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그 남매의 파티 즐기는 법(3) >
제 2 연구 시설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 크리스 기어링은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 1 연구 시설이 완전히 박살나고, 그 콧대 높은 최고 수석 연구원이 쥐도새도 모르게 잠적해버려 잠깐이지만 즐겁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제 제 1 연구 시설의 전성기는 완전히 저물어버린 해였으며, 자신이 이끄는 제 2 연구 시설이야말로 떠오르는 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최고 수석 연구원의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확 줄어, 그의 오랜 고민이었던 스트레스성 탈모가 약간이지만 호전되는 기쁨도 만끽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스트레스성 탈모가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요 근래 좀 잠잠하다 싶었더니만,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제 6 처리 시설 놈들 때문이야.'
세면대 앞에 선 크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칫솔질을 해대며 자신의 훤한 이마와 정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M자 탈모가 온 건가 싶었는데, 의무관에게서 스트레스성 탈모 진단을 받고 어떻게든 치료를 하고자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인류는 여전히 탈모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 했다. 필요하면 새로운 장기도 갈아끼울 수 있을 만큼 의학이 발전했으면서, 탈모 만큼은 치료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르르르! 퉤! 또 빠졌군, 빌어먹을."
가글을 끝낸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두피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인공 머리카락이라도 심을까 생각했지만 그래선 자존심이 서지 않았다. 가발을 쓰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어느 날 갑자기 풍성충이 된 자신을 보고 부하들은 겉으론 칭찬일색이겠지만, 뒤에선 결국 탈모가 부끄러워 머리를 심었다느니, 가발을 썼다느니 하고 손가락질 할 게 뻔했다.
"대체 왜 그 임무를 실패하지 않았던 거지?! 대체 왜!!"
홧김에 수건을 내던진 그는 분에 못이겨 주먹으로 세면대를 쾅쾅 내려쳤다.
약 한 달 전쯤부터 계속된 제 6 처리 시설의 독주 상황. 그 중심엔 신입 연구원이자 오퍼레이터인 김세희와 가드-079라고 명명된 김호국이 있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다른 시설의 소장들과 협력해서 각종 어려운 연구 협력들을 밀어넣었건만, 밀어넣는 족족 성공해버리는 게 아닌가.
특히 압권이었던 것은 제 6 처리 시설에서도 알아줄 만큼 호전적인 6-01의 어금니를 뽑아달라고 했더니, 무려 하루도 되지 않아 퀵 배송으로 받았다.
6-01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절대로 혈액이나 신체의 일부를 자신의 몸에서 흘리지 않는데, 다른 연구원들은 멍청하게도 그걸 어떻게 뽑았냐며 극찬하기 바빴다.
'쓸모없는 것들.'
수완이 좋은 놈들은 본인이 거부해도 결국 높은 자리에 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높으신 분들이 직접 찾아가서 '해주십사'하고 부탁하면 마지못해 떠맡는 척 웃으면서, 권력을 휘어잡을 게 뻔했다.
출세에 방해가 되는 놈들은 싹이 자라나기도 전에 땅을 파헤쳐서 그 씨앗까지 불태워버려야 하건만, 아직 정치질에 익숙치 않은 범생이들은 그런 당연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음."
크리스의 개인 룸 앞에서 칼 같은 45도 인사를 보내오는 남자의 이름은 최성환이었다.
크리스가 직접 제 2 연구 시설의 차기 연구소장으로 점찍었을 만큼 눈치 빠르고 일도 빠릿빠릿하게 하는 사내였다.
그는 생긴 것 처럼 얍삽한 성격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제 분수를 파악할 줄 알고, 계산에 철저했다. 쉽게 말해서 눈치가 빨라 실로 이상적인 부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연구밖에 할 줄 모르는 범생이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크리스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최근 성적이 부실한 것만 빼면.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준비가 끝났나?"
"예. 한 시간 전에 야간 근무자들과 교대하면서 인수인계를 확실하게 끝마쳤습니다. 오늘도 제 2 연구 시설 무사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좋아, 좋아. 자네에게 관리를 맡겨둔 보람이 있어. 연구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은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단 말이지."
"이게 다 연구소장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원 사람도 참, 아침부터 늙은이 얼굴에 금칠해주기는."
일전의 정기 본부회의에 크리스 대리로 참석시켰던 그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후계자를 갈아치워야 하나 생각했었지만, 그의 꾸준한 노력에는 한 수 접어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최성환 만큼 자신의 방식을 잘 따라오는 연구원들이 없기도 했다.
"오늘은 자네에게 단순히 연구소장 대리가 아닌, 진짜 연구소장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지."
"...영광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파티' 참석을 위해 하와이로 갈 예정이지만, 그 전에 자네에겐 3급 보안등급이 아닌 2급 보안등급이 필요하겠지."
크리스는 자신의 품속에서 2급 연구소장 전용 보안카드를 꺼내 최성환에게 넘겨주었다.
규정상 높은 보안등급의 직원이 부하에게 보안카드를 양도할 수 있는 상황은 긴급상황밖에 적용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시설에서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한 시설의 책임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행하는 일인 만큼, FCD도 비밀리에 보고를 받아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해주는 것이다.
"내가 파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자네가 이 시설의 연구소장이자 총책임자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단 하나의 사고한 실수조차 용납치 않겠습니다."
"뭘,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사는 법이지.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으니 긴장 풀게. 그저...내가 파티에 참석해있는 동안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일만 없으면 돼."
"명심하겠습니다."
최성환은 마치 왕에게서 왕관을 물려받은 왕자처럼 감격에 젖은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철두철미한 인간이라도 결국 눈앞에 주어지는 거대한 황금덩어리 앞에선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법.
크리스는 피식 웃어보이며 VIP 경호를 위해 파견된 기동타격대 소대와 함께 시설을 떠났다.
그와 함께 페어로 참가하는 인물은 최근 크리스와 개인적인 '면담'을 자주 갖게 되어, 사내 시즌 평가에서 이상할 정도로 높은 실적을 받은 한 여성 연구원이었다.
연구소장의 권한으로 연구 결과 보고서의 책임자 이름만 슬쩍 바꾸면 관리봇조차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완전히 시설을 떠났을 때, 최성환은 감격에 젖은 황홀한 표정을 싹 지웠다.
"늙은이가 힘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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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라후 아크바르 외치고 싶다!"
"큰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이번 파티는 하와이에서 열린다고 해, 부득이하게 제주 공항으로 향한 호국과 세희는 기동타격대의 경호하에 재단 전용 항공기에 탑승했다.
세희는 옷의 구김이나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커다란 캐리어에 포장된 드레스를 넣어 탑승했지만, 호국은 도착해서 갈아입는 것도 귀찮다며 이미 정장을 갖춰입은지 오래였다.
머리에 터번과 스카프를 착용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정장핏 잘 살린 남성이었겠지만.
"잘도 그 꼴로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네요."
한 칸 떨어진 옆좌석에 앉은 세희가 노골적으로 거슬린다는 듯이 쏘아붙이자 호국은 어깨를 으쓱였다.
"시설에서부터 기동타격대 사람들이 우리랑 같이 왔으니 당연히 통과 되지."
사실 기동타격대도 처음 호국의 꼴을 봤을 땐 당장 터번과 스카프를 벗으라고 했지만, 호국은 벗길 수 있으면 벗겨보라는 식으로 배를 째버렸다.
결국 누구도 호국의 중동 테러리스트 패션을 저지하지 못 했고, 그는 정장에 터번, 스카프를 매우 특이한 복장으로 항공기에 탑승한 것이다.
정장 상의를 열어젖히는 순간 폭탄 조끼라도 나오면 혀를 까무러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모든 장비를 시설에 반납해두고 나왔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애새끼인데, 매뉴얼은 쓸데없이 잘 지킨단 말이야.'
세희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가 근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신지혜의 주장을 재차 이해했다.
신지혜와 드레스에 어울릴 법한 장신구를 확인하면서 가드-079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눴는데, 꽤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도 이쯤되면 슬슬 생얼 한 번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본인 외모에 자신이 없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힐끔힐끔 곁눈질 하면서 터번과 스카프 사이로 보이는 가드-079의 눈매를 확인한 그녀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보통 신기하다고 느껴질 만큼 못 생긴 사람들은 눈매만 봐도 못 생겼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안와 구조가 매끄럽지 않으면 딱 티가 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탐색하려는 그녀와는 반대로, 호국은 자신의 옆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 신입 1호와 땅콩내기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신입이 주먹을 내고 자신이 가위를 내면, 가위는 주먹을 이긴다! 라는 괴상한 논리로 신입의 주먹을 씹어버렸다. 그리고 스튜어디스가 가져다 준 땅콩은 모두 그의 입에 들어갔다.
파티에 초대된 것은 2인 페어 한정이었을텐데 어째서 신입이 그들과 함께 있느냐고 하면, 프롯이 호국의 개인 경호를 위해 신입을 '소지품'으로 등록하고 파티에 가져가도 되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층부에선 관리봇으로 등록된 프롯이 직접 신청한 물건들이니 문제없다고 판단하여 스무스하게 통과시켜버렸고, 놀랍게도 신입은 소지품으로 인정되어 동행이 허가된 것이다.
재단 역사상 희대의 빡대가리 경비 가드-079, 그 가드-079의 여동생이자 입사한지 반년도 안 되어 승진한 초신성 루키 김세희, 그리고 정체불명의 신입 1호.
광란의 파티에 결코 후달리지 않는 파격적인 라인업이었다.
결국 여행길의 경호를 위해 파견나온 기동타격대 대원중 한 명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호국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가드-079님. 실례가 안 된다면 그쪽의 동료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 부하요."
"아니, 복장이 우리 기동타격대 복장인데......"
"몰라요. 어디서 훔쳐 입었나 보죠."
"......"
그러면 더 큰일인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게 정상이었지만 기동타격대 대원은 빠르게 질문을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랑스러운 기동타격대의 아이덴티디인 전투복과 헬멧을 경비 나부랭이가 뒤집어 쓰고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하필 상대가 그 유명한 가드-079인지라 강하게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당장 벗으라고 항의했다간 또 벗길 수 있으면 벗겨보라는 식으로 나올 게 분명했다. 차라리 엮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세희는 오랜만에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콧대를 높이며 호국을 찔렀다.
"자기 부하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는데도 복장 하나 편하게 입게 해주질 않네요. 아주 젊은 꼰대가 따로 없다니까."
"경비팀 관리를 내가 하지 네가 하냐?"
"저도 일단 4급 선임 연구원이라 경비원보단 높은 직급이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 생각해주는데 직급이나 부서가 뭐가 중요해요? 우리 경비팀장님 참 인간미 없으시네~"
"하긴 힘든 일을 안 해봤으니 경비에 대해 알긴 뭘 알겠어. 감수성이 부족하신 우리 '4급' 연구원의 오지랖을 내가 이해해드릴 수 밖에 없지."
호국이 자신의 3급이라고 떡하니 쓰인 보안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그대로 맞받아쳤다. 결국 팀장급보다 후달리면 찌그러져 있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세희가 아니었는지라, 그녀는 반대로 코웃음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거리처럼 늘어놓았다.
"입사 2개월도 안 되서 진급한 제가 그쪽이랑 같은 '3급'이 되려면 얼마 안 걸릴텐데, 그때는 얼마나 더 쪽팔리시려고 그러시나 몰라요? 저처럼 똑똑하고, 사회 생활 잘 하고, 상사에게 예쁨 받는 사람의 진급 속도를 따라올 수는 있겠어요?"
"못 따라가면 도로 끌어내리면 되는데?"
"......"
"사람이 올라가는 건 어려워도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더라. 원한다면 밑바닥부터 다시 구경시켜줄게."
"이 사람이 진짜......!"
-승객 여러분들 잠시 후 이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 착용 확인 및 전자기기 사용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직장 동료(남매)를 태운 항공기가 하와이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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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그 남매의 파티 즐기는 법(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