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개미지옥(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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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곳,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저 편이 보였다.
그것이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면 뇌가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 맞다면 지나치게 모순적이다. 인간의 손으로도 닿을 수 없는 곳은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천체학자들은 허블 망원경을 빌리고, 저 멀리 날려보낸 위성으로 사진을 찍는다.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가까워지길 원하며,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무한한 호기심과 학구열로 점칠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닿을 수 없는 것을 바로 지척에서 느끼고, 볼 수 없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담을 수 있는 존재는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대단한 인간? 멋진 인간? 아니면.......
쾅!
화장실의 거울에 냅다 이마를 들이박은 후에야 호국은 꿈이었던 것 같은 광경 속에서 깨어났다. 때문에 이마가 살짝 찢어져 붉은 선혈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 자다가 화장실 거울에 머리통 처박는 건 전 세계에서도 나밖에 없지 않을까?"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난 거울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호국은 이내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화장실에 비치된 퍼스트 에이드 킷(First Aid Kit)에서 소독약과 반창고를 꺼내 살짝 찢어진 이마를 치료했다.
일전에 카지노에서 콧수염 신사로부터 받은 회중시계를 꺼내보니 시간은 아직 새벽 4시였다.
야간 근무를 하지 않는 날은 보통 밤 늦게까지 스마트패드를 두들기다가 잠드는 호국이었기에,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른 아침에 업무가 따로 정해져 있는 날이라고 해도 새벽 6시에 일어나는 게 가장 빠를 정도.
"흐으으, 하아아아......!"
늘어지게 하품을 했지만 그건 다시 한 번 잠들기 위한 준비동작이 아니었다. 이미 완전히 깨어난 정신에 맞춰 육체도 하품 한 번으로 피로를 떨쳐냈다는 신호였다.
대체 언제 경비 전용 기숙사 화장실까지 올라왔던 것인지. 호국은 가늘게 뜬 눈을 꿈뻑이면서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왔다.
바로 어제 완성된 B40의 새로운 사무실 겸 호국의 프라이빗 룸.
언제까지고 차가운 바닥에 침낭만 깔고 자는 건 조금 그래서 농사왕과 장난감 군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뚝딱 만들었다.
디자인은 어딜 어떻게 봐도 컨테이너 박스 였지만, 내부에는 제대로 침낭을 놓을 수 있는 따뜻한 바닥과 PC를 놓을 수 있는 책상, 그리고 식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도 있었다.
흡사 아파트 경비원이 거주할 것 같은 작은 보금자리에 호국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장비를 챙겨 입었다.
매우 드물게도 이른 새벽에, 화장실 거울에 머리를 처박으면서 깨어났지만 그것말고는 평소와 거의 다르지 않다.
하필 깨어난 시간이 애매한 시간인 만큼, 호국은 다소 이른 출근 준비를 마쳤다.
개미부대에서 슬쩍해온 검은 작업복을 입고, 권총이나 진압봉을 빠르게 뽑아들 수 있는 그립감이 좋은 장갑을 착용하고,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면서 공구함을 허리에 착용하면 끝.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경비 김호국, 가드-079다.
"오늘은 유난히 조용하네."
평소였다면 민감한 '귀'가 이런저런 소음들을 잘 걸러내서 호국의 고막에 처박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부터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는 카지노의 소음이라던가, 먹이를 달라고 소리치는 황금 알 낳는 닭들이라던가, 모니터룸에서 커피를 타마시며 야간 근무자와 교대하는 연구원들이라던가.
그런 일상적이면서도 듣기 거북하지 않은 소음들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하루의 아침을 시작하는 게 평소의 호국이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지금은 일체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시설 내에 가득한 설비들이 기계음을 내뱉고는 있지만 그건 인위적인 소음이 아니라 자연속에서나 느낄 수 있는 배경음이나 다름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피곤하면 귀도 파업을 하는 거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던 호국은 이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간 거점의 게이트 입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려있었다는 점을 눈치채기 전 까지는.
"...무슨?!"
깜짝 놀랐다. 나름 강심장이라고 자부하는 호국이 인생에 있어 손을 꼽을 만큼 정말 엄청나게 놀랐다.
자세히 보면 중간 거점의 게이트가 어른 한 명이 앉아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무거운 게이트가 도로 내려오지 않도록 받쳐주는 금속 고정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힘겹게 설치해둔 무인포탑은 모조리 작동을 정지한 상태였다.
'내가 이걸 몰랐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감각 하나 만큼은 야생 동물 못지 않게 민감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이 이 난장판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만한 사태가 벌어졌다면 비상벨이 울려퍼지던가, 프롯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호국을 깨우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호국을 깨워주지 않았다. 호국 역시 잠결에 이 소동을 알아차리지 못 했으니 어처구니가 없음을 넘어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몽유병 환자처럼 화장실에 처박혀 있을 때, 타이밍 맞춰서 누군가가 이곳으로 침투했다면? 그렇다고 해도 내가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돼......!'
물론 잠에서 깨기 위해 거울에 있는 힘껏 머리통을 처박아야 했지만, 그래도 소음이란 게 있었을 것 아닌가. 무슨 마취총 맞고 뻗은 코끼리도 아니고.
'어디부터 살펴야 하지?'
자신이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다니면서 대체 몇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일은 터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침입자를 확보하기 위해 아래로 향해야 하는가? 아니면 TF 직원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위로 향해야 하는가?
눈빛이 확 달라진 호국은 파직파직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CCTV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에도 한 번 CCTV가 깨진 적이 있어 방탄 카메라로 바꿨다고 들었는데, 그마저도 말끔하게 박살난 상태였다.
'귀의 상태는 안 좋지만 눈은 괜찮아.'
갑자기 청력이 확 떨어진 것 같은 귀와는 달리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사물을 확실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사실 불을 밝히려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충전기를 끼워두었던 호국의 스마트패드가 미충전 상태였으니까. 분명 전력을 차단당한 것이리라.
스마트패드를 몇 번 두들겨봤지만 어떠한 이유로 쇼크를 먹은 것인지 아예 작동이 되질 않았다. 이래선 프롯도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프롯은 내 스마트패드에 접속하지 못 해도 모니터룸의 시스템에 접속할 수는 있으니까. 사라지거나 하진 않아. 문제는 다른 직원들인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비상벨이 울리지도 않을 만큼 완벽하게 중간 거점이 뚫렸다. 그렇다는 건 이미 외부의 침투 세력이 모니터룸을 완전히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뒤늦게 가봤자 병신 호구 인질 한 명만 더 추가될 뿐이야.'
러시아식 제압법을 사용한다면 인질과 침입자 모두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겠으나, 호국은 그렇게까지 미친 놈은 아니었다.
호국은 자신이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작스럽게 이곳을 습격했던 진리교단에 대해 떠올렸다. 이번에도 같은 세력이 침투한 것인지, 혹은 그 세력이 침투에 성공했던 것을 보고 '이야, 여기 침투 맛집이네' 하고 몰려든 다른 세력일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준비를 잘 해왔다는 거야.'
중간 거점의 게이트는 파괴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육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력을 끊어버린 뒤 억지로 받침대를 밀어넣어 통로를 확보했다.
그뿐인가? 전력을 차단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능한 주변을 잘 정돈해두었다. 누가 이곳에 침투했는지 알아보지 못 하도록 손을 쓴 것이다.
만약 호국도 진리교단 같은 침입세력과 마주하지 못 했더라면 정말 누가 침입을 한 건지부터 의심했을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하필 이럴때 귀가 멀쩡하지 않아서 어떤 세력이, 몇 명이나 침투한 건지 모르겠어.'
이 '귀'라는 놈은 지금까지 호국이 무조건 원하는 소리만 정확히 잡아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호국도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아무렇게나 걸러낸 소리만 듣게 해주었던 탓에 호국은 반쯤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꽤 멀리 있는 소리까지 듣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그게 원천봉쇄당한 것 같아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질은 포기한다.'
자신의 멍청한 머리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 호국은 행보관에게서 배운 대로 움직이는 습관을 들였다.
지금 이 상황은 무리하게 모니터룸으로 올라가서 인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연구원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개방된 중간 거점 아래로 침투한 침입자들부터 제압해야 한다.
행보관의 가르침은 극한의 효율만을 추구하는 방식이 많았는데, 호국 역시 지금은 효율을 중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적들이 연구팀을 인질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려 했다간 호국도 같은 인질 신세가 될 수 있으니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호국도 인질을 잡아버리면 된다. 이 아래에 침투할 만큼 간덩이가 큰 놈이라면 틀림없이 공을 세우기 위해 촐싹촐싹 나대는 상급자일 터. 군대든 테러리스트 집단이든 조직 단위라면 그런 놈들은 무조건 존재한다고 배웠다.
'흔적을 잘 지웠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어.'
특유의 눈썰미로 게이트 주변을 살핀 호국은 하나씩 단서를 추려나갔다.
우선 굉장히 무거운 쇳덩어리가 이곳에서 뭔가를 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안드로이드일 것이며, 안드로이드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국가의 정규군, TF 기동타격대, 그리고 테러리스트 집단.
국가의 정규군이 이런 곳에 대뜸 쳐들어왔을리는 없고, TF 기동타격대가 왔다면 더더욱 호국이 알았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멀쩡한 문을 이런 식으로 열지 않는다.
'역시 테러리스트 집단이겠지.'
멍청한 호국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답. TF에 먹을 게 많다는 건 호국도 인정하는 바인지라 외부 세력이 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호국이 맡고 있는 직함이 경비 팀장이니 당연히 외세로부터 시설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호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제로 개방된 게이트 너머로 진입했다.
엘리베이터 역시 강제로 개방된 채, 그 앞에는 튼튼한 고정대와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이라면 망을 보기 위해 한 두명쯤은 로프 근처를 지키는 법이건만, 모두 아래로 내려간 듯 했다.
'아니면 망 볼 사람을 세울 여유가 없는 소수정예이거나.'
이미 외세의 침투를 허용한 이상 호국은 최대한 시설과 거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로프를 잡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미리 설치해뒀던 무인포탑은 충격으로 파괴된 게 아니라 내부 회로가 타버린 것 같았어. 그 말은 즉 고압 전류로 쇼트시켰다는 얘긴데......'
썩어도 군인인지라 핵폭탄이 터질 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행보관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었다.
지상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열량으로 폭심지의 모든 것이 쓸려나가지만, 핵폭탄이 상공에서 터지면 방사능 낙진을 비롯한 EMP 충격파로 인해 조금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군대 내의 특수 차량이나 장비들은 EMP 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지. 그게 안된 것들은 EMP 충격파가 터져나오는 순간 모조리 고철덩어리가 되니까.'
인류가 가상 현실에서 진짜 현실보다 더 대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대다. 굳이 핵폭탄 같은 걸 터뜨리지 않아도 소규모 EMP 충격파를 터뜨릴 물건 하나 둘쯤은 만들었으리라.
멍청한 호국 같은 인간들은 그 원리도 잘 모르지만, 쓸데없이 똑똑한 양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량 학살이 가능한 최신 무기 따위를 만들어내곤 하니까. 마치 핵폭탄처럼.
한 손으로는 로프를 붙들고,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쥔 호국이 B41의 복도에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위층에서는 달리 이곳에서는 침입자들도 귀찮게 흔적을 지우거나 하진 않았다. 덕분에 복도에 찍힌 족적을 통해 상대가 잘 무장된 인간들임을 알아냈다.
'군화를 신고 있는 인간 다수, 기계 형태의 족적도 있으니 안드로이드도 있겠지. 작업용 겸 전투용 안드로이드일 거야.'
손전등도 켜지 않고 바닥을 살피던 호국은 오리걸음으로 살금살금 움직여 고위험군으로 향했다.
고위험군과 저위험군 사이를 막아주는 게이트는 진즉에 파괴되어 있었지만, 이 구역에 존재하는 ES들이 바깥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전력 차단으로 인해 긴급 은폐 프로토콜이 실행되어 모든 은폐실의 입구 앞에 격벽이 내려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격벽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안드로이드 한 대와 세 명의 인간이 보였다.
'지금 기습하는 건 IQ가 80도 안 되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저들은 6-01이 갇힌 은폐실의 두꺼운 격벽을 뚫기 위해 소음이 적은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었다. 또 다른 인간이 작은 원통형 폭약을 준비한 것으로 보아, 일단 구멍을 뚫고 나면 폭약으로 격벽을 무너뜨릴 생각인 듯 했다.
'안 되지 안 돼.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새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짬에 또 복구작업이나 할 수는 없잖아.'
호국은 조금 전 주워온 게이트 파편을 한 손에 쥐고 살짝 굴리듯이 던졌다.
데구르르르 탁!
그렇게 큰 소음은 아니었지만 한창 작업에 매달려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귀에 거슬렸을 법했다.
"음?"
경계를 서고 있던 한 남자가 돌 구르는 소리를 듣고 호국이 있는 어둠 속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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