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31화 (131/209)

< 경비 업무 일지 : 폭풍전야(1) >

-진급 심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작년 여름 이후, 나 홀로 개인 프로젝트의 자료 정리와 발표 준비를 한 오늘까지 평일 저녁에 팀원들이 깨어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이제 본격적인 진급 심사 시즌이 다가오는 지금, 고문을 당하는 ES들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살기가 모니터룸 내부에서 메아리 친다.

폭풍전야. 작년 진급 심사 시즌에서 나를 비웃던, 지금도 비웃고 있는 이들에게 굳이 반박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허접한지, 내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7년째 3급 연구팀장이 되지 못한 4급 선임 연구원의 녹음 데이터에서 발췌

------

"응기이이이잇!"

차가운 바닥 위에 침낭 하나만 깔고 자서 그런 것일까.

욱신거릴 정도로 심하게 뭉쳐있던 근육을 단번에 일깨우는 방법은 격한 신음성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 것 뿐이었다.

TF에서 근무한지 45일째를 맞이하는 오늘, 호국은 얼마 남지 않은 두 번째 휴가를 앞두고 있었다.

전월에는 아직 새로운 직장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해 대부분 집에서 뒹굴거리며 휴식을 취했다면, 이번 휴가는 좀 더 활동적으로 즐겨볼 생각이었다.

'행보관님이 오랜만에 만나서 막걸리에 파전이나 하자고 하셨으니까.'

3급 팀장부터는 1년에 두 번, 월차를 4박 5일로 늘릴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고 들었다. 마침 운 좋게 3급 경비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던 호국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행보관은 꼬장꼬장한 성격이 일품인 괴팍한 늙은이였지만, 자대 배치를 받은지 얼마 안 되어 어리버리 했던 호국을 잘 이끌어주었다.

체력 단련이라는 핑계로 호국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까지 연병장을 뛰게 만들고서도 휴식 없이 또 뛰게 만들었던 건 약과였다.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호국은 반푼이 병사밖에 안 되니 상층부의 특별 허가를 받았다며 개인 훈련으로 마구 조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호국이 가장 많이 시달렸던 훈련이 특공무술과 사격, 그리고 극한 환경에서의 서바이벌이었다.

하지만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몸 성히 제대한 호국에게 그러한 것들은 모두 지나가버린 과거에 불과했다. 지긋지긋한 선임들도, 호국만 보면 굴리기 바빴던 행보관에게도 더이상 시달릴 일은 없었다.

대한민국의 어엿한 만기전역 예비역은 설령 꼬장꼬장한 만렙 행보관이 상대라고 해도 꿇릴 것이 없었다. 민간인이 된 호국에겐 '민원' 이라는 치트키가 있었으니까.

뚜둑뚜둑, 목을 좌우로 크게 꺾으면서 장비를 챙긴 호국은 벽에 걸어둔 업무 일정표부터 살폈다.

"어디보자...오늘은 오전부터 통상 순찰 업무를 돌고,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에는 B61 내부 리모델링 논의를 해야 하네?"

당연하지만 이 업무 일정표는 호국이 성실하게 짜놓은 것이 아니었다.

호국이 업무 도중에 두서없이 이런저런 계획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프롯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다음 이두근에게 1차적으로 업무 일정의 확인을 요청했다. 관리자인 이두근의 허가가 떨어지면 프롯이 업무 일정표를 업데이트 하는 식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드.

CCTV로 호국의 기상을 확인한 프롯이 스마트패드에 접속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힘을 쓸 줄은 알아도 머리를 쓰는 쪽은 자신이 없었던 호국이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시설 내부 리모델링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프롯 덕분이었다.

호국이 전 귀부인, 현 집주인 아줌마와 치욕스러운 하드코어 매니악 플레이를 한 직후, 다 쓰러져가는 저택의 리모델링을 제안했을 때 프롯은 의외로 쉽게 승낙해주었다.

-B61의 고위험군에 위치한 저택이 너무 형편없어서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다행히 리모델링에 필요한 자재는 충분합니다. 본래는 시설의 보수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저장된 재고들입니다만, 일전의 ES 탈주 미수 사태로 본부 측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자재를 지원받았습니다. 거기서 일부를 가져다 쓴다면 될 겁니다. 물론 김세희 4급 신입 연구원을 제외하면 인원 보충이 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인력 부족 문제 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물질적인 여유는 충분하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던 호국은 현 제 6 처리 시설의 인원을 점검해보았다.

이두근을 필두로 한 연구팀 인원이 정확히 8명. 프롯이 따로 준비해둔 경비용 안드로이드 16대, 작업용 안드로이드 2대, 그리고 79기 경비팀은 호국과 프롯, 신입, 해피까지 2인 2체.

다른 시설에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근무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국이 봐도 제 6 처리 시설의 인원은 너무 적은 것 같았다. 연구원들은 항상 모니터룸에 처박혀있으니,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뛰는 인원은 훨씬 더 적었다.

"사람이 더 필요해."

가볍게 세수를 끝마친 호국이 수건으로 거칠게 안면을 문지르며 말했다.

-상층부에 추가 인력 충원을 요청하시겠습니까? 3급 팀장에게는 직책을 막론하고 각종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끔 보면 넌 너무 순진한 것 같아. 잘 들어, 높으신 분들은 절대! 아랫 것들이 뭔가를 요청하면 쉽게 안 들어줘!"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병장 만기전역을 한 내가 보증하는 거야. 이건 불변의 진리 같은 거라고."

사실 단순히 일을 하기 싫어하고, 제 잇속 챙기기만 바쁜 정치인이나 군 장성들에 비해 TF의 상층부는 그럭저럭 일을 잘하는 편이었다.

FCD에 소속된 의원들 대부분이 전, 현직 기업인이거나 일국의 지도자였으니까. 그들은 아랫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항상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무적으로 TF에 쏟아부어야 하는 지원금이나 장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들이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일이 없게끔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유독 실적에 대한 압박이 심판 편인데, 일을 잘 하는 직원에게는 높은 보수와 높은 권한을, 실적이 좋은 시설에는 더욱 빵빵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래서 호국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 6 처리 시설은 TF내에서 똥통, 유배지, 알카트라즈 같은 악명으로 소문났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드의 지원 요청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것 같습니다.

"응 안 믿어~ 사람들이 가상 현실로 들어가는 요즘 시대에도 내가 100년 전 수통을 썼다고 하면 믿겠냐?"

-......

놀랍게도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을 호국이 군 시절에 사용했던 것은 1%의 구라도 없는 팩트였다. 왜냐하면 모두가 원격 제어용 안드로이드로 근무를 설때, 호국만 직접 근무를 서야 했으니까!

군은 호국 한 명에게 새로운 수통을 지급해주는 것보다, 창고에 짱박혀있던 골동품 수통을 계속 쓰게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군대 밥이 교도소 밥보다 더 낫다는 말을 믿고 말지. 어떤 멍청한 흑우가 높으신 분들을 믿어?"

-조직의 상층부에 대한 반발심이 굉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층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 하면 제 6 처리 시설은 언제까지고 만성 인력 부족에 시달릴 겁니다.

"그러니까 일손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상층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어떻게 인력을 구하신다는 겁니까?

"위에서 기대할 수 없다면 아래에서 기대해야지. 크으! 시원하다."

프롯이 기계 팔을 이용해 직접 뽑아서 가져다 준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단숨에 원샷한 호국이 지면 아래를 가리켰다.

-설마......

"우리에겐 훌륭한 일꾼들이 있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노예도 부려본 놈이 더 잘 부리는 법. 호국은 탈주 미수 사태의 뒷정리를 위해 일꾼으로 투입시켰던 존재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도망쳐 보겠다고 제 몸을 동강 내서 하반신과 상반신 따로따로 움직였던 어처구니 없는 새끼, 밭을 관리하는 데 써야 할 낫과 괭이로 멀쩡한 시설을 아작내놨던 새끼, 그런 주제에 노예처럼 시키는대로 일은 잘 했던 새끼. 그래서 더 좆같았던 새끼!

"농사왕의 봉인을 풀 때가 왔다."

시설 복구 작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은폐실에 처박히듯이 격리되었던 농사왕.

호국은 그를 단순한 일일노동직으로 써먹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세상 천지를 뒤져봐라, 그런 인재가 어디 흔한가?

-ES를 사사로운 용도로 은폐실에서 꺼내주는 것은 규정 위반입니다.

"하지만 메뉴얼에 ES를 직원으로 고용하지 마시오, 라는 내용은 없잖아. 꼬우면 그런 규정도 만들어놨어야지.

자신에게도 몸이 있었다면 프롯은 손으로 이마를 탁 쳤을 것이다.

"그리고 팀장급 전용 규정을 찾아봤는데, 3급 팀장부터는 TF에 도움이 될 만한 우수한 인재를 발견할 시 TF 입사 권유를 할 수 있대."

-어디까지나 권유가 가능할 뿐이지 고용을 할지 말지는 상층부에서 판단합니다. 당연히 그 전에 TF의 일을 시키거나 정보를 노출시키는 건 안 됩니다.

"근데 농사왕에겐 딱히 감출 일도 없잖아. 이미 이 시설 안에 있으니까."

순간적으로 호국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어? 맞는 말이네?' 하고 넘어갈 뻔 했지만, 프롯은 초지능 AI 답게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건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교도소의 업무를 도우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애초에 성립도 안 되고,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사실은 규정이 없기 때문에 예전에도 그랬듯이 구렁이 담 넘듯 넘겨도 되는 일이지만, 프롯은 이미 신입 만으로도 경비팀의 ES 비율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잃어버렸던 자신의 반쪽을 되찾은 신입, 통칭 쌍둥이 세포는 더이상 제압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1급 ES가 본래의 힘을 되찾은 것 만으로도 신경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건만, 호국은 거기서 더 추가하자고 떼를 쓰는 판국이었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다수결 원칙으로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경비팀 인원으로만?"

-경비팀 인원으로만. 단 과반이 되지 않으면 그 계획은 없던 일이 되는 겁니다.

"좋아."

장비를 챙겨 입은 호국이 곧장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프롯은 재빨리 자신의 자매인 해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신입은 호국의 편을 들 게 뻔했으니 2대 2로 만들어야 했다.

넷 뿐인 경비팀에서 과반이 나오려면 프롯을 제외한 모두가 호국에게 찬동해야 하는데, 프롯은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자매인 해피는 프롯의 깊은 뜻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프롯의 도움으로 바이오로이드 종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은혜를 져버리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호국의 계획의 막아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3대 1일이네."

무인 편의점까지 내려온 호국은 해피에게 동의하면 왼 발을, 반대하면 오른 발을 내밀라고 했다. 프롯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음에도 해피는 주저없이 왼 발을 내밀었다. 자매가 형제의 등에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꽂아버린 것이다.

-해피에게 된장을 바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입니다.

"어쨌든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다수결 원칙으로 내가 이겼어. 그러니 이제 새로운 굳건이를 데리러 가자. 79기 경비팀은 더 많은 굳건이가 필요해......!"

굳건이라 쓰고 노예라고 읽는 존재. 필요할 때는 굳건이지만 다쳤을 때는 나 몰라라 해도 되는 노예. 호국은 그렇게까지 악독하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제 6 처리 시설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했다.

오랜만에 신입과 해피를 양옆에 둔 호국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B72까지 직행으로 내려갔다.

모든 시설은 B70 아래의 구역을 특별 구역으로 분류해두는데, 이 구역은 팀장급 이상이 아니면 그 어떤 재단 직원도 구역 입장 조차 허가받지 못 했다.

연구원들조차 정신 오염 필터링의 도움을 받더라도 교대로 모니터링을 하는 게 일반적이며, 어지간하면 관리봇의 자율적인 관리(고문)에 맡겨두는 편이었다. 심연이란 건 단순히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프롯이 알고있는 한 이미 탈주해버린 B75의 점멸 분쇄기, 제 구역에서 탈주한 뒤로도 호국과 함께 행동하는 신입(쌍둥이 세포)를 제외하면 B70 아래에 남아있는 ES는 총 9체 였다.

그중에서 이번에 호국이 입영통보를 하러 가는 굳건이 후보는 ES 6-311, 통칭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유모를 극렬한 분노와 호전적인 성향, 재료만 주어진다면 자신과 같은 괴물 허수아비를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 TF내에서도 군말없이 제 6 처리 시설에 은폐시키는 것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던 대상이다.

-B70 아래로 입장하는 모든 재단 직원은 필요시 유서를 작성해 제출 할 수 있습니다. 유서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상남자는 그런 거 안 써."

호국과 프롯이 시답잖은 농을 주고 받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고장나는 일 없이 B72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저위험군의 일직선 통로를 막기 위해 설치된 다수의 무인 포탑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파괴된 채 아직 보수되지 않아 고철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다른 재단 직원이 이 광경을 봤더라면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리고 엘리베이터의 문 닫기 버튼을 연타했을 것이다.

"이러니까 굳건이가 필요하다는 거야. 우리만으로는 관리가 안 되잖아, 관리가."

아이러니하게도 호국의 노예 확보 의지는 더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