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귀부인(4) >
'부인께서 주신 쿠키의 맛,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평상시의 호국이라면 여성과 겸상은 고사하고 대화 한 마디 나눠볼 건덕지도 없었기에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했다.
초, 중, 고 모두 남녀공학을 나왔음에도 여성과 이렇다 할만한 접점이 없었던 건 사실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한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다들 연예인 얘기할 때 혼자 애니메이션 캐릭터 얘기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과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달랐던 호국에겐 당연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없었고, 그걸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신체 스펙이나 집안 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지. 나보다 1년 늦게 태어난 여동생은 IQ도, 외모도,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도 다 가졌는데......!'
호국은 눈물 섞인 홍차를 들이키며 여동생에 대한 분노를 더욱 불태웠다. 내일은 여동생이 죽어도 마시지 않으려 하는 콜라를 따뜻하게 뎁혀서 커피 대용으로 놔둘 생각이었다.
티타임치곤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귀부인과 호국은 딱히 이 상황을 꺼려하진 않았다. 오히려 정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원체 배워먹은 게 없는 호국도 일단 예의를 차린답시고 귀부인을 따라서 접시에 찻잔을 받쳐 들었다.
목넘김이 좋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엔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겉바속촉 쿠키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쿠키만 먹어대면 부스러기도 많이 흐르고 씹는 소리도 들리는 만큼, 적절한 타이밍에 케이크도 번갈아 먹었다.
'이정도 퀄리티면 가게에서 팔아도 되겠는데?'
역시 높은 신분에 대단한 사람은 고작 티타임을 즐기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좋은 것을 먹는구나 싶었다.
스펀지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포크에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잘렸다. 특히 달콤한 크림과 새콤한 과일 페이스트가 스펀지와 함께 입안에서 얽혀 연회를 벌이고 있노라면, 호국의 뇌는 급속하게 충전된 당분에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개가 뼈다귀에 미쳐 날뛰고, 고양이가 츄르에 환장하는 이유를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싸달라고 하면 욕 먹겠지?'
여기가 무슨 뷔페 음식점도 아니고. 호국은 염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눈길로 간식들을 내려다 보았다.
여자들만 카페에 우르르 몰려가서 먹을 수 있다는 몽블랑은 혀 끝에 닿기만 해도 사르르 녹았으며,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잼이 듬뿍 올라가 있는 타르트는 신음성을 토할 정도로 맛있었다.
맛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정말 싸가고 싶을 만큼. 뇌가 그렇게 인식하게끔 생각해야 한다.
"후우. 간식이라곤 항상 감자칩에 탄산음료만 달고 살았는데, 오늘 신세계를 맛봤네요."
비치된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호국은 간식만으로 차오른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 평소에도 일반인에 비해 조금 더 많이 먹는 편이었지만, 열량이 높은 것들을 닥치는대로 먹다보니 금세 배가 부풀었다.
"정말 좋은 곳인 것 같아요. 이렇게 평화롭게 티타임도 즐길 수 있고, 좋은 경치도 구경하면서 심신의 안정도 취할 수 있고. 저도 돈 많이 벌면 이런 집을 사야겠어요. 삭막하기만 한 아파트보단 훨씬 나을테니까요."
창가로 시선을 돌린 호국은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찬양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자격과 여건만 된다면, 호국은 생활 소음조차 잘 들려오지 않는 아파트 단지보다 이런 곳이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이건 위쪽에서 들은 얘기인데, TF에선 보너스 휴가도 준다고 하더라고요. 분명 해외 여행 같은 걸 보내줄 것 같은데...어딜 가도 여기만한 곳은 찾기 힘들겠죠."
애잔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혼잣말을 툭툭 내뱉던 호국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업무가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다는 의미로 일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화장실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호국이 부모로부터 남의 집에 방문했을 때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원칙을 상기했다. 첫째 냉장고 함부로 열지 않기, 둘째 방문 함부로 열지 않기, 마지막으로 화장실 사용은 꼭 말하기.
귀부인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에 있던 노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호국은 그의 안내를 받아 1층의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호국은 '귀'를 통해 노집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런 저택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양변기 위에 대고 토악질을 해댔다.
"그웨에에에에......!"
새하얀 변기 안에 쏟아낸 내용물은 이미 호국의 위 안에서 반쯤 섞인 것들이었지만, 무엇을 토해냈는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쿠키, 케이크, 타르트 따위의 간식들이 흐물흐물한 상태로 나왔을 뿐이다.
호국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것들은 틀림없이 평범하게 맛있는 간식거리들이 소화되다 만 토사물이었다.
"후우, 속이 더부룩했는데 좀 낫네."
-괜찮으십니까?
한동안 잠자코 있던 프롯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니 어쩌면 꾸준히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호국의 '귀'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넌 어린 애들이 왜 편식을 하는지 알아?"
-뜬금없군요. 일반적으로는 특정 음식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어린애들은 부모님이 주면 주는대로 넙죽넙죽 다 받아먹고 크기 때문에 호불호라는 개념이 없어. 내가 기억하기로는 나도 어릴 때 그랬었고. 그런데 이런 나도 싫어하는 음식이 있어. 왜 그럴까?"
-성장하는 과정에서 맛의 기호가 변했기 때문 아닙니까?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이 단맛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단맛을 좋아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병적으로 단맛을 싫어하는 인간도 있습니다.
"난 부모님이 나물 무침이라고 속인 파래 무침 먹었다가 싫어하게 됐어."
-......
"파래 무침이란 게 사실 생긴 것만 보면 정말 나물 무침처럼 생겼거든. 약간 비릿하지만 시원한 냄새와, 거무죽죽한 색감, 흐물거리는 식감. 근데 막상 입에 넣고 보면 나물 무침따위랑은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이 없어. 비린내가 진동하고 상상했던 것 이상의 식감이 날 괴롭혀. 그래서 난 지금도 파래 무침을 싫어해."
식탁에 파래 무침이 올라오는 날은 호국이 작정하고 불 속성 효자가 되는 날이었다. 누구는 밥에 콩을 넣은 것 정도로 짜증을 낸다고 하지만, 호국에게 있어서 파래 무침이란 순간적인 분노를 주체하지 못 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하나 트라우마가 생겼어."
-아.
"냄새도 괜찮고, 모양도 예쁜 간식들을 볼이 미어터지도록 집어넣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 맛, 그 식감이 아니었어."
쏴아아아아아아.
변기의 물을 내린 호국은 물로 입을 헹군 뒤에 단언했다.
"이제 난 간식거리도 못 믿겠어. 세상에 그렇게 맛대가리 없는 쿠키, 케이크, 타르트가 어디 있어? 그딴 걸 카페에서 비싼 돈 주고 사먹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낸 호국은 역시 자신에겐 싸구려 감자칩과 탄산 음료가 어울린다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생각해보면 나같은 놈한테 고급 디저트는 뭔가 좀 아니었던 것 같아.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파는 대용량 과자가 딱이지."
-꼭 그런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내 혀는 이미 그런 싸구려 과자에 길들여져 있는 거야. 간식으로 감자칩을 먹고, 야식으로 라면을 안 쳐먹으면 못 배기는 몸이 된 거라고!"
주먹을 불끈 쥔 호국은 자신의 입맛이 돌이킬 수 없을 때 까지 싸구려에 절여졌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 했다.
"인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카페 가서 아메리카노 빨고 디저트도 낭낭하게 챙겨먹으면서 염장지르는데! 난 가상 현실에 접속도 못 하는 주제에 인싸 문화도 못 즐기는 찐따가 된 거야!!"
-아마 평범하게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만 아니라면.
"자신이 없어. 카페 가서 비싼 돈 주고 시킨 디저트를 입에 넣은 순간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을 자신이 없어! 웬 찐따가 도저히 못 먹겠다고 환불해달라고 하면 카페 직원이 어떤 눈으로 보겠어?"
커피의 커 자도 모르는 놈이 대뜸 에스프레소를 샷으로 즐기겠다고 주문하는 것 만큼이나 웃기는 꼴이 될 것이다.
호국은 또 한 번 인싸로부터 멀어진 자신이 너무나도 창피해진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답시고 넙죽넙죽 받아쳐먹지 말걸......"
-...TF에선 직원이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의료 복지를 아끼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마음이 안정되는 신경안정제 투여 및 전문 상담사의 카운셀링을 받아보실 수도 있습니다.
"약은 됐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호국은 프롯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전문가의 IQ를 신뢰하지만, 동시에 약과 주사기는 믿지 않았다. 그것들을 믿었던 어린 시절의 호국은 고통만 받았으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온 호국은 때마침 반대편의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원피스 같은 일체형의 펑퍼짐한 옷에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복장. 호국이 기억하기로 이런 저택에서 그런 복장을 갖추고 있을 사람은 가정부 밖에 없었다.
'나도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 줄까?'
엄밀히 말하자면 호국은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지만, 일단 이 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직원이기에 그정도 부탁은 가능할 것 같았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가정부가 사라진 곳으로 들어간 호국은 그곳이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와 연결된 부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공간인 것 치곤 맛 좋은 냄새가 풍기진 않았다. 음식의 열기도,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움도 존재하지 않는 이름만 부엌인 공간.
당연하지만 가정부의 모습따윈 보이지 않았다. 먼지 가득 쌓인 식자재 창고는 호롱불 하나만 밝혀져 있을 뿐, 따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샛길이나 구멍도 없었다.
"남의 집으로 치면 여기가 냉장고이긴 한데...냉장고 문을 원래 이렇게 활짝 열어두나?"
-슬슬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서 또 그것들을 먹으라고? 어림도 없지. 가볍게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좀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갈 거야."
-하지만 게스트인 가드가 화장실을 간 뒤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쪽에서 다시 집사를 내려보낼 겁니다. 그런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 보단......
"내가 집주인 앞에서 토하는 게 훨씬 더 곤란한 상황이야."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고집을 부리는 프롯을 조용히 만든 호국은 제법 큰 식자재 창고를 싹 뒤졌다.
혹시 가정부가 무거운 식자재를 꺼내려 하면 자연스럽게 도움을 줘서 부탁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컹.
끼익끼익 울어대는 나무판자 위를 걸어다니던 호국은 식자재 창고의 중심부에서 발이 푹 내려앉을 만큼 기이한 감촉을 느꼈다.
"뭐야 이거?"
마치 이곳에만 물침대를 깔아둔 것 처럼 물컹물컹한 뭔가가 밟혔다. 신기하게도 호국이 발을 떼면 토옹 하고 튀어오르는 탄성을 자랑하며 주변과 같은 나무판자 바닥으로 돌아갔다.
발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탱탱한 고깃덩어리를 실로 봉합해서 나무 판자처럼 보이게 칠만 해둔 바닥이었다. 단숨에 호국의 호기심 게이지를 MAX까지 채워버렸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우리 부모님이 남의 집 냉장고나 방문 함부로 열지 말랬지 바닥 판자 떼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거든."
프롯이 누가 그런 걸 굳이 주의 주겠느냐고 따지기도 전에 호국이 먼저 물컹한 바닥에 손을 밀어넣어 억지로 잡아뜯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난 나무판자(물컹함) 아래로 칠흑같은 어둠과 사다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신축성 뛰어난 나무판자가 구멍을 덮어주는 천막 역할이었던 셈.
개미 부대 작업복에 딸려오는 작업공구에서 휴대용 손전등을 꺼낸 호국은 아래를 비춰보았다. 꽤 밝은 빛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설마 아래에서 대마초 재배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
서양인이 살고 있는 대저택. 식자재 창고 아래에 감춰진 굉장히 깊은 구덩이. 자연스럽게 범죄 수사극을 연상한 호국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아래로 내려갔다.
한 번 결정을 내린 호국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안 프롯은 더이상 그만두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올라오자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무슨 보험 사기꾼도 아니고 설마 사고가 일어날 곳까지 찾아가서 다쳐주겠어?"
-실시간으로 그러고 계십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야."
-그렇게 쓰는 속담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럴 때 아니면 속담을 언제 응용해보겠나 싶어서 막 내지른 호국은 거의 미끄러지듯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구덩이 위에서 흘러들어오는 호롱불의 빛도 희미해질 때까지 내려왔을까, 호국은 지면에 발이 닿자맞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손전등을 비춰보면 발 아래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바늘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가 아니라 바늘 속에서 모래를 찾아야 할 만큼 많았다.
"이거 고철상에 싹 가져다 팔면 짭짤하겠는데?"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렇게 방치되어 녹슨 바늘에 찔리면 파상풍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호국은 장갑 낀 손으로 바늘을 휘적휘적 저어보았다. 개미부대에서 대 화학전에도 쓸 만큼 밀폐성이 보장된 장갑이라 바늘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쌩바늘 뿐이네. 파도파도 바늘밖에 안 나와."
마치 전 세계의 바늘을 죄다 이 넓은 지하에 처박아 놓은 것 같은 광경이었다. 시험삼아 바늘 하나를 집어든 호국은 유독 바늘 끝이 검붉게 물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늘 끝이 워낙 뾰족하고 가늘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의 모든 바늘들이 그러했다. 마치 무언가를 찌른 뒤에 용도를 다해서 버려진 것 처럼.
"전 세계의 배 아픈 사람들 손이라도 따줬나."
무심하게 바늘을 내던진 호국은 급격하게 흥미를 잃었다. 이렇게 바늘뿐인, 그야말로 바늘지옥인 이곳에 달리 뭐가 더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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