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23화 (123/209)

< 경비 업무 일지 : 귀부인(2) >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이지."

-그건 어떤 맛입니까?

"평소라면 절대로 날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부끄러움과 치욕을 감수하면서 내게 깎듯이 대해주는 맛."

그리고 그 맛은 현재진행형으로 호국이 여동생에게서 느끼고 있는 맛이었다. 어감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느끼고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춰 선 기사들의 중심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간 호국은 아름다운 분수대를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현대 사회에선 이런 저택을 볼 기회가 인터넷을 제외하면 아예 없었는데,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는 것을 즐기는 호국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업무도 하고, 개인적인 욕구도 채우고, 겸사겸사 안주인과 안면도 틀 수 있을테니 일석삼조 아닌가.

'이 저택의 주인은 분명 남산만큼 푸짐한 뱃살에,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주르륵 미끄러지는 팔자 콧수염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이겠지.'

또래보단 어른들과 얼굴을 맞댈 기회가 많았던 호국은 상대가 어른일수록 편하게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럭비공마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나, 급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노는 또래들에 비하면 훨씬 나으니까.

실제로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랫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경청하고, 눈치있게 맞장구 쳐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는 군대에서도 일맥상통하는 원리였는데, 선임들 역시 눈치있고 뒤를 잘 핥아주는 후임을 아끼는 구석이 있었다.

시작은 미소부터 할지, 예의바른 인사부터 할지 고민하던 호국의 앞에서 갑자기 저택의 중앙 현관이 열렸다. 동시에 달짝지근한 냄새가 흘러나와 예민한 호국의 코를 간질였다.

멋없게 열리던 정원 입구와는 달리, 고풍스러운 멋이 있는 목재 현관이 부드럽게 열리면서 한 노인이 마중을 나왔다.

회색으로 물든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흐트러짐 하나 없었으며, 주름진 얼굴이 밋밋하게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폼나는 외알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군더더기 없는 집사 복장과 순백색의 장갑은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완벽한 집사야. 부럽네."

-...저런 집사를 원하십니까?

이어셋을 통해 살짝 삐친듯한 음성이 흘러들어왔기에 호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사나 가정부는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나 쓰는 거야. 돈 많고, 지적이고, 권위가 있지만 동시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그런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당장 41일 전까지만 해도 호국은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놈이었다. 군을 막 전역하고 자동화 공장에 처박혀서 허송세월 하고 있었는데 누굴 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가끔 보면 가드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첫 월급으로 천만 단위의 금액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일반인은 첫 월급을 그렇게 받지 못 합니다. 대단한 사람들이나 받는 거죠.

호국이 말없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쳐를 취한 집사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프롯은 과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들이 들었으면 흔한 사탕발림으로 치부했겠지만, 호국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가상현실에 접속하지도 못 하는 놈이 대단하기는 무슨......"

프롯의 칭찬을 가볍게 웃어넘긴 호국은 풋살을 해도 될 만큼 넓은 1층 중앙 현관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에는 아름답게 세공된 인공 보석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고고하게 매달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샹들리에 추락 장면에 써도 될 만큼 대단한 장식물이었다.

사실 목 아프게 위를 올려다봐야 하는 샹들리에보다 더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층계 중간 지점의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초상화였다. 거기엔 낯익은 귀부인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앉아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건물 양식이나 장식물의 형태를 보건대 시대적 배경은 17세기의 중세 유럽을 표방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고용인들 생김새는 중세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실제론 어땠는데?"

-귀족의 대저택을 지키는 사병이라도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중무장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수가 너무 적습니다. 또한 그 시대의 집사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괜히 일보러 왔다가 지루한 역사 수업 하게 될 것 같아 호국은 걷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마침 노집사는 호국을 2층으로 안내해주었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통해 척봐도 대단한 사람이 머무를 것 같은 방문 앞으로 데려갔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더 강해졌다.

노집사가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어주었다. 호국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프롯이 경고하듯 속삭였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지노에서 다른 ES와 접촉하는 것과, 특정 구역에서 ES와 접촉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이미 몇 번인가 느껴보셨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똥개도 제 집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 얘기잖아."

굳이 ES와 똥개를 비교해야겠느냐마는, 프롯은 대충 맞다며 얼버무렸다. 호국이 경고를 한다고 해서 무섭다며 업무를 내팽개치는 인물도 아니고, 반대로 업무외 목적으로 은폐실을 방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호국은 어느 구역으로 가서 어떤 ES를 만나든, 반드시 업무를 우선시했다. 가령 겉보기엔 친분을 쌓은 것 처럼 보이는 6-01과의 관계도 항상 첫 업무의 시작과 동시에 이뤄지는 과정일 뿐이지, 호국이 그것을 업무보다 우선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자신이 돈을 받는 이유는 업무를 하기 때문이지, 남들과 시시덕거리며 카지노에서 놀고 먹기 때문에 받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옛 방식으로 무식하게 밀가루와 설탕을 써서 만든 쿠키와 케이크로 가득한 티파티용 테이블이 호국을 반겨주었다.

프롯은 물론이고, 이전 관리봇을 포함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가드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저택 바깥에서 내부 사정을 살피거나, 드론을 띄워서 정찰만 하고 물러났었다.

가끔 실험 목적으로 연구원들에 의해 저택 내부에 진입하게 된 가드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기사나 정원사에 의해 도륙되었다.

호국이 무심하게 지나쳤던 정원, 아름답게 정돈된 나무와 수풀 사이에서 정원 가위를 들고 눈을 빛내고 있던 정원사들이 나서지 않은 건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집사가 마중을 나와서 최소한의 협조를 해준 건 연구원들이 직접 내려왔을 때 뿐이라고 되어있지만.'

프롯은 굳이 그런 기록을 말하진 않았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간 호국이 또 엉뚱하게 받아들이고 이상 행동을 보일 게 뻔했으니까.

프롯 역시 호국의 목줄이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호국이 한 것은 우선 청결 상태 점검과 환기의 유무, 그리고 창가의 채광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집무실이라기보단 휴게실에 가까운 장소였기에 당연히 호국 또한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있는 귀부인이 이곳에 머무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 문제없네. 제주도 지천에 널려있는 싸구려 호텔들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개인...거주지와 숙박 시설을...비교하는 건 조금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어쩐지 지지직 거리는 잡음 섞인 목소리로 프롯이 반문했다. 하지만 제주도 숙박 시설의 행태를 잘 알고 있는 호국이 단칼에 쳐냈다.

"빌어먹을 감귤밖에 없는 섬이면 숙박 시설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아무도 개선할 생각을 안 하잖아."

제주도의 진실을 알게된 이후부터 호국은 제주도를 까내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어딜 가든 튀어나오는 감귤 상품부터, 관광객을 등쳐먹으려는 바가지 상술, 게다가 잠깐 들러본 숙박 시설 또한 영 좋지 않았다.

차라리 시설로 돌아와 침낭 속에서 자는 게 훨씬 더 낫겠다고 생각될 정도.

투덜거리며 자연스럽게 테이블 앞에 앉은 호국은 여느 때처럼 귀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설마 이곳의 거주자(ES 6-199)가 그녀일 것이라고는 호국도 몰랐지만, 카지노에서 자주 보던 사이라 거리낌은 없었다.

귀족 앞에선 귀족의 법도에 걸맞는 예법을 차려야 한다는 사실도, 문외한인 호국에겐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호국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아한 예법으로 빈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찻잎을 뭘 썼는지, 얼마나 깊게 우려냈는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던 호국은 우선 냄새부터 맡았다.

홍차에서 느껴지는 감미로운 냄새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한국의 무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보리차와 비교를 하자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새하얀 김이 모두 설탕으로 이루어진 것 처럼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집이 참 좋네요."

업무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남들과 어울리는 것. 호국은 이것을 시간외 업무라고 변명하면서도 내심 즐겼다.

요즘처럼 다들 가상현실로 도피해버리는 시대는 말동무를 찾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인터넷이라면 아직도 게임 상대나 대화 상대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가상현실에게 상당부분 빼앗긴 상황.

비록 또래가 아니더라도 상대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호국 또한 최대한 어울려주고 싶었다. 호국의 겉치레에 귀부인은 면사포를 쓸어넘겨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신기하게도 호국의 대단한 눈썰미로도 그녀의 얼굴만은 전부 볼 수 없었는데, 정확히는 입과 코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계속 응시하고 있으면 시야가 크게 요동치거나, 아예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사람과 대화할 땐 꼭 시선을 마주보면서 대화하라고 하셨지.'

상대가 묘령의 여인이라고 해서 숫총각인 호국의 시선이 오갈데없이 요동치는 건 오히려 상대에게 큰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잘난 사람들은 자신을 좀 더 봐줬으면 하는 욕망이 있는 법이니까.

평상시 이상으로 눈에 힘을 빡준 호국은 그녀의 새하얀 얼굴과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에 집중했다. 시선을 맞출 수는 없어도 대화중에 얼굴은 꼭 봐야겠다는 고집이었다.

사실 카지노 바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 칵테일을 홀짝이던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전체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보다 비스듬하게 한쪽 면만 바라보는 것도 미(美)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보려면 전체를 봐야 한다.

그 어떤 조각상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외관, 깨끗한 모래사장처럼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 곱고 뽀얀 피부, 찻잔을 접시에 받치며 우아하게 들어올리는 행동 하나하나가 미(美)의 극치였다.

'...그런데 내가 그런 방식도 알았나?'

미(美)는커녕 예술에도 관심없었던 호국이 미의 극치니 뭐니 하다니. 웃기지도 않을 노릇이었다.

일부러 눈에 주었던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홍차를 입가에 갖다댄 호국은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입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은 혀와 뇌가 녹아버릴 것 처럼 진하고 달달한 설탕의 맛이 아니었다.

"......"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호국은 찻잔에 담겨 있는 붉은 액체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최고로 감미로운 홍차였다.

꿀꺽꿀꺽.

입을 달싹이며 목울대를 크게 움직인 호국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확실히 막 끓인 차인 만큼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열기가 불에 의해 달궈졌기 때문에 올라오는 열기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접시에 담겨 있는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입안 가득 부드럽고 펑펑 터지는 뭔가가 씹혀 식감이 아주 신선한 쿠키였다. 바삭, 촉촉을 모두 사로잡은 전설의 쿠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꿀꺽.

"맛있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