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대충 심각한 사건(1) >
호국은 비행기 속에서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동안 똑똑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똑똑해진다는 것은 여동생을 말빨로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IQ가 31나 차이날지라도 상대가 여동생이라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마치 바퀴벌레가 위급 상황시 폭발적으로 IQ가 증가하는 것처럼, 호국도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IQ 상승 효과를 맛본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결국 호국이 비행기배 53회차 남매 말다툼에서 또 한 번 승리했다는 것이며, 여동생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살떨리는 말다툼을 하던 남매는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싹 닦고, 공항으로 마중나온 재단 직원들을 마주했다.
한국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웃긴 호놀룰루 공항에선 이미 만전의 준비를 갖춰둔 듯, 일반인 관광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오직 재단 직원 및 고위층 간부들만 하와이 일부 지역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인지, 현지인들 중에서도 시설 관리 및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제외하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호국과 세희 남매처럼 초대를 받아 하와이 땅을 밟게 된 VIP 인사들을 경호하는 기동타격대의 임무도 공항에서 끝나는 구조였다.
기동타격대는 본래 VIP 경호보다는 적의 섬멸과 진압에 초점을 맞춘 공격형 주력부대인지라 빠르게 본 기지로 돌아가는 듯 했다.
대신 경호를 넘겨받은 것은 FCD 측에서 따로 제공해주는 시크릿 서비스(Secret Service), 즉 경호국 요원들이었다.
공식적으로 재단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반 경호 요원이라도 최소 보안 등급은 3급, 경호 팀장은 2급을 자랑했다. 덧붙여서 FCD의 모든 신변 안전을 담당하는 경호국의 국장은 FCD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때마침 경호 팀장 ID 카드를 걸고 있는 중년 사내가 마중나온 인원들을 제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제 6 처리 시설 경비 팀장-079와 김세희 4급 선임 연구원 맞으십니까?"
"편하게 가드라고 불러주셔도 되는데요."
"위치가 위치인지라 저는 반드시 상대방의 이름과 직급을 말하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 것 치곤 호국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프롯이 미리 제출한 소지품 신청서와 추가된 '부탁' 때문이었다.
다들 짜고치는 것 처럼 가드-079의 본명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세희는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갑다 하고 시근퉁하게 넘겼다.
"그런데 저희같은 사람들을 왜 경호 팀장님께서 직접......?"
세희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호국은 그게 무슨 말투냐는 식으로 돌아보았다.
자신 정도면 꽤 잘 나가는 것 아니냐고 되도 않는 말을 하려다 세희의 손에 제지당했다.
"외람되지만 저희는 경호 팀장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야 할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급에 맞지도 않는 '과한 대우'를 받으면 곤란하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흘렸다. 사회생활의 기본은 너무 튀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는대로 다 받아먹지 않는 것이니까.
"하하, 김세희 연구원께선 제 방문을 탐탁치 않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어떤 분의 전언을 전해드리기 위해 직접 마중을 나왔을 뿐입니다."
"이런 장소에서 말입니까?"
"당연히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배정받으신 숙소까지 바래다 드리면서 '전언'에 대해 얘기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바깥에 대기중인 차량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세희는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며 호국을 돌아보았다.
경호 팀장을 메신저로 사용할 만큼 높으신 분이 전할 말이 있다면 그건 필시 자신이 아닌 가드-079가 대상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나서는 게 다소 주제넘어 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멍청한 가드-079에게 맡겨둘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심한 오지랖이었지만 그래도 나선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뒤쪽의 그 분은......?"
이번엔 경호 팀장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세희는 그제야 자신들만 이곳에 온 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이, 이 쪽은 그러니까......"
"제 소지품이요."
"소지품...말씀이십니까? 어딜 어떻게 봐도 기동타격대 대원으로 보입니다만."
"소지품 등록까지 했는데요."
"잠시 확인을......"
경호 팀장은 방탄복을 껴입은 정장 안섬에서 자그마한 기계 하나를 꺼내 신입에게 갖다댔다.
신입의 가슴팍에는 '소지품'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TF 고유의 통관 번호가 QR 코드와 함께 부착되어 있었다.
다행히 기계는 이상없이 신입을 '소지품'으로 인식했으며, 문제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호 팀장도 설마 사람을 소지품으로 신청해서 데려올 거라곤 예상치 못 했는지 포커페이스에 쩍쩍 금이 갔다.
하지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허가를 받았으니 소지품으로 인정된 것이다. 통관 관리는 모두 AI가 관리하고, 사람이 한 번 더 검사를 하는 방식이라 실수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안전을 위해서 무기는 소지할 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소지하고 계신 무기가 있다면 자진반납 해주십시오."
"뭐해 인마, 빨리 드려."
호국이 신입을 닦달하자 신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근육인지 풍선인지 모를 것으로 부풀어오른 가슴 안쪽에서 마술처럼 단검 하나를 꺼내 넘겨주었다.
"...진짜 있었네?"
"혹시 다른 무기도 있는 건 아닙니까?"
"있으면 지금 다 꺼내라."
호국이 눈앞에서 주먹을 흔들며 으르렁대자, 이번엔 바지 안쪽에서 권총이 떡하니 나왔다. 호국이 익숙하게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 새끼 이거...설마 마약도 숨겨 온 거 아냐?"
"제발 닥쳐......!"
보다못한 세희가 호국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신입의 허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등 뒤에서 펄스 라이플 한 정이 툭 떨어졌다.
"......"
"......"
"......"
호국은 신입의 몸을 몇 번 더 두들겨보고는 이제 됐다는 듯이 해맑게 말했다.
"이제 없나봐요."
"...예, 그래보입니다."
경호 팀장은 옅게 한숨을 내쉰 뒤, 뒤에서 대기중이던 경호 요원들을 손짓으로 불러 신입의 양옆에 세웠다. 혹시 모르니 밀착 마크 하다가 수상쩍은 짓을 하면 바로 제압하라는 의미였다.
공항 바깥에 정차되어있는 리무진에 탑승하기 전, 자신을 존이라고 소개한 경호 팀장은 파티에선 절대 무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무기 소지를 허가받은 것은 오직 자기 방어 자격이 있는 FCD와 경호국 요원들 뿐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못 박았다.
그들을 태운 리무진은 FCD가 사용하는 1호 리무진이 아닌, 소장이나 대장급에게만 허가되는 2호 리무진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행은 쾌적한 리무진 안에서 잔뜩 들떠 있었다.
차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타고 흘러나온 수면가스가 세희를 재워버리기 전까지는.
예상과는 달리 가드-079가 가지고 온 '소지품'도 잠들지 않자 경호원 둘이 마취주사기가 든 권총을 꺼내들었다.
"실례지만 일행분을 잠시 재워도 괜찮겠습니까? 이 얘기는 아주 중요한 얘기라 김호국님에게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는 것치곤 이미 김세희가 먼저 잠들어버렸지만, 호국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여동생은 제대로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다만 신입은 목과 허벅지에 마취 주사가 두 방이나 꽂힌 것 치곤 여전히 잠들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경호원들의 목을 움켜쥐고 흡수한 마취액을 분사해서 둘을 잠재워버렸다.
"얘는 '소지품' 이니까 안 재워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군요. 김호국님께서 꽤나 신뢰하고 계신 것 같으니 더이상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훈련 강도가 끔찍하기로는 감찰관이나 개미부대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경호국 요원 둘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신입이 평범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한 경호 팀장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조금 뜬금없지만, 김호국님은 왜 잠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에너지 드링크를 마셔서요?"
"...기내식에 면역제를 섞어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그런 쪽으로는 조심성이 없으시더군요. TF의 일원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앞으로 그러한 것들도 경계하셔야 합니다. 바깥에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것은 함부로 먹지 말고, 신체 접촉도 자제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김호국님은 TF 내에서 반드시 '은폐'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잘 모르겠지만, 넌 이제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몸좀 사리라는 의미인 듯 했다.
'하긴, 김병장 그 놈도 병장쯤 되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고 누누히 말하고 다녔지.'
김병장이 말하길, 자기는 삼대독자라 작업 도중 재수없게 다쳐서 전역 하면 큰일나니, 후임들이 알아서 작업하라며 영내 구석으로 숨곤 했던 양반이었다.
높은 지위는 전역(은퇴)과 한없이 가깝고, 말년에 편해지려면 몸 조심해야 한다는 공식이 호국에게도 제대로 박혀 있었다.
"당연히 조심해야죠. 다음부턴 이 놈에게 기미 시키고 나서 먹을게요."
뭐든 잘 받아쳐먹는 신입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 준 호국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존은 마지못해 전언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길, 김호국님께선 현 시각을 기점으로 파티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시되, 반드시 파티에 참가하는 모든 참가자들과 한 번 이상은 만나라고 전하셨습니다."
"섬을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힘들겠는데요."
"참석자 명단을 드릴 겁니다. 그 명단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만나주시면 충분합니다."
존이 좌석 안쪽 비밀 서랍을 열어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서류 봉투 속에는 말끔한 컬러 화질로 프린트된 각 인물의 사진과 프로필이 들어있었다. 호국이 빠르게 훑어보니 명단에 기재된 사람의 수는 정확히 150명이었다.
다행히 요리사나 배송업자, 호텔 관리자 같은 일반 관계자들까지 만나봐야 하는 건 아닌 듯 했다.
"여동생분을 재운 것은 이 사실을 저희 말곤 아무도 알아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요?"
"ES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ES가 왜......?"
"하와이에 위치한 한 처리 시설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ES의 폐기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 사고가 발생해서 놈이 탈주했습니다. 놈은 희생양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완전히 똑같은 행동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필 고위 관료들이 많이 모이는 이런 자리에선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럼 그냥 죄다 하와이에서 내보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따지려다 존이 선수를 쳤다.
"TF에선 고위 관료를 이만큼 모으면 놈은 하와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최대한 감춘 채 파티 일정을 지속하기로 한 겁니다. 꽤 오래 전부터 정해진 겁니다."
"그냥 다 미끼로 쓰겠다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TF의 전통과도 같은 방식입니다. 혹시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익숙하지 않다기보다, 호국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일을 잘 해서 즐거운 파티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직장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섬에서 다짜고짜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이건 매사에 긍정적인 호국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파티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아서 온 건데요."
즉 이건 늬들이 준 합법적인 휴가가 아니냐고 넌지시 따지자 존은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사실 제 6 처리 시설에서 우수 직원으로 선정되어 참석하게 될 인물은 김세희 양과 이두근 씨였습니다. 왜냐하면 TF에서 매년마다 뽑는 우수 직원의 대상은 오직 '연구원'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경비네요......"
"예, 그러니 김호국님은 엄밀히 말하자면 단순히 파티를 즐기기 위해서 이곳에 오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건의 해결에 힘써주실 몇몇 분들과 함께 덤으로 파견된...보충 인력? 같은 느낌입니다."
그 순간 호국은 자신의 발치앞에 훈련용 수류탄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그럼 저는 파티를 즐길 수 없다는......?"
"물론 즐기셔도 됩니다. 3일 안에 150명을 일일이 다 만나보시고, 그들 중 누군가의 거죽을 빼앗아 뒤집어 쓴 ES를 찾아내시면 남은 시간 동안 파티를 즐길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재단 직원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찾아내기만 하셔도 충분하니,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여동생이 함께 하지 않는 자신은 이렇게나 멍청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호국이었다.
어디 베어갈 코가 없어서 IQ 84 짜리 경비의 코를 베어간단 말인가.
때마침 리무진이 한 호텔 앞에 도착하고, 호텔리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TF에선 귀하의 아낌없는 협력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호국은 진지하게 자신의 승진을 재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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