 뿐이니까.

"조, 좋아요. 제가 침투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저는 저쪽이랑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금세 들킬 게 뻔한데요?"

"그러니까 안 들키려는 노력을 해야지. 필요하다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야하는 거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즛쯧, 이 친구야.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 여기에 복장이 안 어울리는 사람이 세 명과 두 명으로 나뉘어 있고, 저쪽은 보안에 엄청 민감해. 그럼 그 보안을 건드려주면 벌집처럼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호국은 자꾸 어려운 말을 하는 강백산을 지면에 패대기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신이 못 한다면 신입을 시켜서 바다 한복판에 던져버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뭔가 계획이 있으니까 이렇게 쫑알대는거겠지. 일단 더 들어보자.'

떠들거라면 최소한 프롯보다 더 많이 떠들어보라고, 아주 작정하고 귀를 열어젖힌 호국은 그의 헛소리를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우리가 지금껏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관광객인척 하고 돌아다녔지만, 사실은 유명 인사를 쫓아다니는 파파라치였다면? 아니면 테러리스트나 범죄조직에게 정보를 팔아먹으려는 쁘락치였다면? 그게 밝혀진 순간 저 쪽의 분위기 잡고 있는 떡대 형님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어? 너 이 녀석 한대만 맞아, 하고 곤봉을 들고 쫓아오겠지?"

"그렇겠죠. 보안에 민감하니까요."

"그럼 빈틈이 생길테고, 젊은 친구는 그 자랑하는 피지컬로 저 호텔에 침투할 수 있겠지?"

"그렇겠죠. 제 피지컬이 대단하니까요."

"그럼 됐네!"

"예?"

마지막이 호국이 되묻자 강백산은 자신과 차태준, 그리고 남은혜를 순서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은 나쁜 놈들이었던 우리가 관광객이었던 척 하면서 VIP의 정보를 훔치려 했다, 라는 걸 연기해서 저 놈들의 시선을 끌테니까 그 틈에 젊은 친구가 가서 진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고 오란 얘기야."

"양동작전을 쓰자는 거네요."

"그렇지.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혹시 IQ가 몇이야?"

"84요."

강백산은 껄껄 웃으며 호국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거 젊은 친구가 농담 잘 하네. 사고가 좀 딱딱한 거랑 멍청한 거랑은 다른 거야. 좀 더 유연한 시각과 사고를 가지도록 노력하면 돼.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이어셋을 꺼내더니 인당 하나씩 나눠주었다. 사람 찾는 게 전문인 인간이라 이런 물건도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어. 남은혜랑 차태준이 연인인척 하면서 호텔 근처에 접근해. 그리고 저 보안 요원들의 신경을 살살 자극하는 거지."

"음, 제가 사람 신경을 긁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전 할 줄 알아요!"

호국은 차태준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저 얼굴, 목소리, 말투만으로도 이미 호국의 필살기인 36 연격을 쳐먹이고도 남을 만큼 신경을 긁었으니까. 남은혜는 처음부터 그랬고.

"두 사람은 주제를 모르고 저 고급스러운 호텔에 묵고 싶어하는 관광객을 연기해야 해. 저 떡대들이 앞을 막으면 "우리 돈 많다!"나,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역정을 내면 더 좋고."

강백산은 전직 형사가 아니라 전직 드라마 감독인 것 같았다. 메가폰만 안 들었지, 두 사람에게 열혈 연기를 가르치는 폼은 아주 막장 드라마의 제왕이시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내가 취객으로 등장할 거야. 내 앞을 가로막으면 난 내 호텔에 쉬러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겠지. 그러다 몸에서 자연스럽게 이걸 떨어뜨릴거야."

강백산은 이어셋과 비슷한 크기의 소형 몰래카메라와 부착형 도청기를 꺼내보였다. 요즘 같은 시대엔 인터넷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하필 이 시기에, 이 장소에서 보였다간 큰일나는 폭탄이었다.

"그때부터 난 뭐빠지게 달리는 거야. 저중 일부는 날 쫓아올테고, 상황이 심각해졌다며 상부에 보고를 하느니, 주변을 통제하느니 아주 난리가 나겠지?"

"그렇겠죠. 최악의 경우 아저씨는 좋지 않은 곳에 총을 맞고 백산 병원에 실려가실 수도 있겠네요."

"하하, 내가 젊은 친구한테는 피지컬로 안 되겠지만 이래 봬도 전직 형사인 몸이야. 게다가 지금은 사람 찾는 일을 하고 있지. 사람을 찾기만 하면 끝나겠어? 쫓기도 하고, 튀기도 하고, 잡는 일도 빈번한데."

그는 다리털이 무성한 장딴지 근육을 보여주며 걱정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서 젊은 친구의 역할이 중요해. 지원 요청 받고 왔다며 자연스럽게 등장해도 좋고, 마침 근처를 순찰하다가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도우러 왔다고 해도 좋아. 어느 쪽이든 그 복장이면 급한 상황에서 동료로 인식해줄 거야."

"일리 있네요."

"좋은 계획인 것 같아요!"

차태준과 남은혜가 엄지를 척 세우며 강백산의 계획을 칭찬했다.

'일리가 있기는 개뿔.'

TF 직원들은 그렇게까지 허술하지 않다. 아마 이런 복장으로 접근한다고 해도 당신 누구냐며 우선 멈춰 세우고, 신분 검사나 몸수색부터 할 것이다.

'그나마 내가 같은 TF 소속이라 망정이지.'

호국은 자연스럽게 3급 보안 카드를 목에 걸었다. 만약 호국이 TF 소속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도 전에 수갑부터 차거나 총을 맞았으리라.

애초에 대놓고 자신을 미끼로 쓰겠다는 강백산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다들 알아들었을테니 이제 시작해보자고."

그렇게 시작된 강백산표 이중 양동 작전은 의외로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차태준과 남은혜 커플은 상상이상으로 경호 요원들의 성질을 잘 긁어주었는데, 비아냥과 허세, 그리고 막무가내로 떼쓰기 전법이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머리에 열이 뻗친 몇몇 경호 요원들이 두 사람에게 들러붙어 '이곳은 민간인 통제 구역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이상 나대면 반병신을 만들어주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기가막힌 타이밍에 옛날 트로트 노래를 부르며 휘적휘적 등장한 강백산이 취객 패시브 스킬을 이용해 어그로를 끌었다.

대충 몇 시간 전부터 술을 입에 달고 다녔던 그는 가까이 있기만 해도 알콜 냄새가 진동하는 진성 취객이었는데, 한국 경찰도 함부로 대하기 힘들어하는 초고수 스킬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아뉘이이이이, 쒸이이이이뿔! 내가, 내 방에 가서, 잠좀 자겠다는뒈! 이 쓰웨끼들이 감히...앞길을 막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르신."

"안 되긴 무어어어가 안 드웨! 너 인마! 내가 누군지 알어?! 너! 내 이름 들으면 바지에 똥! 지릴거다!!"

"신분증이나 여권을 제시해주십시오. 이 호텔의 숙박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어, 흐흐. 역시 내가 좀 젋어 보이긴 한가보구만! 젊은 친구가 아부 잘 하네! 내가 인심써서 담배랑 술, 5만 원에 산다!!"

그리고 그가 꺼내든 것은 5천원. 달러로 교환하지 않은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드는 와중에 그에게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에이씨."

이어셋 너머로 말투가 확 바뀐 강백산의 욕지기가 울려퍼졌다.

"이 새끼 잡아!!"

"가만히 있어!!"

눈치 빠른 보안 요원들이 그에게 달려들고, 그보다 더 눈치가 빨랐던 강백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맨발로 원주민처럼 달려나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기는 5구역 XX 호텔, 상황 발생. 상황 발생. 지원 가능한 인원은 즉시 지원 요청 바란다.

-현재 도주중인 거수자를 추격하고 있다.

-무기 사용은 허가하지만 거리의 민간인과 기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호국은 신입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무전기로 경호 요원들의 무전 내용을 감청하며 타이밍을 살폈다.

그리고 차태준과 남은혜 콤비가 슬슬 경호 요원들에게 밀리려는 찰나, 귀신같이 호텔 앞으로 등장해 '내부 안전을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움직임이 빠른 신입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는 사이에 불쑥 숨어들었지만, 호국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부러 경호 요원들 앞을 지나쳤다. 물론 그들에게 3급 보안 카드를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TF에선 ID 카드와 보안 카드를 별도로 지급하는데, 당연히 진짜배기인 보안 카드만 불쑥 내밀면 상대는 저도 모르게 '동료구나'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호국이 무사히 호텔에 침투하는 것을 본 차태준과 남은혜는 결국 못마땅한 얼굴로 경호 요원들에게 궁시렁대며 물러났다.

단숨에 호텔 현관에 위치한 프론트에서 자신의 보안 카드를 제시해보인 호국은 관계자들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중요 숙박객(VIP)들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당연하지만 고급 호텔마다 여러 명의 VIP들이 나뉘어 숙박하고 있는 실정이라, 다른 곳에 있던 관계자가 불쑥 나타나 누구누구 씨가 몇 호실에 묵고 계십니까? 정도를 묻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이 또한 호국이 일반인이었다면 택도 없었겠으나, TF 소속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호텔에는 어떤 VIP들이 숙박하고 있는지 알아낸 호국은 다급하게 뛰어 올라갔다. 이미 바깥에서 심각한 상황이 터졌다는 걸 연출했으니 느릿느릿 움직이면 어색해보였던 것이다.

그때,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먼저 숨어들었던 신입이 2층으로 올라온 호국의 팔을 잡아 끌었다. 녀석은 청소부와 안전 점검관에게서 넘겨받은(강탈한) 사다리와 공구함을 들고 있었다.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더니, 호국은 기특한 신입의 헬멧을 쓰다듬어주곤 사다리와 공구함을 챙겨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숙박객들은 하나같이 권위의 상징이란 걸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상층부에만 머무르고 있었는데, 아무리 호국이 TF 관계자라고 해도 무턱대고 그들의 방문을 따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방문을 딸 수 없다면 천장을 딴다!'

고급 호텔은 특정 층마다 청소부들이 따로 사용하는 작은 창고가 존재하는데, 그곳은 CCTV의 사각이었다.

천장 합판을 뜯어내고, 자잘한 구조물을 치워내는 것 정도는 호국과 신입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장 합판을 뜯어낸 호국은 신입을 먼저 밀어 올렸다. 녀석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주먹으로 두들겨서 밀어붙이니 좁은 공간도 슬라임처럼 쏙 들어가버렸다.

이윽고 천장으로 따라 올라온 호국은 앞서 기어가는 녀석의 엉덩이를 향해 물었다.

"내가 외우라고 준 명단 다 외웠지? 여기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은 판 맥베인이라는 사람이야."

신입은 원형 탈모가 끔찍하게 진행된 TF의 후원 정치인 중 한 명인 판 맥베인을 찾아나섰다. 그는 FCD는 아니었지만, TF에 귀중한 인재를 제공하거나 특정 국가에서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는 VIP 중 한 명이었다.

TF 소속은 아니지만, TF의 배려로 이번 파티에 초대된 전형적인 '거물'이었다. 사내 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은 사람들이 파티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인맥을 형성하게 될 인물이기도 했다.

신입은 거침없이 먼지 투성이와 두꺼운 배선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을 지나쳐, 환풍구 구멍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한 욕실 앞에서 멈춰섰다.

누군가의 흥겨운 콧노래와 물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 욕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두근두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호국은 신입을 제치고 환풍구 구멍으로 내려다 본 순간, 인상을 찡그렸다.

"슈비두바~ 바라바라 바~ 오뚜기 밥~"

"어흐, 호텔 거품 욕조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만!"

"이 털좀 보라지! 밤새 예쁜이들이랑 놀려면 이 털도 좀 정리해야겠군!"

호국이 내려다본 욕실에는 웬 노친네가 주책을 부리며 목욕신을 연출하고 있었다.

"저 양반이 목욕하고 있는 틈에 침실로 침투하자."

이런 광경을 미리 경고하지 않은 신입의 머리통을 후려친 호국은 방향을 돌렸다.

------

< 경비 업무 일지 : 대충 심각한 사건(4)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