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그 남매의 파티 즐기는 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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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이 TF에 입사한지 정확히 90일째의 날이 밝았다.
어느덧 여름도 한풀 꺾이고,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이 찾아와 말뿐만이 아니라 인간들까지 살찌우기 시작했다.
"스페이드 2, 클로버 2. 난 다 털었네?"
"...어떻게 알았어요?"
"뭐가?"
"내가 일부러 카드 겹친다음 빠르게 바꿨는데 어떻게 오른쪽이 조커인 걸 알았냐고요."
호국은 뭘 대수롭지도 않은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네 손보다 내 눈이 빨랐으니까 알았지."
"...짜증나."
"그래도 내기는 내기인 거 알지? 오늘 저녁 당번은 너다."
호국은 무사히 2개월차를 넘기고 3개월차에 접어들었으며, 세희는 이제 막 1개월차를 넘어 2개월차에 진입한 참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했던 6-321 조사 임무를 성공으로 수행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둘은 종종 휴식시간에 만나 다음 업무에 대해 얘기하거나, 클래식 게임으로 여가를 즐기곤 했다.
다만 호국의 속내를 알고 있었던 연구원들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마다 측은한 눈빛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호국은 여전히 세희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녀와 만날 때에는 항상 모자와 방탄 고글을 겸한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미필이었던 오빠와 군필인 오빠 사이에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 했던 세희는 노골적인 연기에도 홀라당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세희를 속이면서 종종 골탕을 먹이는 것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라, 호국은 최근 들어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평생 남을 트라우마를 안겨주겠다는 무시무시한 집념 하나로 2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를 코앞에서 속여왔다. 이제 그 결실을 맺을 때가 머지 않았다.
세희가 툴툴대며 카드를 집어던지고 조리실로 향하자, 프롯이 슬그머니 이어셋을 통해 호국에게 말을 걸어왔다.
-역시 그 '한 방'을 노리고 계신 겁니까?
"맞아. 그 '한 방'이야."
호국이 히죽 웃으며 자신의 스마트패드에 도착한 메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제목 : TF 산하 제 6 처리 시설 소속 3급 경비팀장 김호국 님을 '파티'에 초대합니다.
-발신자 : TF FCD 겸 최고 위원회 소속 제임스 마커스
-내용 : 귀하는 TF 소속의 일원으로서 매우 뛰어난 업무 성과 및 근무 태도를 선보였으며, 올해 하반기 사내 평가 시즌에서 당당히 1위의 성적을 쟁취해 타의 모범이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에 최고위원회가 주최하는 특별한 파티에 귀하를 초대하고자 하오니, 부디 사양마시고 참석하여 좋은 인연들을 알아가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파티의 마지막 이벤트로 시상식이 준비되어 있으며, 귀하는 시상 대상이니 짧막한 소감이나 연설을 준비해오는 것을 권장합니다. 귀하에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TF 일동-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일 전쯤에 이 메일을 받았다.
사내 평가 시즌은 약 한 달에 걸쳐 행해졌는데, 각 시설마다 우수 직원을 두 명씩 뽑아서 파티에 초대하는 것이 TF의 오랜 관례였다고 한다.
TF 산하에 소속된 시설은 연구 시설과 처리 시설을 제외하고도 몇 개인가 더 있지만, 최근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 최종적으로 뽑힌 우수 직원들은 50명 정도라고 들었다.
물론 호국은 다른 이들에 대해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말도 못 붙일 만큼 똑똑하고 우수한 사람들을 자신이 신경써봐야 뭘 한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제 6 처리 시설에서 자신과 함께 우수 직원으로 뽑힌 김세희였다.
'상상만 해도 기분 째지네.'
조금 멍청한 줄로만 알았던 동료 직원이 사실은 우수 직원으로 뽑힌 자신의 오빠였다는 사실을 알면, 자존심 강한 여동생은 필시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날 동안 호국에게 업무적으로 도움 받았던 일, 함께 여가 시간을 즐겼던 일, 시시껄렁 농담 따먹기를 했던 일 같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억울해서 우는 거 아냐?'
그때는 남들 앞에서 우는 여동생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며 이렇게 말해줄 작정이었다.
-인생은 실전이야. 여동생아.
결국 남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오빠이고, IQ 115도 IQ 84에겐 못 당한다는 말뚝을 박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도 여동생이 기껏 취직한 직장을 홧김에 그만두면 부모님에게 혼나는 것은 호국이 될테니, 호국도 어느정도 선은 지킬 생각이었다.
'너무 놀리면 부모님한테 일러 바칠테니까 딱 앗살라말라이쿰~ 까지만 하자.'
앞으로 2일 뒤면 파티 일정이다.
모든 사내 평가가 성공리에 종료된 덕분에, 지난 준비 기간 동안 괜찮은 성과를 보여준 사람들에겐 각종 성과금과 승진의 기회를, 그렇지 못한 자들에겐 감봉과 강등의 처벌이 내려졌다.
우수 사원으로 뽑힌 호국과 세희도 기회를 얻은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호국은 승진이 아닌 보너스와 연봉 인상을 획득했으며, 세희는 신입 연구원에서 4급 선임 연구원으로 승진했다.
값 치룰 거 다 끝났으니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상류층의 지체 높으신 분들은 꼭 우수 직원들과 밥 한 끼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이렇게 메일까지 보내며 파티 참석을 강권한 것이다.
덕분에 호국은 인연도 없던 맞춤 정장을 제작해야 했고, 이두근에게 따로 불려가서 '높으신 분들 앞에서 지켜야 할 예의'도 배워야 했다.
이는 자신의 사회 생활에 큰 변환점이 될 것이란 걸 호국도 모르지 않았다.
세희는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 때문에 마냥 기뻐하는 눈치였지만, 호국은 무조건 좋은 점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천장의 벽이 열리고 CCTV가 탑재된 기계팔이 내려와 호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롯은 최근 이런식으로 CCTV가 달린 기계팔을 이용해 상대를 직접 관찰하는 등, 다소 인간적인 면이 늘었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높은 자리에 있으면 좋잖아. 돈도 많이 주고, 다들 날 잘 대해주고."
-하지만 이번 사내 평가에서 우수 직원으로 뽑히셨음에도 승진 기회를 거부하셨잖습니까.
"그건 내 자리가 아니니까."
본래 호국은 이번 일을 계기로 2.5 등급(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등급이지만)에 해당하는 제 6 처리 시설 소장 대리인 겸 경비단장을 맡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호국은 일언지하에 TF 상층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두둑한 성과금과 연봉 인상을 받아냈다.
"내가 비록 멍청하지만 눈치가 없지는 않아. 정말 중요한 자리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 군대에서 그런 사례를 많이 봤으니까."
능력은 쥐뿔도 없는 놈이 꼴에 장성이랍시고 별을 달고선 전방 부대를 괜히 들쑤시질 않나, 쏘가리놈은 뭐가 그리 자존심이 강한지 시도때도없이 병사를 무시하면서 시비를 걸질 않나, 특히 가관인 것은 진급에 아주 미쳐있는 영관급 인간들이었다.
능력이 없으면 없는대로 만족하고 살 것이지, 꼭 아랫 사람들을 닦달해가며 여럿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바로 능력 없는 사람들이 진짜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면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런 놈들이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탓에 진짜 빛을 봐야할 인재가 묻혀버리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부하들도 의욕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호국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귀영화중에서 '부'를 가장 좋아했으니까.
으리으리한 집, 직접 가꿀 수 있는 텃밭, 자신의 멍청한 꼴통에도 딱 맞는 최신형 VR 기기, 그리고 한 명의 국민으로서 성실납세자였다는 자랑스러운 기록.
그것만 있으면 충분한데 대체 분수에도 맞지 않는 것들을 왜 거머쥘 필요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가드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린 거지. IQ 84에 변변찮은 자격증도 없고, 경력도 없는 놈이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잘 한 거잖아."
한편으로는 이런 자신이라도 너보다 대단하다는 식으로 여동생을 놀릴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호국은 자신의 수준을 잘 알았다.
그냥 일을 잘하는 것과, 중요한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사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정치질을 하고 싶지 않아.'
사내 자식이 패기 없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정치질이란 건 꼭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악랄한 능력이다.
인간은 이르면 초등학생부터 정치질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학창시절의 정치질이라고 해봐야 사실 왕따나 괴롭힘에 가까워서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의 정치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마주하는 온갖 인간군상들의 정치질이란, 독사와 독충이 드글거리는 정글 한복판에서 총칼을 겨누며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그게 끔찍하게 혐오스러워서, 호국은 일부러 대학도 가지 않았다.
경비팀장인 자신이야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결국 경비다. 그러니 엘리트 연구원들 입장에선 넘을 수 없는 벽의 차이를 만끽하며 호국을 정치질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터.
하지만 여기서 호국이 더 나아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런 일로 여동생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고.'
한심하게도 세희는 아직 4급 선임 연구원이라 다른 엘리트 상대로 계급에 의해 짓밟힐 우려가 있었다.
그러니 호국이 한 발 물러서서, 적당히 세희를 골려먹으며 그녀가 자신에게 걸맞는 높은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어차피 자신은 적당한 돈만 벌면 퇴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호국의 생각을 대략적으로나마 눈치챈 프롯은 자신에게 인간과 같은 몸이 없는 것을 또 한 번 아쉬워 했다.
인간의 몸이 있었다면 지금쯤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기계로 이루어진 몸밖에 없는지라 노골적인 한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일을 너무 잘 합니다. 일을 잘 하는 인간은 결국 높은 지위와 그에 걸맞는 대우를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지?"
-......
IQ 84로 생각해둔 것은 일단 승진 기회가 오면 연봉 인상과 성과금으로 대체한다는 계획 뿐이었다.
그 이상은 사고의 회전 능력이 후달리는 탓에 미처 생각해두지 못 한 호국이었다.
그래서 프롯은 차선책을 제시하며 호국에게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드 본인의 성과를 모두 여동생 분에게 밀어주는 겁니다.
"어뷰징(Abusing)을 하자고?"
쉽게 말해서 김호국(Lv.99)이란 캐릭터를 이용해 김세희(Lv.1)라는 캐릭터를 키워주는 행위. 옛 시대의 게임을 많이 접해본 호국은 프롯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박에 이해하고, 경악했다.
"그건 안 돼. 내 양심이 찔리잖아."
-당당하게 부정 행위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합리적인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거래라면?"
-여동생분에게 성과를 밀어주는 대신, 여동생 분에게 돈을 뜯어내는 겁니다.
다소 어휘가 과격하긴 했지만, 여동생의 돈을 뜯어낸다는 말에 호국의 귀가 솔깃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정당하게 일해서 획득한 업무를, 내가 돈 받고 팔겠다는데 양심이 찔릴 이유가 없지."
-바로 그겁니다. 여동생 분은 원하는대로 높은 지위를 획득해서 좋고, 가드는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호국은 옳다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IQ 84의 팔랑귀가 또 다시 초지능 AI에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저는 가드가 한 일을 여동생분이 해낸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낼 수 있는데다, 돈을 세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매우 건전하고 깨끗한 거래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내 개인 비서라서 다행이야."
그 날은 호국이 미래 계획을 살짝 바꿔, 여동생의 통장에 '합법적으로' 빨대를 꽂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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