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냄새(2) >
"진짜 여름에 놀러간다는 건 다 옛말이네."
한강이 비록 피서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풍경이 제법 괜찮은데다 도심 속에서도 피크닉을 즐길 수 있어 배드 초이스는 아니었다.
그저 가상 현실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이 땡볕에 한강까지 기어나가서 피크닉을 즐기느니, 모든 것이 갖춰진 가상 현실 속에서 즐기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호국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한강에 기어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겠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한강 피크닉을 포기한 덕분에 자리가 널널했다.
-이렇게 보면 꼭 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특등석을 전세 낸 것 같지 않습니까?
"푹푹 찌는 여름에 전세를 내면서까지 이런 자리를 잡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데?"
호국이 텐트를 치면서 살짝 불만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프롯이 졸라서 마지못해 나오긴 했는데 정말 상상이상으로 더웠다.
'내가 더위나 추위에 익숙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열사병으로 쓰러지고도 남았다.'
빠르게 텐트를 친 뒤 충전용 아이스박스를 그늘 속에 밀어넣고 차가운 음료를 꺼냈다.
김선열의 컬렉션 창고에서 슬쩍한 것들 중에서 논알콜 음료도 꽤 있었는데, 대부분 어른들이 가볍게 즐길법한 칵테일형 음료였다.
논알콜은 논알콜이지만 아이가 마시기엔 살짝 어른스러운 맛.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액체가 땀을 흘렸던 호국의 몸에 수분을 보급해주었다.
"흐으...그래도 나쁘진 않네. 항상 일에 치여 살다보니 어디 놀러가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고, 적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안주'했다고 판단한 순간 그곳이 곧 안식처이자 터전이고, 지켜야할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내가 제 6 처리 시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
집보다 더 집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호국은 하루라도 ES 들과 만나서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두근이 휴식을 명령했음에도 호국은 곧잘 ES들과 어울리곤 했던 것이다.
애초에 휴식과 업무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유도 있었다. 자신이 정말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업무를 가장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그게 햇갈린 탓에 살짝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밖으로 나와보니 알겠어. 난 그냥 일에 미쳐 있었던 거야.'
당연히 의무감이나 책임감도 있었겠지만, 그 이전에 호국에게 제 6 처리 시설의 경비 업무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중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만 가상 현실을 즐기지 못 하는 호국에게 놀이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남들이 가상 현실에서 뛰노는 것을 유뉴브 스트리밍 방송으로 구경하거나,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진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시청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호국도 가상 현실에서 비현실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제 6 처리 시설에서 새롭고 다양한 것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빠져들지 않는 게 이상했다.
확실히 지금의 호국에겐 여유가 필요했다. 일에 너무 미쳐있던 나머지 스스로를 돌보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걸 눈치챈 프롯이 직접 이런 시간을 마련해준 것이리라.
호국은 자신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프롯(해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해피의 외형은 겉보기엔 조금 추한 안드로이드였지만, 프롯의 설명에 따르면 안드로이드이면서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라고 한다. 때문에 호국에겐 진짜 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런 종류의 휴식은 긴 세월 동안 중노동에 지친 노인들에게나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래?"
-예. 노인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귀농을 하며,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술을 홀짝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자신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은 편하고 느긋하게 보내고 싶다, 그것이 정형화된 겁니다.
"그럼 나도 노인인가?"
-가드는 그저 과한 업무에 지쳐있을 뿐, 아직 살 날이 '아득히' 많이 남아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재도전을 포기한 노인들과 재도전이 언제든지 가능한 젊은이는 엄연히 다릅니다.
즉 지금 호국이 만끽하고 있는 피크닉겸 휴식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역시 똑똑한 놈은 생각하는 것도 남다르며, 속으로 프롯을 개인 비서로 두길 잘 했다고 생각한 호국이었다.
다시금 논알콜 음료를 홀짝이며 땀일 식히고 있을 무렵, 호국은 문득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챘다.
"여어."
대뜸 오글거리는 말투로 인사를 건넨 사내는 호국의 기억 속에 똑똑히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트리플 3!"
"그냥 333번이라고 불러! 내가 무슨 WWE 프로레슬링 선수인 줄 알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호국이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그는 태클을 걸면서도 실실 웃으며 자연스럽게 호국의 옆에 앉았다.
물론 뱀처럼 움직인 그의 손은 호국이 그늘 속에 놔둔 아이스박스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에 그런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면 덥지 않아요?"
"덥지, 아주 더워서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물좀 얻어마실 수 있을까?"
"음료수랑 술 밖에 없지만 원하는 걸로 골라 드세요."
호국은 자신이 묻기도 전에 이미 손을 뻗치고 있는 그를 향해 아이스박스를 밀어주었다.
기쁜 얼굴로 아이스박스를 열어젖힌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호국과 아이스박스를 번갈아보았다.
"이 미친놈아! 세상 천지에 이런 걸 피크닉에 챙겨오는 놈이 어딨어?!"
"그냥 술이랑 음료수잖아요."
"너 인마...이거 제조년도 안 보이냐? 라벨만 30년산이라고 붙어있을 뿐이지 제조년도는 50년 전이라고!"
그렇다면 김선열은 적어도 20년 전, 그러니까 호국이 한창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을 때 30년산 위스키를 구입했다는 말이 된다.
"좋은 거예요?"
"당연히 좋지! 지금 애주가들에게 이거 내밀면서 값좀 잘 쳐달라고 하면 꽤 받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걸 아이스박스에 넣어서...피크닉에 가져와?"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호국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곤 눈치를 보았다. 표정 변화가 참 다채로운 인간이었다.
"그, 그런데...이 쩌는 걸 내가 마셔도 될까? 한 잔, 아니. 한 방울만 마셔도 이득이긴 한데. 우리가 비록 구면이긴 해도 이제 겨우 두번째 만남이잖아? 그런데 대뜸 이런 걸 마셔버리면 그건 너무 양심이 없는 게 아닐까?"
"괜찮은데요. 어차피 저도 조금 있다가 여기서 술이나 까려고 했거든요."
"진짜 이걸...이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마시려고 했다고? 기껏 30년산 위스키를 20년이나 더 묵혀서 귀해진 이걸...? 그랬다간 풍미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텐데?!"
"맛만 좋으면 되잖아요."
"당연히 맛이야 쩔겠지! 도합 50살 먹은 위스키가 얼마나 대단한건데! 물론 내 나이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놈이긴 하지만...젠장, 마시고 싶어서 죽겠네."
고민하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영락없이 육포를 앞에 둔 강아지 같아서 호국은 위스키 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프롯에게 내밀어서 "따." 라고 명령했다.
프롯의 입속에서 튀어나온 오프너가 위스키 마개를 시원스럽게 따버리자, 30년간 숙성되었던 위스키의 향이 확 퍼져나왔다.
게다가 통짜 30년도 아니다. 30년산을 20년이나 더 묵혀두었으니,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을지라도 왠지 풍미가 더 굉장한 것 처럼 느껴졌다.
호국이 내린 평가는 '향이 괜찮네' 였지만, 경악스러운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333번은 침을 질질 흘리기에 이르렀다.
"컵...컵...아니지. 이런건 위스키 전용 잔이 필요한데...빌어먹을! 잔이 없어!!"
"그냥 쭉 들이키세요."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당장 병나발을 불고 싶어 안달이 난 것 처럼 보였다.
이미 마개를 열어버린 이상 위스키의 풍미는 실시간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지금 마셔두지 않으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불로불사의 삶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 같았다.
게다가 호국이 전혀 아까워하는 눈치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333번에게 가해지는 유혹의 중압감은 마치 친구가 자신에게 로또 1등 당첨권을 맡긴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수백년 간 다져진 인내심은 이미 탈인간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어느샌가 호국에게서 받아든 30년 숙성 위스키를 병나발 불고 있었다.
애주가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333번의 목을 조르면서 '어떻게 그 따위 예법으로 이 귀한 술을!' 하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굶주렸던 333번에게 30년 숙성 위스키의 유혹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좆이나 까잡수라지! 예법이 밥 먹여주냐?!'
진정한 애주가는 술 한 병을 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우선 그 술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을 연출하고, 최고의 풍미를 느끼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결정한다. 거기에 술 한 잔, 한방울까지도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예법을 철저하게 익힌 뒤 마침내 시음하는 것이다.
'지금 내 목구멍으로 더럽게 비싸고 더럽게 귀한 술이 들어가고 있는데 그까짓 것들이 다 뭐야!'
행복하다.
25년간 반전세계에 갇혀있다가 겨우 빠져나와, 세상의 모든 행복이 압축되어 있는 것 같은 술이 혀에 닿은 순간부터, 미친듯이 쏟아져나오는 도파민에 뇌가 절어버렸다.
불로불사인데,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던 시간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술이 그의 목구멍을 넘었을 때였다.
"...아."
아쉽다는 생각보다 큰일났다는 생각이 앞섰다.
'미친 놈! 네까짓 게 뭐라고 이제 두번째로 만나는 애가 준 술을 혼자 다 퍼마셔?!'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행복과 흥분은 빠르게 식었다. 눈에 띄게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은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333번은 조용히 술병을 내려놓은 뒤, 잔디밭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저를 노예로 써주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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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타겟 확인했습니다."
한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의 벤치에서 등산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3자가 보면 그냥 걷다가 지쳐서 잠시 쉬고 있는 50~60대 노인이었지만, 입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상당히 젊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아,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만,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 한 남성이 타겟에게 접근했습니다."
귀 속에 장착된 초소형 이어셋에선 '훼방꾼인가?' 하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노인으로 변장한 사내는 딱 잘라 부정했다.
"훼방꾼이라고 하기엔 접근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심지어 타겟과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 적대 세력이 보낸 공작원이라면 저런 게 가능할리가 없습니다."
'신원확인을 위해 얼굴을 촬영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는 자신의 눈 대신 장착된 전자의안의 장착된 고성능 렌즈 배율을 조작했다.
"얼굴 촬영했습니다."
잘 쳐줘도 20대 후반, 조금 박하게 평가하면 30대 아저씨로 보이는 서양인이 미친듯이 술을 마시는 순간 얼굴을 촬영했다.
사내가 촬영한 정체불명의 남성에 대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상층부에 전송되어 면밀하게 분석될 터.
하지만 사내는 이미 타겟의 주변 인간관계를 남김없이 조사해뒀기 때문에 저런 서양인이 타겟의 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타겟은 전형적인 영어울렁증 한국인인데다 사회성이 그리 좋지 않아 주변관계도가 아주 형편없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외국인 친구?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구성이었다.
여차하면 저 서양인의 뒤를 캐보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 이어셋을 통해 기계음 섞인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즉시 이탈하라! 상대는 콘스......!
"무슨...컥!!"
퍼석!
찰나의 순간, 잔디밭 근처에서 섬광이 반짝인다 싶더니 날카로운 무언가가 사내의 미간을 관통했다.
그것은 콘스탄틴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룬 문자가 새겨진 과도 크기의 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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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냄새(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