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5) >
-거기서 좌회전! 아니, 좌회전이라니까! 좌!!
"왼쪽에 산성 달팽이 있잖아! 이 멍청한 지지배야!!"
-그 피지컬로 그거 하나 못 피해?!
"더럽잖아!"
-좀 더러워지면 어때! 이미 더 더러워질 것도 없는데! 그리고 거기서 좌회전 안 하면 패턴 또 봐야 하잖아. 굳이 먼 길로 돌아가겠다고?!
"원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그것도 적당히 급할 때나 잠시 숨 돌리라는 의미에서 쓰이는 말이고!
"하지만 저는 이미 우회전 급커브로 부스트 게이지를 채웠죠? 이제 빨간 부스트 파란 부스트로 바꾸면 되는 각이죠?"
-언젯적 게임 얘기를 하고 있어! 진짜 짜증나!
호국과 세희는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면서도 '힘드니까 그만두겠다' 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약 3시간에 걸친 6-321 탐험 끝에 둘의 호흡이 생각보다 잘 맞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 가끔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가? 정말 호흡이 잘 맞는 사람들과 팀을 짜서 엄청나게 어려운 보스 몬스터를 잡기 직전인 상황까지 가는 것.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끝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 마지막에 뻥 하고 터뜨릴 흥분과 성취감이 자꾸만 간질거리는듯한 느낌. 그것이 둘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다.
-전방에 오리!
"나도 봤어!"
다급한 상황이 닥칠때마다 둘은 사무적인 어조로 날선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워낙 급하게 말을 하다보니 가끔씩 서로에 대한 예의를 생략해버리는 것이다.
호국이 레이저 포인터로 오리를 찍어주자 농사왕이 오물 투성이 속에서 건진 쇳조각을 비수처럼 던졌다.
파앙! 낡고 더러운 오리 인형이 수면 위에서 슬금슬금 접근하다가 '패턴'을 발동시키지도 못 하고 터져버렸다.
호국과 세희가 지난 3시간 동안 하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이 지옥같은 장소는 특정 구역마다 특정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패턴을 단 하나라도 맞추지 못 하면 6-321의 '본체'에 접근할 수 없는 구조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기억력과 눈썰미가 좋은 호국이 평소처럼 혼자 다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턴은 매 순간마다 바뀌었고, 그 패턴이 발동하는 시간이나 장소, 매개체를 전부 분석해서 새로운 패턴을 파악해내는 것이 바로 세희가 맡은 임무였다.
"오리 터졌고!"
-전방 수면에서 거품 올라오고 있죠? 뒤쪽 철창이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저 거품을 뚫고 올라오는 건 콘돔 날치떼가 아닐 가능성도 있어요. 반반이긴 한데 이번엔 오리 인형 패턴을 안 봤으니까 아닐 확률이 좀 더 높아요.
호국은 철창이 내려오느냐, 내려오지 않느냐와 수면 위로 거품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연결점을 찾지 못 했다. 상대적으로 응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희는 콘돔 날치떼와 마주치려면 반드시 오리 인형이 먼저 튀어 오르는 패턴을 봐야한다는 사실과, 다른 통로의 철창이 내려왔느냐 아니냐를 따졌다. 이번에는 철창이 내려오지 않았지만, 오리 인형 패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콘돔 날치떼가 아닐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플라스틱 크랩이다!"
부글부글, 거품을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엄청난 수의 콘돔 날치떼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거대 게였다.
이 시시각각 변하는 미로 속에서 수면 위로 거품이 떠오를 때면 거의 십중팔구는 콘돔 날치떼가 뛰어올랐는지라, 플라스틱 크랩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호국은 세희에게 모든 분석과 예측을 떠맡기고, 순수하게 패턴만을 기억했기 때문에 플라스틱 크랩에 대한 단순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오른쪽 집게발에서 대포 발사!"
호국이 외친 것과 동시에 보트에 탑승한 인원 모두가 마치 짜고 친 것 처럼 보트의 왼쪽에 무게 중심을 실었다.
그러자 보트가 당장이라도 전복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각도로 기울어지고, 한발 늦게 발포된 고철 포탄이 보트의 우측 하부 측면의 빈 공간을 뚫고 날아갔다.
처음에 저걸 피하지 못해 보트의 정면에 달아둔 전등이 박살나고 농사왕의 볏짚 가슴에 포탄이 반쯤 박혀버렸다.
-피했어요?
"피했어!"
-다음 패턴은 뭔데요?!
"몸통박치기!"
전등이 깨지자마자 불빛이 사라져 플라스틱 집게는 순식간에 암살자 못지 않은 은폐 능력으로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었다. 물론 그 겁대가리 없는 행위는 밤눈이 좋은 호국에게 발각당해, 농사왕의 곡괭이 찍기에 의해 무마되었다.
-이번엔 보트가 타격을 입지 않았으니까 몸통박치기를 하면 큰 효과를 보지 못 해요! 분명 다른 공격을 할 거예요!!
만약 보트가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 위태로운 모습을 연출했다면 플라스틱 크랩은 그대로 보트를 들이박은 뒤, 유유히 뒤쪽 길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원래 그쪽으로 향하려고 했다는 것 처럼.
하지만 보트는 멀쩡했고, 플라스틱 크랩은 새로운 패턴을 선보일 때에 당도했다.
-조심하세요, 혹시 차탄을 쏠지도 몰라요!
이미 오른쪽 집게에서 대포를 발사한 놈이니, 당연히 원거리 공격 수단은 유효할 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2회째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플라스틱 크랩의 왼쪽 집게가 부르르 떨리더니, 악어의 주둥이처럼 쩍 벌어졌다. 거기서 튀어나온 것은 놀랍게도 화염방사기였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는데, 이 지옥같은 곳에서 패턴을 '공략'하는 조건은 적에게 유효타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처음 플라스틱 킹크랩에게 전등이 박살난 것은 유효타를 당했으니 패턴 공략에 실패한 것이고, 조금 전에는 여유롭게 회피했으니 공략에 성공한 셈이었다.
만약 이번 화염방사기 패턴에서 보트가 불에 그슬린다거나, 탑승 인원들중 누군가가 불에 탄다면 그 공략은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날카로운 쓰-루 슈-팅!"
호국은 이곳까지 오면서 보트에 한가득 실어두었던 각종 오물덩어리. 그중 유독 끈적거리고, 구멍 같은 곳에 집어넣으면 아주 꽉 막아버릴 것 같은 물건을 집어 던졌다.
철퍽!
검은 진흙 비스무리한 오물 덩어리가 플라스틱 크랩의 왼쪽 집게 사이로 노출된 노즐 입구를 꽉 막아버렸다.
고철 포탄을 발포하던 오른쪽 집게의 주포였다면 택도 없었겠지만, 하필 가스불 위로 연료를 내뿜어야 하는 노즐이 막혀버리면 답도 없었다.
호국의 유치하지만 정확한 임기응변에 노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플라스틱 크랩은 당황하다가 결국 게거품을 내뿜으며 저절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적이 패턴 실행에 모두 실패했으니, 자동적으로 공략이 된 것이었다.
-휴, 아슬아슬했네요.
"솔직히 방금 건 내가 다 했다. 인정?"
-또 이상한 소리 하시네. 내가 안 알려줬으면 화염방사기 쏘는 거 어떻게 피하려고 하셨는데요?
"신입 쉴드 쓰려고 했지."
정확히는 신입으로 자신의 몸만 가리게 해서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계획이었다.
-신입씨도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좀 해보세요. 진심으로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으세요?
호국이 슬쩍 눈치를 주자 신입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까지 척 세우는 걸 보니 아주 호국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봤냐? 나 이렇게 대접받는 사람이야~"
-어휴, 앓느니 죽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부하를 방패막이로 쓸 생각을 해요.
"우리나라 군인들도 총알받이 취급받는데 뭘."
-그러니까 남들한텐 더더욱 잘해줘야죠. 그게 다 업보로 쌓인다는 거 몰라요?
"업보는 네가 매일 몰래 먹는 초콜릿이 뱃살 업보로 쌓이는거구요~"
-그, 그걸 어떻게......!
프롯이 알려줬지만 호국은 절대 프롯이 알려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럤다간 여동생이 프롯까지 경계해서 더이상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을 테니까.
더 놀리고 싶다. 그리고 저 여동생이 지금껏 부들부들 떨며 화를 삭혔던 존재가 사실은 오빠인 자신이었음을 알리며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다. 그건 틀림없이 짜릿한 유열(愉悅)로 다가올 것이리라.
'가능하면 그때 여동생 옆에서 또 깐족거려야지.'
호국의 정체가 드러나는 날, 그녀는 어린 시절을 여동생에게 깔려 지내왔던 오빠의 설움을 헤아리게 될 것이다.
들뜬 기분 속에서 호국은 완전히 가라앉은 플라스틱 크랩 위로 보트를 몰았다. 철창이 한 번에 3개가 내려오면 패턴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직은 안정권이었다.
"여기서 우회전 맞지?"
-정확히는 우회전 하는 척 하면서 급커브로 좌회전이죠.
철창이 하나도 내려오지 않은 완전 개방 상태일때는 섣불리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해선 안 된다. 어느쪽을 택하든 일정한 범위 내에 보트가 들어서면 반드시 철창이 내려오면서 패턴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호국은 신들린 보트 운전 기술로 우회전을 하는 척 하다가, 엔진 출력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급커브를 때려박아 좌측 통로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호국 일행이 탄 보트가 우측 통로로 들어오는 줄 알고 먼저 오른쪽 철창이 내려왔다.
하지만 철창은 반드시 순서대로 하나씩 떨어지는 구조였기 때문에 보트는 이미 좌측 통로에 진입한 뒤였다.
뒤늦게 좌측 통로의 입구에도 철창이 떨어져 내렸지만 보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롭게 개척한 길로 나아갔다. 이 타이밍을 맞추려고 무려 5번이나 뺑뺑이를 돌았다.
호국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철창이 떨어지는 타이밍이나, 철창이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냈다. 그리고 세희는 보트가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최대 출력과 최고 속도, 호국의 반응 속도 시간을 초 단위로 체크해서 계산했다.
한 명이 패턴을 알려주면 다른 한 명은 패턴을 면밀히 분석하고 계산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야생동물처럼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호국에게는 매우 힘든 과제였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세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똥장어다."
잠수함의 잠망경처럼 수면 위로 빼꼼 머리를 내민 것은 호국이 특이한 이름을 붙인 장어 비스무리한 생물이었다.
플라스틱 크랩보다도 더 출현이 적었던 놈인데, 무려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호국의 기억 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 만큼, 게다가 똥장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아주 지독한 상대였다.
-이번엔 잘 하세요.
"나도 알아."
똥장어. 저 놈은 수면 위를 떠다니는 오물덩어리를 칠성장어처럼 생긴 흉악한 입으로 낚아채서 삼킨다.
호국이 일부러 보트 위에 오물덩어리를 한가득 쌓아둔 이유도 세희가 '똥장어의 깜짝 등장에 대비하라'는 충고 때문이었다.
저 똥장어놈은 빌어먹게도 처리하려들거나 회피하려들면 모든 패턴 공략을 무효화시켜버리는 아주 악랄한 놈이었다.
호국은 중요한 순간에 똥장어가 또 등장할 게 뻔했으니 세희의 충고를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보트가 똥장어와 충돌하기 전, 호국은 오물을 한 웅큼 퍼서 똥장어의 입에 던져주었다. 캐치볼하듯이 오물을 받아낸 놈은 만족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거기서 방심했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한층 더 감각을 끌어올렸다.
한 놈이 사라지고나니 두 놈이 새로 올라와 또 다시 오물을 받아먹고 사라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셋, 다음에는 넷까지 올라왔다.
마치 볼링핀 같은 구조로 나타났던 똥장어들이 모두 오물을 받아먹고 사라졌을 때, 호국은 아무것도 없는 하수관의 벽이 쩌적, 하고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드디어 마지막이네요.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열심히 일했더니 배고파."
-...그 꼴로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는 상상이 돼요?
"난 식사 거르면 수명이 단축돼."
호국에게 식사와 화장실은 VR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두 사람이 의미없는 논쟁을 이어가는 사이, 신입 1, 2호는 슬그머니 보트의 방향을 바꿔 측면의 구멍으로 인도했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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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