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진실의 파편(2) >
해피가 자신의 주둥이로 호국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호국은 해피를 잠시 뒤로 제쳐두고 자신이 먼저 앞으로 향했다.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 호국은 행보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는 빡대가리지만 기억력 하나는 기똥차게 좋으니까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전략전술을 통째로 외워라.
호국이 행보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때마다 들었던 얘기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예상할 수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라고 꼬집었던 것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미처 예상치 못 한 것은 설마 그런 전술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에 허점을 찔리는 것이라면, 아예 모르는 것은 적 앞에서 알몸으로 멍청하게 서있는 것과 같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국은 가르침을 받으면 받는대로 모조리 외웠다. 전술교본도 외우고, 실제 전투 상황이 녹화된 동영상을 하루종일 보면서 초 단위로 외우고, 정규군, 민간용병, 테러리스트들끼리 사용하는 독자적인 암구호나 수신호, 전투 방식도 모조리 습득했다.
아무리 멍청해도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대응책을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적의 기습에 허무하게 당하진 않을 거라는 논리였다.
'현장에선 특히나 이성적인 생각보단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지.'
그게 '다리'가 이끄는대로 무작정 움직이라는 뜻은 아니겠지만, 호국은 본능적으로 판단해서 지금은 '다리'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드레날린이 미친듯이 쏟아져나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엄청나게 긴장해버린다. 근육이 확 굳어버리기 때문에 혈류를 압박해서 인상이 창백해지지만, 일시적으로 광전사가 된 것 처럼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다.
거기에 이성적인 계산이 끼어들면 안 그래도 긴장한 몸이 계산을 따라가지 못 하고 자꾸 주춤거리게 된다. 그러니 본능이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게 맞다.
탁! 타앙!
호국은 코너를 돌자마자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눴던 총구를 주먹으로 처올렸다.
"큭?!"
누군가의 짧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설마 자신의 매복 기습이 간파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시계 확보가 안되는 공간에서, 엄폐물 없이 기습을 하려면 코너에서 매복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전술도 전부 외워두고 있었기 때문에 호국은 자연스럽게 전술의 파훼법을 그대로 실행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도 첫 기습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는지, 총구를 다시 내리는 대신 재빨리 권총으로 스왑해서 호국을 노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매복에 대비하고 행동한 호국이 한 발 더 빠른 것은 당연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권총을 뽑아들기 위해선 일단 팔이 한 번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걸 원천봉쇄하는 방법은 그냥 처음부터 권총을 쥔 손목을 움켜쥐면 그만이다.
아래에서 들어올리려는 힘과, 위에서 짓누르는 힘이 맞붙으면 당연히 짓누르는 힘이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으니까.
호국의 악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치챈 상대는 권총을 뽑는 것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팔꿈치의 방향이 호국에게 향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밀어붙여 가슴팍을 찍으려는 속셈인 듯 했다.
'무기를 바꾼다는 생각에서 즉시 무기를 포기하고 근접 격투로 전환하는 방식이 굉장히 빠르고 자연스러워. 훈련좀 받아본 사람이구나.'
이토록 물흐르는 듯한 전투방식 변경은 일반적인 군인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상대의 전투 숙련도가 낮지 않음을 파악한 호국은 가볍게 발을 한 번 굴렸다.
쾅!
발로 지면을 한 번 내려친 순간 공격 신호를 수신한 해피가 맹렬한 속도로 튀어나와 상대의 다리를 물었다.
"끄으아아아아?!"
금속으로 이루어진 튼튼한 악관절이 사내의 다리를 물어뜯자 살점 절반 정도가 뜯겨나갔다. 핏줄과 근육까지 한 번에 뜯겨나갔으니 대출혈을 피할 수 없으리라.
"이, 이 놈은 또 언제......?!"
"경비도 있는데 경비견이 없을리가 없잖아."
물어뜯긴 다리에 힘이 빠진 상대가 무릎을 꿇자 호국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힘껏 무릎을 차올렸다. 날카롭게 치고 올라간 니킥은 정확히 상대의 턱에 꽂혀 경추를 박살내버렸다.
"그르륵...크으으......"
목뼈가 부러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즉사를 하는 건 아니다. 신체의 가장 중요한 기관중 하나인 뇌가 살아있다면, 사내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 출혈량이면 30분도 못 버티겠는데.'
상대의 무장을 빠르게 해제한 호국은 그를 복도에 방치해두고 계속 움직였다. 해피는 입에 남아 있던 살점을 삼키려다, 호국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퉤' 하고 뱉어냈다.
"몇번이나 말하지만 입맛을 함부로 버리면 안돼. 좋은 사료 냅두고 왜 그런 걸 먹어?"
해피는 여전히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호국의 주의를 어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곧 자리를 벗어났다.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전력만 공급되어도 행동에 지장이 없지만, '바이오'적인 부분을 늘리기 위해 꾸준한 열량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료보다 신선한 인간의 살점과 피가 더 도움이 되었다.
해피의 사정을 알리가 없는 호국은 먼지 투성이 지면을 내려다보며 꾸준히 족적을 살폈다. 조금 전에 기습을 가했던 사내는 처음부터 벽 옆에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에 족적을 확인하는 것도 소용없었지만, 다른 좀도둑들은 다를 것 같았다.
'굳이 동료 한 명을 뒤에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는 건 급한 용무가 있다는 거지.'
실제 전투 상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원군이 부상병이나 VIP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극소수가 전장에 남는 경우도 있다고 배웠다. 그들이 뒤에 남아서 적들의 진격을 방해하면 그만큼 시간을 벌어다주는 셈이니까.
B80에서 도망칠 장소는 없으니, 이 경우는 도망치려 한다기보단 무언가를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테러리스트들이나 써먹는 방식인데?'
가령 꼭 사살해야 하는 VIP나 파괴해야 할 거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테러리스트들은 적은 인원과 한정된 무장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가 자폭 테러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 남아서 시간을 벌어주며, 마지막엔 붙잡히거나 사살당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는 방식.
행보관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쳤던 테러리스트들의 방식이었다.
-테러리스트! 그 놈들은 아주 악질이다! 내가 현장에서 한창 뛰고 있을 때만 해도 그 놈들과 몇번이나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중요한 건 그 놈들은 제 목숨을 파리보다도 가볍게 여긴다는 건데, 그런 주제에 윗대가리 명령은 안드로이드만큼이나 잘 따른다는 거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겠냐?
당시 호국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테러리스트는 적을 엿먹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니 놈들을 상대할 때는 항상 극단적인 전투 방식에 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설명했으니 그 꼴통으로 알아들었겠지?!
무심코 이해했다고 대답했다가 그럼 한 번 설명해보라는 말에 벙어리가 됐었다. 물론 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호국은 문득 걷다말고 이곳의 지형이 아주 거지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단순히 돌고 도는 코너가 많아서 그냥 그런 지형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순식간에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좀도둑들의 족적도 갈라진 것이다.
'세 방향으로 나뉘었어.'
조금 전에 제압한 좀도둑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족적은 네 명과 기계 한 대분.
거기서 두 명과 기계 한 대는 중앙으로 이동했으며, 나머지 둘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어느쪽으로 움직이더라도 적과 조우하게 되겠지만, 그보다 호국은 이 좀도둑들의 우두머리를 잡고 싶었다. 좀도둑의 우두머리를 역으로 인질로 잡아버린다면 자연스럽게 잔당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을 터.
예로부터 적 지휘관을 사로잡거나 사살하는 게 가장 큰 공이었듯이, 호국또한 철저하게 적들을 정신적으로 꺾을 생각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상관이 붙잡힌 걸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해피, 안에 들어있는 거 뱉어."
호국이 옆구리를 통통 두들겨주자 녀석은 마지못해 적재함 덮개를 열었다. 마치 트로이 목마에 숨어든 병사들마냥 안에 갇혀있던 플라스틱 병사들이 차례차례 빠져나왔다.
이 전투광인 플라스틱 병사들이 신나는 전투를 앞두고 굳이 해피의 옆구리 적재함에 숨어있었을리는 없고, 보나마나 해피가 저택에서 작업중이던 그들중 몇 명을 집어삼킨 것이리라.
"오른쪽 길과 왼쪽 길로 도망친 적 잔당들이 있어요. 가서 한 명씩 처리하면 딱 맞겠네요? 그쵸?"
해피의 옆구리에서 튀어나온 열 명의 플라스틱 병사들이 좋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럼 준비하시고...땅!"
출발 신호를 터뜨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광기서린 비명을 내지르며 갈랫길로 달려나갔다. 꼭 침략자들을 사냥하러 가는 인디언 전사들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네 몸도 좀 가벼워졌겠다, 넌 나랑 같이 가서 우두머리 조지자."
지금 스트레스 수치를 시각화하면 해피의 스트레스 수치는 하늘을 뚫을 듯 했으나, 호국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플라스틱 장난감을 소화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아있는 중앙의 길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니 머지 않아 어둠이 흐릿하게 시야를 방해했던 연막이 걷혔다. 저들이 가지고 온 연막탄이 다 떨어진 게 분명했다.
한층 더 선명해진 시야로 어둠 속을 주시하던 호국은 두 명의 인간과 한 대의 기계가 남긴 족적이 거대한 벽 앞에서 끊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거대한 벽은 유일하게 기과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지 않았는데, 다만 중앙에 소용돌이 속의 '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면 버튼이겠거니 싶어서 눌러보기라도 했으련만, 무언가를 끼워넣어야 하는 구조라 호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삽질 오브 듀티 이후로 오랜만에 가슴 한켠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고구마를 먹는 기분이구나!'
앞으로 한 걸음이면 되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가 부족해서 진행이 막히는 상황. 호국은 이 답답함을 시원하게 뚫어버릴 것이 필요했다.
괜히 음각 문양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혹시 벽이 얇아서 파괴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힘껏 두들겨 보기도 했다. 해피에게 몸통박치기를 명령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건 덤이었다.
"이익...! 이게 무슨 퍼즐 같은 거라면 밸런스가 안 맞는 거 아냐?! 그런 건 IQ가 세 자릿수인 사람들한테나 내놔야지!!"
꼭 이럴때만 사고가 정지하는 머리를 붙잡고 몇분 간 벽 앞에서 서성이던 호국은 혹시 문양 자체에 힌트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어드벤쳐 영화를 보면 꼭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 했던 힌트가 튀어나왔었다.
호국의 '눈'과 소용돌이 속의 '눈'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순간, 벽이 거대한 진동을 일으키며 좌우로 갈라졌다.
호국은 벙찐 얼굴로 갈라진 벽을 바라보았다.
"무슨 홍채 인식 잠금 장치도 아니고......"
< 경비 업무 일지 : 진실의 파편(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