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28화 (128/209)

< 경비 업무 일지 : 집주인 아줌마.wmv(2) >

"아, 상쾌한 공기!"

마스크를 쑨 채 후욱후욱 거친 호흡을 내쉬며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더이상 달콤한 향기따윈 맡을 수 없었다. 뇌가 녹아버릴 듯한 진한 설탕내음은 호국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한 것 같은 착각마저 안겨주었지만, 마스크를 착용한 후부터는 놀랍도록 그런 감정들이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호국은 살짝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은 어린 시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쓸데없이 달짝지근한 냄새가 호국의 동심을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흑역사와 어린 시절은 모두 지나간 과거로 덮어두어야 아름다운 법. 호국은 분위기가 확 달라진 저택 내부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폈다.

튼튼한 벽돌과 나무 판자로 지은 깔끔한 저택이 아닌, 바람 불면 펄럭거릴 것 같은 가죽이나 천 따위가 바느질되어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리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반쯤 녹아내리고 있는 설탕 과자였으며, 천장 위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것은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니라 눈알이 하나하나 장식되어 있는 눈알걸이였다.

확실히 저 눈알걸이(샹들리에)가 떨어지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튈 것 같았다. 그 파편이 좀 끈적끈적하고 질척거리는 것이겠지만.

"죄다 감점 요소 뿐이네."

먹통이 된 스마트패드 대신 오랜만에 수첩을 꺼낸 호국은 자신의 기준대로 집값을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비바람도 제대로 못 막을 것 같은 헐렁한 벽과 천장에 어마어마한 감점을 부여했다. 하다못해 가축이 사는 축사도 비바람은 견딜 수 있게 짓는 법인데, 이 쓸데없이 촘촘하게 바느질된 벽은 비바람에 너무 취약해보였다.

새하얀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을 마구 뭉쳐서 제작한 듯한 계단이나 문은 디자인이 괴멸적이었기에 또 감점, 마치 방문자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끔찍한 샹들리에도 감점, 아기자기한 소꿉놀이용 인형 대신 짚으로 대충 만든 것 같은 인형들은 성의가 너무 없어서 감점!

"이정도면 차라리 컨테이너 박스 집이 더 낫겠는데."

볼펜으로 뻐꾸기 시계를 두들겨 본 호국은 텅텅 비어있는 소리만 울려퍼지자 인상을 찡그렸다.

고풍스러운 대저택에는 정확한 시간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뱉는 뻐꾸기 시계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큐멘터리라면 뭐든 보곤 했던 호국은 뻐꾸기 시계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계를 직접 해체해보았지만, 건진 거라곤 증오스러운 뻐꾸기 대신 밋밋한 해골 바가지 하나가 전부였다.

이정도면 슬슬 집값만 걱정할 게 아니라 땅값까지 걱정해야 하는 수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발소리가 거의 안 날 정도로 부드러웠던 카펫이나 기름 먹은 나무 판자는 분명 환상적이었다. 호국조차 무심코 이 집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호국이 걷고 있는 복도는 노숙자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은 비쥬얼을 자랑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끼익끼익 울어대는 낡은 나무판자하며, 카펫은 누가 엿 바꿔먹었는지 천 쪼가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형편없는 곳에서 감탄을 하고, 쓸데없이 냄새는 좋지만 맛은 더럽게 없는 디저트를 먹으면서 미래의 노후 생활을 꿈꿨단 말인가.

'할아버지한테 이런 집을 사드렸으면 내가 먼저 관짝에 들어갔겠지.'

눈 앞에서 나풀거리는 거미줄을 가볍게 쳐낸 호국은 2층 층계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선 언제 집 안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흉측한 몰골의 인간들이 좌우로 정렬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영화로 보면 박력이 느껴져서 나름 멋있어 보일 법한 장면인데, 그 멋진 갑옷은 어디 내팽개치고 왔는지 녹슨 검만 들고 있는 짝퉁 기사들이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행진하는 모습은 꽤 웃겼다.

그들의 피부는 썩어 문드러졌고, 이목구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굳이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썩은 곰팡내가 진동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연히 저들 또한 집값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저택 고용인들 위생 불량, 감점."

개인 장비 관리 미숙으로 추가 감점까지 먹인 호국은 덤덤하게 그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도열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더이상 이곳에 없었으니까.

채앵!

호국이 그들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짝퉁 기사들이 너도나도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위협 용도로 검을 뽑은 것이 아닌, 명백하게 호국에게 적의를 품고 칼날을 겨눴다.

호국은 곧 그들의 의도를 깨닫고 코웃음을 쳤다. 하긴, 누구나 자신들의 실수를 쉽게 인정하고 곧바로 고치려드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이 세상에 고구마따윈 없었을테니까.

20년 전쯤에 꽤 유행했다던 TV 프로그램 '백주부의 골목식당'에서도 백 셰프가 다 쓰러져가는 음식점에 확실한 개선점과 경영 방식의 수정을 권고했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아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재방송으로 그걸 시청했던 호국이 참다못해 사이다 1.5리터를 원샷 해버린 적도 있었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젠 단순히 개선이나 수정따위가 아닌, 아예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자들은 단순한 고용인들. 아무리 다그치고 조언을 해봐야 결국 윗물이 맑아지지 않으면 아랫물이 맑아질 일도 없었다.

'집주인 아줌마랑 직접 얘기하는 게 편해.'

집값이 이미 지반을 뚫고 내핵까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솔직하게 집주인에게 알린다면...어쩌면 호국이 사이다 1.5리터를 들이킬 일 없이 원만하게 해결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겨눠진 다수의 칼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국은 이윽고 전광석화같이 몸을 움직여 그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진로에 방해되는 칼날 몇 개를 주먹으로 쳐서 튕겨내고, 그 틈을 낮은 자세로 파고들어 미꾸라지처럼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실제로 총구가 겨눠진 상태에서, 상대방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총을 후려친 뒤 재빨리 상대에게 파고드는 훈련을 행보관과 수십 번도 넘게 했었다.

그 과정에서 머리통에 총알이 박힐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척수반사급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호국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을 뻔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행보관이 입맛을 다실 때마다 호국이 낄낄대며 비웃곤 했다. 아무렴 늙은이보다 반사신경이 느리겠냐는 것이 호국이 비웃었던 이유였다.

인생의 몇 안 되는 추억을 곱씹으면서 무난하게 짝퉁 기사들을 따돌린 호국은 기묘할 정도로 적막감이 내려앉은 2층 복도에 도달했다. 복도에 세워져 있던 장식장을 쓰러뜨려서 계단 입구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그로 인해 발생한 소음이 호국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고, 계단 아래에 발이 묶여있는 기사들이 갑자기 락 콘서트 떼창과 맞먹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마라톤 시작을 알리는 총성처럼 신호로 받아들인 것인지, 2층 복도에 가득한 흰색의 문들이 하나둘씩 열렸다. 지금껏 보지 못 했던 고용인들이 복도로 기어나와 호국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2차 방어선도 아니고.

"...방음 안됨. 감점."

이런 대저택이라면 벽과 천장이 두꺼워서 어지간하면 방음이 잘 돼야 정상이건만. 호국은 쉴틈 없이 자신의 기대치를 깎아먹는 이 저택에 실망하고 절망했다.

방에서 기어나온 고용인들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외형을 지닌 짝퉁 기사들과 달리,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바느질된 봉재 인형 같은 패션을 자랑했다.

특히 가관이었던 것은 복부에 바느질을 하다말고 그만둔 탓에 내용물이 요리사 복장 너머로 질질 흘러나오고 있는 사내였다. 아마도 그는 곱창 요리 전문가인듯 했다.

호국은 문득 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용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도리만 있었으면......!"

장도리만 있었다면 프롯에게 'The Last Waltz' BGM을 틀어달라고 부탁했을텐데. 아쉽지만 장도리도, 프롯도 없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는 게 인간의 가장 큰 장점. 호국은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딸깍거렸다. 볼펜이면 딱 적당하다. 연필처럼 쉽게 부러지지 않으니까.

충격진압봉을 쓸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건 제압을 위해 상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때나 사용하는 물건이라 이 저택의 고용인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집값이 떨어지면 앓는 사람도 벌떡 일어나 정부 시위부터 펼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인데, 하물며 저들이라고 아무런 감정이 없을까. 그러니 딱 볼펜이면 충분했다.

딸깍.

기다렸다는 듯이 부지깽이를 든 남루한 옷차림의 고용인이 호국의 머리통을 깨부수려 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살의는 느껴진다. 마치 줄에 고정되어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반 강제적으로 손발을 움직이는 인형처럼, 그의 움직임도 어딘가 많이 불안정했다.

사실은 이런 일따위 하고 싶지 않은데, 같은 진부한 대사라도 내뱉으면 어쩌나 싶을 만큼 형편없는 몸놀림이었다.

힘차게, 다르게 말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큰 궤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부지깽이를 피한 호국은 그의 팔꿈치 바로 위쪽의 연한 부위와 무릎 뒷관절을 빠르게 볼펜으로 찍었다.

그렇게 한 명을 무력화시키자마자 주방에서 쓰여야 할 칼을 사람에게 휘두르는 요리사와 마주했다. 그 역시 부모님이 내미는 파래 무침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어린아이처럼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였다.

명령받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란 티가 팍팍 묻어나오는 행동이었다. 눈치 빠른 호국은 그가 원하는 대로 팔을 꺾어 식칼을 빼앗은 뒤 식칼의 뭉툭한 손잡이 끝으로 뒤통수를 내려쳤다.

요리사 악당 B는 약속된 전개에 맞춰 쓰러진 뒤 데굴데굴 굴러서 부지깽이 악당 A의 옆에 안착했다.

그렇게 가정부, 유모, 정원사...기타 등등을 차례대로 볼펜으로 찍어서 바닥에 눕혀준 호국은 마침내 피 튀기는 혈전 끝에 집주인이 머무르는 방문 앞에 섰다.

흰색이 감도는 이상한 문들에 비해, 이 문만은 제대로 고풍스러운 목재를 사용한 멀쩡한 문이었다. 낡거나 좀먹은 흔적도 없었다. 방 안에 다소곳하게 앉아 홍차를 즐기고 있을,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귀부인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은 호국은 절제된 손동작으로 방문을 두들겼다.

쾅 쾅쾅 쾅쾅!

스노우맨을 만들고 싶어지는 특별한 박자로 두들겼다.

"집주인 아줌마! 잠깐 얘기 좀 해요!!"

눈사람은 개뿔. 추심꾼 못지 않은 박력으로 윽박지른 호국은 노크를 한 것도 잊고 단숨에 문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호국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름다운 파티 드레스 대신 하늘하늘 속이 비치는 실크 잠옷을 걸친 집주인이었다.

방의 풍경도 티타임을 즐기는 넓직하고 정적인 분위기의 장소가 아닌, 커다란 침대와 아기 용품이 가득한 '침실'로 바뀐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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