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64화 (164/209)

< 경비 업무 일지 : 대충 심각한 사건(2) >

"아오, 이 돼지. 더럽게 무겁네 진짜."

겉보기엔 두드러진 군살도 없는 주제에 왜 이렇게 쓸데없이 무거운건지. 어쩌면 세상 모든 여동생들은 오빠가 부축해주면 무거워지는 패시브 스킬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호국은 호텔리어에게 안내받은 모 호텔의 403호에 세희를 던져넣은 뒤, 신입과 함께 바로 옆의 404호에서 짐을 풀었다.

사내놈이 뭐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올 게 있겠느냐마는, 호국이 옷가방에 따로 챙겨온 것이 몇 개인가 있긴 했다.

우선 언제든지 프롯과 연락할 수 있는 스마트패드, 아직 섭취해본 적 없는 흰 가루가 들어있는 약병, 그리고 검은 코인과 회중시계였다.

리볼버는 무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져오지 못 했고, 짚인형은 사무실에 박살난 안드로이드 머리와 함께 장식해뒀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몸에 딱 지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잡동사니들을 꼭 주머니나 백팩에 넣어두고 다니는 사람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충전기, 이어폰, 세면도구 따위였지만, 호국은 조금 달랐다.

'이것들이 묘하게 콜렉터 기분을 느끼게 해준단 말이지.'

꽤 어린 시절에 한가득 모았던 고인물 카드 게임의 카드처럼, 이런 잡동사니들도 꾸준히 모아두면 왠지 모를 성취감이나 만족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짐을 대충 풀어헤치고 신입에겐 소파 자리를 잠자리로 내준 뒤, 호국은 더블 사이즈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생애 처음 맞이한 해외 여행이라 잔뜩 들떴건만, 설마 남들처럼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는 신세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순히 엘리트만 모이는 집단이라 멍청한 호국이 감히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다. 저 혼자 바다에서 서핑을 하든, 관광지를 돌아다니든 신나게 즐길 거리는 많으니까.

하지만 척봐도 한 번 하기로 한 건 무조건 하겠다는 인상이 강했던 존은, 인상대로 호국에게 막중한 책임(일)을 떠넘겼다.

'내가 암만 눈썰미가 좋다지만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ES를 구분하는 재주는 없는데.'

존이 건네준 프로필 명단은 이미 모조리 외워버렸다. 함께 첨부된 사진도 그대로 기억했기 때문에, 그에 일치하는 인물과 마주치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문제는 상대가 인간인지 ES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것. 일단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쓰면 인간과 완전히 같은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고 하니, 심리적으로 허점을 찔러서 정체를 간파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한테 그런 똑똑한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가장 뼈아픈 제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무기 사용 금지라는 제약이었다.

경비 일을 할 때도 기본적으로 충격 진압봉과 권총은 상시 소지했었는데,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무기 소지 및 사용은 절대 엄금이라니.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었다.

물론 무기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호국이 맥없이 상대에게 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호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미처 반응하기 힘든 불시의 기습이 날아든다면 또 모를까.

즉 이번에 억지로 떠넘겨지다시피 건네받은 비밀 임무는 호국에게 예측불허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무기)은 사용하지 말고, 신속정확하게 일을 해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정도면 노동청에 신고해야 하는 수준인데?"

자동화 공장에서 시급 2천원 받으며 일했던 적도 있지만, 그건 딱 시급 2천원짜리 일이라서 호국도 납득했었다.

하지만 이건 업무외 일인 주제에 이렇다 할 만한 보상도 제시하지 않고, 부려먹기만 하겠다는 것 아닌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호국은 슬쩍 고개를 돌려 소파 위에서 고양이 자세로 엎드려 있는 신입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호텔의 방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간식 봉투를 뜯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가만. 이 일을 굳이 나만 힘들여서 할 필요가 있을까?'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신입도 엄밀히 따지면 호국과 같은 가드였다. 게다가 같이 얘기를 듣기도 했으니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을 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호국이 아직 버리지 않은 프로필과 사진들을 신입에게 내밀며 말했다.

"10분 준다 다 외워라."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신입은 호국이 건넨 서류와 사진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자신의 각오를 선보였다.

하마터면 남들 다 놀고 있는 판에 홀로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갈 뻔 했던 호국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약 올해의 후임상이 있었다면 신입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 기쁨을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십상타취(什相妥取)에 준하는 기쁨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럼 이제 나가자. 다들 우리가 꼼꼼하게 일하는지 안 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야."

호국의 시야 구석에 들어온 것은 은은한 불빛을 자아내는 전등 속에 감춰진 몰래카메라였다.

아마도 호국이 존과의 약속을 어기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봐 취한 조치인 듯 했다. 물론 그외에도 호국이 따로 숨겨온 불법적인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때도 감시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모조리 뜯어낼 생각이었다.

얼마 쉬지도 못한 호국과 신입이 다시 방을 나서려는 순간, 외부의 누군가가 한발 앞서 방문을 두들겼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주자 복도에는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서있었다.

한쪽은 어색하게 폼만 잡으려고 콧수염을 기른 비쩍 마른 타입의 중년 사내, 다른 한 쪽은 왜 아이돌을 하지 않고 여기 있는지 모를 기생오라비 같이 잘 생긴 놈 하나, 그리고 호국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풍성한 금발을 자랑하는 여성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조합이었다.

존에게는 눈 뜨이고도 코가 베일 만큼 멍청한 호국이었지만, 그런 호국이라도 눈앞의 셋과 엮이면 굉장히 피곤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문을 닫으려는 순간, 여자 쪽이 잽싸게 샌들을 신은 발을 문턱에 들이대서 막았다.

그리고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을 것 같은 기생오라비의 목소리가 호국의 고막을 살살 긁었다.

"어우, 너무 경계하시네요. 저흰 그저 같은 의뢰를 받은 입장에서 협력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인데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딴데 가서 노세요. 그쪽도 남의 방문턱에서 발 빼주시고요."

"겉보기처럼 굉장히 딱딱하시다~ 평소에 운동 꾸준히 하나봐요?"

여성이 슬쩍 방문을 잡고 있는 호국의 팔을 만지려하자 서둘러 팔을 뺐다. 그 순간 문을 막고 있던 힘이 줄어들어 불청객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다.

"이야, 방 좋네. 역시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달라도 뭐가 달라. 그런데 혹시 술 있나?"

"...냉장고에 있겠죠."

"에이, 젊은 사람이 척하면 척이어야지. 술이 있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마셔도 되냐는 의미로 알아들어야지."

능글맞은 말로 호국을 놀린 중년은 그대로 휘적휘적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꽤 고급 호텔이라 그런지 싸구려이긴 해도 적당한 술이 몇 병 있었다.

방 주인은 초대한 적도 없는데 우르르 몰려들어온 3인조는 마치 처음부터 정해뒀다는 양 소파와 침대에 멋대로 앉았다.

"와 대박! 우리한테 잡아준 호텔은 싸구려라 침대도 싱글 사이즈에 시트가 부드럽지도 않았는데......"

"하하, 확실히 분위기 괜찮네요. 저도 이런 곳에서 숙박할 수 있다면 좀 더 영감이 잘 느껴질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뭘좀 아는구만. 크흐으으...좋다."

호국은 지끈거리는 이마의 두통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간신히 떨쳐냈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 뒤, 세 사람에게 말했다.

"한 사람당 자기소개 시간 1분 드립니다."

1분 안에 소개하지 못 하면 흠씬 두들겨패서 내쫓아주겠다는 의미로 손가락을 뚜두둑 뚜두둑 풀었다.

그러자 탁 풀린 눈을 하고 있던 중년이 누구보다도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 강백산, 나이 37세, 경력은 전직 형사, 현직 흥신소 사장, 취미 낚시, 특기 분야는 사람 찾기."

10초만에 간단명료한 그의 소개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그 근처에 앉아있었던 여성이 당황하며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 이름은 남은혜고...해외 유학 경험 있는 현직 심리 상담사예요. 나이는 24에 취미는 클럽 가기. 아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말하고 있는 거지?!"

"대충 말할 건 다 말하셨으니 다음은 제가 하도록 하죠. 저는 서울 강남구에서 작은 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 차태준이라고 해요. 나이는 25, 취미는 없지만 특기는 제 일과도 관련이 있어요. 바로 타로점, 사주풀이, 전생 해석이나 영감(靈感)을 느끼는 일 등이죠."

호국은 순서대로 세 얼간이의 대략적인 자기소개를 듣고 단숨에 외웠다. 그리고 스스로 분석하고 결론을 내렸다.

우선 남의 방에서 다짜고짜 술병을 들고 있는 중년 아저씨는 사람 찾는 게 전문인 알콜 중독자. 두 번째로 호국의 푹신한 침대를 탐내고 있는 금발 여성은 심리학 전공을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심리 상담사, 마지막으로 세상 편안한 얼굴로 호국을 바라보고 있는 기생오라비는 사이비 점술사인 듯 했다.

'와, 트리플 크라운이네 진짜.'

거기에 호국을 포함시킨다면 그랜드 슬램이 되겠지만, 호국은 결코 이 집단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호국을 대하는 태도나 말투로 봐선, 존이 언급했던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따로 부른 몇몇 분들' 인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자신도 이들과 함께 할 운명이라는 걸 깨달은 호국은 한숨을 쉬며 자기소개 바통을 넘겨받았다.

"김호국이예요.."

"와, 우리들한텐 무서운 얼굴로 1분 안에 자기 소개 하라면서 겁주시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자기 이름 뿐이시네?"

"혹시 꼬우신가요?"

호국이 대놓고 그리 묻자 오히려 남은혜가 크게 당황했다.

키가 좀 작아서 아담해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귀엽다는 인식보단 여성스럽다는 인식을 얻기 위해 금발로 염색도 하고, 화장이나 패션 스타일도 나름 잘 살렸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남성에게 적대당할 일이 없었던 그녀에게 호국의 비아냥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누구라도 자신의 개인 룸이 침범당하면 이런 기분이겠지만, 무려 TF에서 의뢰를 받아 공짜로 하와이에 당도한 만큼 들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처 타인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하지 못한 실책이었다.

"자, 자.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시고,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친 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저희도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점은 호국 씨도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이 놈은 날 언제 봤다고 말투가 이래?'

호국의 안에 잠재된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이 강력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의 나긋나긋한 말투나 태도를 신경 쓰는 건 호국 뿐이었는지, 병나발을 불고 있던 강백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말을 거들어주었다.

"저 친구 말이 맞아. TF의 높으신 분들이 이번에 사람 좀 찾아달라고 우리 같은 전문가(?)들을 특별히 초빙해줬는데, 이 일을 해결해야만 제대로 보수를 받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이왕이면 다 같이 협력해서 빠르게 일 끝내고, 공짜 하와이 관광 즐기다가 귀국하자는 의미야. 김호...구? 자네도 그게 좋잖아?"

"김호국이요."

"그래, 호국. 어쨌든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뜻이니 너무 고깝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야. 물론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친 건 나도 사과하지. 하지만 워낙 급한 사안이라...그, 자꾸 압박을 주더라고. 빨리빨리 조사에 착수하지 않는 거냐, 그렇게 빈둥대기만 할 거냐는 식으로."

호국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만, 이 방 안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슷한 압박을 받고는 있었다.

"호국 씨도 이미 들으셔서 알고 있겠지만, TF에선 저희더러 일반인으로 위장한, 하지만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미친 싸이코패스 범죄자의 정체를 밝혀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약간의 위험도가 따르는 일인 만큼, 의뢰를 받은 사람들끼리 다 함께 힘을 합쳐서 해결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상대가 ES라는 걸 모르는구나.'

먼저 ES에 대해 꺼내지 않은 호국은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짐짓 분위기를 잡는 척 팔짱을 꼈다.

"저는 혼자 행동해도 상관없는데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피지컬은 자신 있어서요."

"에이, 사람 찾기에 피지컬보단 역시 이거지 이거."

강백산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IQ 84인 호국은 감히 반박할 엄두도 못 내는 완벽한 논리였으나, 그 부분은 애써 무시했다.

"저희는 개인적으로 호국 씨와 뒤쪽에 계신 분도 꼭 함께 협조해주셨으면 해요."

호국은 자동반사로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게 바로 그 주먹이 마렵다는 의미인가 싶었다.

"제가 여러분들과 협력을 해도 이득 볼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서요. 얘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거절하고 세 얼간이를 방에서 내보내려는 순간, 호국의 스마트패드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존이었고,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그들과 함께 협력해주십시오.

"......"

호국은 진지하게, 승진이 아닌 연봉 인상을 선택한 자신의 꼴통을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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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대충 심각한 사건(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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