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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134화 (134/209)

< 경비 업무 일지 : 폭풍전야(4) >

평범하게 화목하고, 평범하게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세희는 지금껏 인생에서 '충격'이란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멍청하고 불쌍한 오빠와는 다르게 타고난 유전자를 물려받은 김세희는 노력을 하면 노력 하는 것 이상으로 돌려받았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식단조절을 하고, 피부 관리를 하면 건강과 아름다운 외관을 함께 얻을 수 있었고, 남들이 가상 현실에 푹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유지했다.

등산 매니아인 부모님들에게서 '앞으로 조금만 더 힘내면 정상이다' 라는 말을 꾸준히 들어왔기 때문일까, 김세희는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현실에서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 존재할리 만무했고, 모든 경지는 그녀에게 '노력'을 통해 언젠가는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힘내면 도달할 수 있는 정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TF라는 세계 최대의 글로벌 기업에 무사히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피땀어린 노력과 한 가지 목표 덕분이었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저명한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 바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자신의 오빠였다.

그조차도 자신이 해결해버린다면, 자신은 노력만으로도 전세계의 알아주는 천재들을 이긴 것이 된다. 재능이나 행운 따위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노력의 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때마침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 한 교수로부터 TF 입사 제의를 받았고, 그녀는 TF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습득한 뒤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 그녀를 존재하게 했지만, 김세희는 인생 처음으로 자신의 노력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바깥에선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진짜배기 노력. 자신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 가득한 이곳은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김세희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건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본 뒤, 가장 처음 가졌던 의문이었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괴물들과 마주하고, 독기로 전신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런 것'을 스스럼없이 먹을 수가 있지?'

그걸 모두 해낸다면 기꺼이 노력의 신으로 인정해주겠다, 그런 제안을 받더라도 김세희는 해낼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공부하고, 운동하고, 철저하게 자신만의 규칙을 따르면서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만 걸었던 그녀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본 자신에게 유독 까탈스럽게 굴던 가드-079라는 남성은 김세희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가 걷고 있는 포장 도로가 아닌, 온갖 독기와 늪, 괴물로 드글거리는 지옥의 구덩이를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걸 하라고? 절대로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단순한 허세에 불과하다.

"후우...진정하자."

의무실에서 생애 처음 신경 안정제를 맞으면서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까지 받아봤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무너지기 직전의 정신이 가까스로 돌아왔다.

지금도 머그컵을 한 손에 들고 있는 김세희의 눈두덩이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리 깔린 상태였다. 아마 그녀의 오빠가 이 모습을 봤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혹시 그 날이니?' 하고 물었을 것이다.

그 멍청한 낯짝을 떠올리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김세희는 혼란스러웠다. 마음은 한없이 무거운데 오빠란 인간이 끼어들면 순식간에 개그 콘서트로 돌변하는 게 미칠 것 같았다.

'진짜 오빠 새끼는 개그맨 했어야 돼.'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만 있었다면 그 멍청한 낯짝과 빠꾸 없는 직설체 덕분에 돈 깨나 벌었을텐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용돈은 두둑하게 보내준 것으로 보아, 추측컨대 군 부사관 신청을 했거나 바다 한복판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있으리라.

'진짜 사람이 멀쩡하기만 했으면 오빠 새끼가 아니라 오빠 놈 정도로 불러줄 수도 있었을 텐데.'

신은 장남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고, 차녀에게 모든 것을 몰빵해주었다. 김호국은 신을 모욕해도 된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김세희는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신입이 첫날부터 충격에 실신해버린 것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지만, 일부 베테랑 선배들도 이겨내지 못 했으니 김세희의 정신머리가 나약해빠진 것은 아니었다.

"...어?"

한 손으로 스마트패드를 익숙하게 조작하며 시설 내부 시스템 점검을 하고 있던 그녀는 B45의 은폐 구역 시스템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침 일찍 근무를 나온 것은 김세희를 비롯한 소수의 선배들 뿐이었다. 게다가 최고 관리자인 이두근 팀장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바로 아랫급인 상두 부팀장도 커피를 홀짝이며 아침 뉴스를 챙겨 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발견하지 못 한 건 확실했다.

'에이, 큰일은 아니겠지. 가끔 시스템 점검을 위해 일부 구역의 시스템이 재부팅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떨리는 손으로 CCTV 화면 전환 버튼을 누른 그녀는 곧 성대하게 커피를 뿜고 말았다.

"씨, 씨발! 아니! 예쁜말 고운말! 아 진짜!!"

욕을 하는 것은 어휘력이 후달리는 멍청한 종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기는 김세희가 무심코 육두문자를 내뱉을 만큼 대사건이 펼쳐져 있었다.

'다 어디갔어?!'

B45 구역의 CCTV를 미친듯이 돌려봤지만 매뉴얼에 명시되어 있는 ES 6-41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리틀 아미의 리뉴얼 버전이라고 알려진 모 회사의 플라스틱 장난감 군인들이 6-41이라는 것을 모르는 연구원은 없다. 신입인 그녀도 단 하루만에 모든 ES 목록을 달달 외워서 머리에 처박았다.

그런데 B45에서 지금쯤 신나게 저들끼리 치고박고 있어야 할 6-41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은폐 구역은 누가 존재했다는 흔적도 남지 않았을 만큼 깔끔한 상태였다.

마치 등산객들이 산 정상에서 막걸리 파티를 벌인 뒤 '잘 놀았으니 깨끗하게 치워놓고 갑니다~' 하고 뒷정리를 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말도 안 돼...어떻게 이런 일이......"

훈련 시설 동기로부터 제 6 처리 시설이 굉장히 위험하고 외진 곳이라고 듣긴 했다. 하루라도 사고가 안 터지면 오히려 이상한 곳이라고. 그런데 설마 ES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대형 사고가 터질 줄 누가 알았겠나!

다급히 CCTV를 돌려본 그녀는 B45부터 B41까지 쭈욱 훑었다. 그러다 혹시나 하고 B40의 중간 거점 CCTV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청순가련한 외모가 돋보이는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CCTV의 사운드 기능을 조심스럽게 작동시키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그가 시설을 만든다~ 느그가 시설을 만든다~ 노예 계약서 사인하고 빡세게 일한다~

뚱땅뚱땅. 중간 거점 앞에서 편하게 의자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가드-079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뚱땅뚱땅. 검지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장난감 군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다니며 중간 거점 근처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계약서 내용을 모른다~ 무급, 무휴, 비보험으로 다 때려박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심히 거슬리는 목소리와 말투였지만 그런 것보다 김세희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IQ 114의 우월한(?) 머리를 열심히 회전시켜서 도출해낸 결과는 첫 발견자인 자신의 책임을 자연스럽게 상사에게 떠넘긴다는 것이었다.

"저기...부팀장님?"

"어, 왜."

"잠깐 이것좀 봐주시겠어요?"

"모르는 게 있나봐? 한 번 보여줘봐."

주식이 얼마나 올랐는지, 또 어떤 병신 같은 윗대가리가 스캔들을 냈는지 살피고 있던 상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민 스마트패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3초만에 자신의 책상 위에 탑재되어 있는 비상벨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반동! 반동이다! 전위대! 아니! 기동타격대!!"

첫 만남부터 무조건 가드-079의 비위를 맞춰주라며 이상한 충고를 하던 그도 이번만큼은 가드-079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곧이어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모니터룸 전역에서 울려퍼지고, 아직 출근하지 않았던 연구원들이 이 시국에 호다닥 달려나왔다.

"상두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장난으로 비상벨 누르지 말라고 했잖아!!"

"장난은 무슨 장난이요?! 딱 봐도 코드 블랙급 상황이구만!!"

의무실에서 뛰쳐나온 이두근에게 스마트패드를 들이민 상두는 화면 속에서 ES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가드-079의 모습을 가리켰다.

"이거 B45에 은폐된 6-41 아닙니까?! 그리고 이거! 이거 지난 번에 탈주 미수 사태 일으킨 6-311 이잖습니까! 이 놈들이 지금 가드-079와 함께 중간 거점 바로 앞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평소에 목소리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차가운 도시 남자 같았던 빡빡머리 상두가 게거품을 물고 소리치자 이두근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했다.

쌍둥이 세포는 정말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알아내기도 전에 어느 순간부터 가드-079와 함께 하고 있었다. 완전체가 된 지금 녀석을 은폐실로 되돌릴 방법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으나, 다른 ES까지 밖으로 끌고 나올 거라곤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팀장님. 이거 상층부에 알려지면 가드-079가 반란을 꾀했고, 우리가 그걸 눈감아줬다고 오해를 받아서 싹다......"

"불길한 소리 하지마 이 새끼야!"

상두의 민머리를 찰싹 소리가 날 만큼 후려친 이두근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당장 코드 블랙을 선포하고 시설 종말 프로토콜을 작동시키거나, 기동타격대를 요청하는 것보다 우선 사건의 경위를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렴 매뉴얼을 칼같이 지키는 가드-079가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해서 저 괴물들을 풀어줬을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 프롯. 녀석한테 한 번 물어보자고. 가드-079가 또 어떤 엉뚱한 생각을 품었는지, 어떤 논리로 그걸 실행에 옮겼는지 프롯이라면 알고 있지 않겠어?"

곧 프롯을 호출한 연구원들은 모니터룸의 거대한 모니터에 등장한 마스코트 캐릭터와 마주했다. 기괴한 로봇 인형이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 관리봇의 지위를 고스란히 강탈한 뒤부터 한층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비상벨 작동을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지금 B40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확인한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래. 우리가 다 같이 확인했어.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빠르게 본론만 얘기하자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가드-079가 어떠한 경우에도 ES가 은폐실 밖으로 탈주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는 매뉴얼을 어기지 않았느냐, 가 궁금한 것이겠지요. 답은 간단합니다. 현재 CCTV 상으로 보이는 ES들은 비공식적으로 관리자 계급인 가드-079에게 제의를 받아 계약제로 인턴십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재단 직원의 보조직이 된겁니다. 결코 매뉴얼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TF의 인간도 들어보지 못 했을 희대의 개소리가 초지능 AI로부터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뭔 개소리야 씨발' 하고 욕을 내뱉었을 때,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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