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폭풍전야(3) >
"냄새가 나."
기어이 2호에게서 밀짚 모자를 빼앗아 쓴 호국은 B45의 저위험군에 도착하자마자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냄새라고 하신다면?
"필라델피아 치즈 케이크를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진성 굳건이들의 짬 냄새......!"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모든 군인들에게 최고의 사치품이 뭐냐고 묻는다면 자신의 것보다 큰 소시지와 참치, 볶음면을 섞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필라델피아 치즈 케이크라고 할 테니까.
그런 짬 냄새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비오는 날에 예비군을 끌려온 것 만큼이나 처절한 기분일 것이다. 짬 냄새라는 건 호국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위험군의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짬 냄새가 진동하는 10cm 크기의 군인들이 또 한 번 복도를 전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슬리퍼 크기의 전차와 장갑차가 무한궤도를 끼릭끼릭 움직이면서 적진을 향해 일시에 돌격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타카카카카! 콰앙!
그 위를 인터셉터처럼 습격한 것은 작은 드론 수준의 전투기였다.
편대를 짜서 허공을 활공하다가 기습적으로 급강하면서 비비탄 같은 기관포탄을 마구 토해냈다. 거기에 적중당한 전차는 라이터 불꽃 정도의 불이 치솟으면서 파괴!
불이 붙은 채 튀어나온 초콜릿색의 전차병들이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축소판 전쟁 영화나 다름없었다.
-B45는 특별한 케이스로써 고위험군 전체를 은폐실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ES 6-41-1 과 6-41-2 간의 전쟁이 정기적으로 터지지 않으면 그 대상이 재단 직원으로 바뀌기 때문에 저들간의 전쟁은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부 규정에는 저들이 은폐실을 비롯하여 고위험군 내부를 박살내지 못 하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라고 쓰여있었다. 그래서 일전에 호국이 이들이 벌인 짓을 스스로 수습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놀고나면 정리를 제대로 하자, 정리도 하지 않는 사람은 놀 자격이 없다. 대충 그런 논리였다. 그리고 뒷정리만 잘 한다면 호국은 딱히 저들을 제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알아서 잘 끝낼텐데 뭐하러 자유까지 억압한단 말인가. 규정은 '모든 수단'을 활용하라고 쓰여있지만, '뒷정리 잘 시키기'도 모든 수단에 포함되는 온건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호국은 때마침 자신의 눈 앞을 날아가는 전투기 한 대를 잽싸게 낚아챘다. 초콜릿 색의 군인들은 지상 기갑 전력으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군청색의 군인들만 전투기를 몰고 다니는 건 좀 치사해보였다.
'물론 이 나이에 다른 사람 소꿉놀이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전투기가 움직이지 않자 조종석에서 샷건을 치기 시작한 조종사에게 호국은 책임자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전투기 밖으로 몸을 쭉 빼더니, 허공에 두둥실 떠있는 커다란 원반 같은 것을 가리켰다.
자세히보니 그것은 원반처럼 생긴 소형 드론이었다.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공중 모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그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불 붙은 기름통을 아래로 굴러대며 지상 기갑 전력과 일방적인 딜교를 하고 있었다.
전투기를 놓아준 호국은 훌쩍 점프해서 허공의 원반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니나다를까, 특별한 복장을 입고 있는 군청색의 장군이 뒷짐을 진 채 호국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 놀고 있는데 왜 방해하냐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노는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여기에 처박혀서 매일 똑같은 래퍼토리로 놀기만 하면 질리지 않을까 싶어서요. 새로운 놀이터를 제공하고 싶은데...생각있어요?"
말이 좋아 놀이터지, 일단 한 번 걸려든 순간 호국과 함께 즐겁게(?) 일만 해야 하는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 그걸 알리가 없는 B45의 우물 안 군인들은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군청색 군인의 지휘관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한 뒤,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호출했다. 기껏해야 10cm 크기의 장난감 군인이 대뜸 전화를 어디서 꺼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또 다른 진영의 지휘관이 발 아래에서 경적을 울려댔다.
두 돈반 트럭처럼 생긴 것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아래로 시선이 간 호국은 초콜릿 색의 지휘관이 자신도 끌어올려달라는 양 팔을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
곧 두 지휘관을 원반 위에서 참석시킨 호국은 본격적으로 굳건이 영입 작전에 돌입했다.
물론 호국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주 나쁜 거니까. 사실에 기반해서, 거짓 같은 진실을 말해주면 된다.
농사왕을 영입할 때는 그가 진 빚이 있었기 때문에 멍청한 호국이라도 그를 속여넘길 수 있었지만, 이들은 천성 군인. 호국에게 빚진 것도 없었고, 원하는 것도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여기선 약팔이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한 떡밥부터 던지는 게 맞았다. 원숭이라도 알 수 있는 협상의 시작은 조건 제시였으니까.
"제한없이 24시간 놀 수 있는 권리!"
"!"
"!"
두 지휘관이 솔깃한 얼굴로 반응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24시간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호국이 뒷정리를 명령한 이후부터 망가진 설비를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데에 작업 시간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나면 망가진 것들을 수리하고, 다시 멀쩡한 전장으로 되돌리기 위해 브레이크 타임이 걸렸다. 그런데 그 브레이크 타임을 없애주겠다고 하니 솔깃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군비 증강 제한 해제!!"
"!!"
"!!"
B45에서 엄격하게 제한받고 있는 것. 그것은 이 리틀 아미가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 한다는 이동의 자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바로 자체적인 군비 증강 제한이었다.
프롯이 귀띔해준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재료가 없어도 파손된 만큼의 리틀 아미를 원상복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대로 제한선을 넘겨서 추가 군대를 생산하려면 재료가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그 재료는 바로 플라스틱!
때문에 재단 내에서도 이들의 폭발적인 군비 증강(전력 향상)을 우려해 플라스틱은 일체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B45의 모든 설비에 들어가는 재료들 중 플라스틱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하니, 과연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호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진실을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프롯이 짜둔 대사를 그대로 외운 것 만으로도 호국은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 상대를 또 한 번 속여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군비 증강 제한을 해제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리틀 아미들이 자체적으로 재료를 수급하고 생산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의미지, 호국이 필요한 재료를 직접 제공해준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호국은 이들이 플라스틱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도록 뒷공작을 펼칠 계획도 준비해두었다. 이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면 프롯이 호국을 대신하여 소량의 플라스틱을 지급해주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 하면 도로 뺏는 전략이었다.
관리자의 입장인 호국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 이들은 고스란히 플라스틱을 빼앗길 수 밖에 없고, 플라스틱의 유일한 공급자인 호국을 위해 더더욱 열심히 일해줄 것이다. 굳이 폭정을 일삼지 않아도 완성판 노예가 손에 들어오는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악랄한 것 같아.'
정확히는 호국이 생각한 게 아니라, 리틀 아미들을 최대한 통제하기 위해 프롯이 생각한 계획이었지만. 어쨌든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호국은 기꺼이 욕을 먹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게 다 평생 직장을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니, 종국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호국은 한층 더 빵빵한 월급을, 리틀 아미들은 더럽게 많은 플라스틱을 받게 될 터. 그리고 농사왕은 빚이 조금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24시간 자유, 군비 증강 제한을 해제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떡밥은 충분했지만, 호국은 마지막 일격을 넣기 위해 입술에 침을 발랐다.
"모의 전장이 아닌 실제 전장 준비."
언뜻 24시간 전쟁 자유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내용인 것 같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리틀 아미끼리 치고박는 모의 전쟁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치룰 수 있지만, 실제 전장을 준비해준다는 것은 실제 적도 준비해준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전쟁에 미쳐있는 이 작은 플라스틱 군인들이라면 틀림없이 호국의 마지막 제안에 아랫도리가 흥건하게 젖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전쟁을 할 수 있게 해주고! 군비 증강 제한도 풀어주고! 자신들이 바라마지 않는 진짜 전장과 적도 준비해준다! 이보다 더 좋은 고용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모든 조건을 저렴한 가격 3만 9천 8백 원짜리 계약으로 해줄게요. 그 대신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해주세요."
프롯이 미리 인쇄해둔 계약서를 각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보여주었다. 계약서라고 해봐야 사실 그리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호국과 프롯이 이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부려먹고 통제할 수 있는지 상기시켜주는 악마같은 계약 조건들 밖에 없다. 고작 그정도로 위의 특혜들을 누릴 수 있다면 리틀 아미들 입장에서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리라.
-계약자 명시 : 김호국, 프롯을 (갑)이라 칭하며, 모든 6-41을 (을)이라 칭한다.
-1항 : 모든 6-41은 호국과 프롯이 필요로 할 때 즉시 응한다.
-2항 : 모든 6-41은 시설 밖으로 탈주하지 않는다.
-3항 : 모든 6-41은 재단 직원들을 적대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4항 : 모든 6-41은 호국과 프롯이 필요로 하는 상황 외에도 정기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5항 : (갑)은 (을)의 편의를 최대한 봐줄 것.
-6항 : (갑)이 계약 조건을 어길 시 해당 계약은 즉시 파기
-7항 : (을)이 계약 조건을 어길 시 특혜 무효, 계약 10년 연장.
IQ가 84밖에 되지 않는 호국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준의 조악하고 악마같은 계약서.
하지만 리틀 아미들은 이미 앞서 제시된 특혜들에 맛이 가버린 것인지 준비된 인주를 묻혀서 직접 사인했다. 결코 저들이 멍청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큰 떡밥을 앞뒤 가리지 않고 물었을 뿐.
호국은 사인이 끝난 계약서를 둘둘 말아 해피의 옆구리 적재함에 밀어넣었다. 이 옆구리 적재함은 비밀스러운 것을 숨기기에 용이했다. 움직이는 지능형 금고라고 할까, 세상의 그 어느 금고보다도 안전한 것은 확실했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수천 단위의 10cm 굳건이 부대를 얻게 된 호국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최대한 참으며,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럼 바로 일하러 가죠. 혹시 알아요? 일 잘 하면 어디의 고마운 AI가 플라스틱을 줄지도 모르죠."
플라스틱이란 말에 두 지휘관이 모든 리틀 아미를 긁어모아 호국의 뒤를 따르게 했다. 마치 한국 군대의 육군 전력을 지나칠 정도로 증강시키려 애쓰는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TF 내에서 경비팀이란 이름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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