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행보관(3) >
체육 특기생인 강혁준은 어린 시절부터 육체의 강함이야말로 원활한 사회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름길임을 깨달았다.
우선 강인한 육체를 지닌다면 쉽게 시비가 걸리지 않으며, 예의를 지켰을 뿐인데도 상대는 과할 정도로 배려(양보)를 해준다.
법치국가에서 남을 두들겨 패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깟 육체의 강함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 일단 단련된 신체는 혹시 모를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자구책이 된다. 자기방어, 정당방위만 고수하더라도 강인한 육체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한 발 더 뻗는다면? 딱히 법을 어기는 건 아니지만 예의를 지키는 것도 아니라면?
대부분의 힘없는 일반인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한 수 접어준다. 사나운 맹수를 발견한 초식 동물처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다.
딱히 미친놈마냥 아무나 붙잡고 공격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고, 고개를 들지 못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혁준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법을 어기지 않는 비매너, 선을 넘지 않는 위협, 양심과 도덕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일은 혈기왕성한 그에게 끝없이 자극을 주었다.
"야, 혁준아. 너 오늘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괜찮겠냐?"
"괜찮아 인마! 이 형님이 술좀 마셨다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거 봤냐? 다음 날 해장국 한 그릇 조져주고! 운동 빡세게 하면 그만이야~."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만큼 대회 일정이 다가올 때마다 컨디션 관리는 칼같이 해야 하지만, 강혁준은 여차하면 '약'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불법 스테로이드 같은 것이 아닌, 대회 규정상 검출되어도 문제없는 지방 분해 약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운동좀 해주면서 페이스 유지만 해주면 탄탄한 몸은 한결같이 유지된다.
오늘은 과 동기인 남녀 6인조로 1차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동동주를 벌써 몇 사발이나 퍼마셨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전은 적어도 세 접시를 먹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속이 살짝 더부룩한 것을 느낀 강혁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다시 신나게 달려서 이 모임으로 오늘 끝을 볼 작정이었다.
건강한 육체! 자신에게 맞춰주는 동기들!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친화력! 이미 능력, 학벌, 교류 관계까지 모든 것을 갖춘 강혁준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로 뒷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의 팔을 치고 말았다.
'어이쿠.'
취기가 돌아서 실수를 해버렸다는 건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강혁준은 그것을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당황하는 일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사과하기만 하면, 상대는 짜증을 내더라도 금세 알아서 쭈그러들테니까. 젊은 사람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웃으며 사과하려던 강혁준은 문득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기분 나쁜 개 안드로이드와 등산복 차림의 늙은이를 보았다.
'아니, 여기가 무슨 산악동호회 회식 장소도 아니고, 늙은이가 여기까지 기어들어와서 술을 마시고 있어?'
빈정 상한 이유는 없다. 그냥 늙은이를 보자마자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버린 강혁준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망발을 내뱉고 말았다.
"아, 술맛 떨어지게 가게에 왜 이딴 것들이 있어?"
당장 고물상에 갖다 팔아도 이상하지 않을 고철 안드로이드, 등산으로 체격을 괜찮게 다졌을 뿐인 늙은이, 그리고 그 앞에서 띠꺼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또래 청년.
확실히 강혁준의 기준에서 이 가게에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오랫동안 넘지 않으며 잘 유지해왔던 선을 넘어버렸다.
"할아버지. 여긴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이나 와서 노는 곳인데 등산복을 입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산악동호회 회식을 하시려면 꼼장어 집이나 가시든가~."
뒤에서 들려오는 동기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강혁준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색다른 반전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분위기 메이커라고,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씨발놈이 가정 교육을 사이다 헌터물로 배웠나."
"...뭐?"
건배를 하려던 자세 그대로 술잔을 들고 있는 청년이 띠껍게 중얼거리자 강혁준은 갑자기 흥분이 싹 가라앉았다.
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나약해보이는 몸뚱아리를 가진 놈이 건방지게 불평을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 사람이 빡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라고들 하지 않나.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음에도 강혁준은 상대가 거슬리는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색을 했다.
"저기요, 내가 여기에 먼저 앉아있었는데 이 쉰내 나는 늙은이가 등에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 있었던 게 잘못된 거 아닙니까? 예? 제 말이 틀렸어요?"
일부러 늙은이가 앉아있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몇번 흔들어주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가면 보통은 설설 기면서 피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기어이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남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내보이는 특유의 허세 섞인 자존심이었다.
뒤에서 '오오오~'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게 손님들 태반이 대학생들이라 내심 이런 쫄깃한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하지만 막상 일어선 상대의 체격은 슬렌더에 가까웠고, 키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눈빛이 날카롭다는 것만 빼면 강혁준에게 한주먹감도 안 될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귀가 납작한 것도 아니고, 주먹에도 굳은 살 같은 건 안 박혀있는데? 이 새끼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복싱 선수나 유도 선수였다면 강혁준도 살짝 긴장했으련만, 상대의 피부는 남자치고 깨끗했다. 쉽게 말해서 고생해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왜? 한 대 치시려고? 이야, 사람이 실수좀 했다고 치려고 하네. 이거 무서워서 저 같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겠습니까?"
이렇게 슬슬 신경을 긁어주면 상대는 참다 못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럼 정당방위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컷 두들겨 패줄 수 있었다.
대회 준비하는 놈이 쌈박질하면 안 된다고? 요즘은 정당방위 법안이 크게 강화되어서 그럴 걱정은 없었다.
과거에는 도둑이 들어도 제압한 집주인이 실형을 살았다면, 지금은 도둑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도 큰 처벌을 받지 않는 시대였다. 길거리 싸움도 마찬가지다.
"꼬우면 한 대 쳐보세요. 특별히 가드 안 하고 맞아드릴게. 아, 한 대는 너무 적나? 두 대로 할까요?"
뒤에서 '남자답게 한 대로 끝내자!' 하고 누군가가 외쳤다. 분위기는 이미 자신에게 넘어왔으니, 기선을 제압했다고 판단한 강혁준은 한층 더 여유로운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 보았다.
이 놈이 주먹을 휘두르면 좋고, 휘두르지 않고 꼬리를 말면 더더욱 좋다. 어느 쪽이든 자신은 손해볼 것이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 옆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강혁준의 고막을 긁었다. 그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말투로.
"얘야, 너 그러다 피똥 싼다."
"허 참."
자신에게 피똥이라니. 늙은이가 분수도 모르고.
이 상황에도 태연하게 술에 젖은 전을 집어먹고 있는 늙은이의 태도는 강혁준의 심기에 몹시도 거슬렸다.
그렇다고 먼저 주먹을 쓰면 안 된다. 비록 자신이 먼저 선을 넘었을지라도 가해자로 끝나면 안 되는 게임이니까. 이미지란 건 그만큼 중요했다.
"아, 자세히 보니 이거 조합이 좀 이상한데? 술에 미친 늙은이 하나에 멸치 같은 놈, 그리고 깡통 안드로이드? 혹시 요양원 직원이세요? 늙은이가 이 밤중에 술 마시고 싶다고 보채니까 등산복 입혀서 데리고 나오셨나? 효자네 효자! 찾아오지도 않는 불효자들보다 훨씬 더 효자야!"
한껏 비아냥댄 강혁준은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고철 안드로이드를 발로 툭툭 건드려주었다.
"그리고 이건 뭐...어디 2~30년 전에나 굴려먹던 구형 경비견 안드로이드인가? 하긴 요양원 늙은이들 지키려면 이정도가 딱 적당하지. 고급 제품을 쓰기엔...너무 아깝잖아? 세금 낭비지, 세금 낭비!"
휘이이익!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르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들 술에 취해서 분간이 잘 안 되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쯤 되면 슬슬 상대가 액션을 취하겠다 싶어 곧바로 반격하기 위해 준비한 순간.
강혁준은 갑자기 옆구리에서 열기가 화악 퍼지는 듯한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어......?"
자신의 옆구리엔 쇠젓가락이 절반 정도 박혀 있었다.
복근을 아무리 단련해도 옆구리 만큼은 쉽게 단련할 수 없어,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도 큰 약점으로 꼽히는 게 바로 옆구리다. 거기에 쇠젓가락이 박히는 건 복싱 선수가 아니라 건달도 생각 못할 일이었지만.
"어, 으, 어어......?"
젓가락이 자신의 옆구리에 박혀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옆구리에 고압 전류가 들어온 것 처럼 끔찍한 고통이 흘러들어왔다.
"어이쿠! 이거 치매가 와서 그런가...알콜 중독 때문에 손이 떨려서 그런가...나는 거 잘 모르겠지만서도...이 늙은이가 뒈질 때가 다 되서 그런거니 젊은이가 이해 좀 해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말투가 확 바뀐 늙은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강혁준의 옆구리에 박혀있던 젓가락을 비틀어 뽑았다.
동시에 수도꼭지가 터진 것마냥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꺄아아악?!"
"저, 저 씨발...미친!!"
"신고! 경찰에 신고해!!"
누군가가 스마트 폰을 들어올렸으나 곧바로 비수처럼 날아든 쇠젓가락이 스마트 폰을 꿰뚫었다.
"119부터 부를 생각을 해야지 경찰을 부르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안 그러냐?"
자신의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 무릎 꿇은 강혁준에게 늙은이가 막걸리 병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마냥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얘야, 내가 방금 네 목숨 살려준거니 너는 자손대대로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 제삿밥도 낭낭하게 준비하고. 알겠지?"
"이, 이이...미친 새끼가아아......!"
"뒈지려면 뭔 말을 못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이니 너 같은 놈 묻어버리려고 아까운 시간을 쓸 수는 없잖느냐. 그러니 지금이라도 좋은 말로 할때 대가리 박고 사과하면 한 번은 넘어가주마."
"조오오옷까......!"
"원 녀석, 고집도 참."
병나발을 불어 막걸리를 꿀꺽꿀꺽 들이킨 늙은이는 입가를 스윽 닦고는, 발로 강혁준의 뒷통수를 내려 찍었다.
딱딱한 지면에 안면부터 처박힌 강혁준은 대단한 근육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방에 혼절해버렸다.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도 운이 아닌, 상대가 봐준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
호국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대를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부모가 홀수여서 그런지, 아니면 안드로이드식 가정 교육을 받은 건지, 상대가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기에 가볍게 손좀 봐주려고 했더니만.
막상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조원석이 먼저 손을 써버리자 오갈데 없어진 주먹은 결국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욕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조원석과 호국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폭력은 조원석이 먼저였지만, 시비는 저쪽이 먼저 걸었던 것이다.
장난이나 실수라면 모를까, 악의를 품은 고의적 시비는 두 사람 모두 쉽게 넘기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깝치면 강냉이가 털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게 남자들의 땀내나는 암묵적 합의 아닌가?
"저야 손을 안 썼으니 상관없는데, 어르신은 괜찮으시겠어요? 군인이 민간인 건드렸다는 거 알려지면 엄청 피곤하실 텐데."
쓰러진 놈을 옆에 두고 태연하게 다시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술에 젖지 않은 전을 마저 집어먹었다.
가게 주인과 점원까지 달려나왔지만 그들도 주변의 구경꾼들처럼 이도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시비 걸던 머슬가이는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주변 사람들은 비명이나 욕설을 내뱉으며 난리를 피워대고 있는데, 정작 소란을 일으킨 주범들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네가 건드렸으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됐을 거다. 내가 대신 건드려준거니 감사하게 생각해라."
"하긴, 저야 이제 출세길만 남은 청춘이니 어르신이랑 다르게 잃을게 많죠~."
"얼씨구? 너 원사 연금 무시하냐?"
"10년분 연금은 받으실 수 있겠어요?"
"30년도 거뜬하다 이 새끼야."
두 사람이 낄낄대며 축배를 드는 사이,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들은 조원석이 내민 카드 하나를 받아들고는 말없이 근육돼지만 싣고 나가버렸다.
그것은 보안등급이 2등급 이상이었던 전직 재단 직원 중에서도 극소수에게만 발급되는 면책 특권이 새겨진 보안 카드였다.
'필요했다면'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재물 손괴를 입혀도 체포 및 기소되지 않는 특수한 면책 특권이었다.
신분증처럼 조회하기만 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소위 블랙 카드 취급을 받는 귀물을 지니고 있었으니 경찰들이 근육돼지만 끌고 나간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이 장소에 있었던 모든 민간인들은 곧 재단에서 사람을 보내 기억을 지울테니,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2차는 어디 갈거냐?"
"꼼장어 집이나 갈까요?"
---------
< 경비 업무 일지 : 행보관(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