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귀부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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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31번 실험 보고서
-대상 : 귀부인
-특이사항 : 큼지막한 칵테일캡에 화려한 장식을 두르고 있으며 전형적인 귀부인의 화사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어떤 방법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는 면사포를 착용해 절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실험 개요 : 접근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정했다. 1번 접근 방식은 연구원들이 온화한 태도로 그녀에게 다가가 영어, 불어, 포르투갈어 등을 사용하여 신상정보를 캐내는 것. 2번 접근 방식은 상대를 분위기로 압도하는 경비들이 그녀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보여 겁을 주는 것이었다.
-1번 실험 내용 : 실험을 위해 단독으로 접근한 4급 선임 연구원 돌로레스 수잔이 그녀가 앉아있는 티파티 테이블의 맞은 편에 앉은 순간 그녀의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결과 : 그러나 놀랍게도 돌로레스 수잔은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한 채, 성대가 손상되어 꺽꺽대는 목소리로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모든 대화는 실패로 돌아갔고, 돌로레스 수잔은 끝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부산물을 모두 수거했을때, 그 안에서 생전 처음 보는 짚인형이 발견되었다. 짚인형 속에는 돌로레스 수잔의 나이가 약 7세일 적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치(젖니)가 발견되었다. 또한 짚인형은 그녀의 부산물과는 전혀 다른 거무스름한 액체가 일부 묻어 있었다.
-제 832번 실험 보고서
-대상 : 귀부인
-특이사항 : 추가 사항을 확인중
-실험 개요 : 2번 접근 방식을 곧바로 실행
-2번 실험 내용 : 그녀를 위해 준비된 티타임을 즐기기에 알맞는 인공 정원에 모든 경비 인원이 무사히 진입한 것을 확인. 그러나 이후 통신 두절.
-결과 : 인공정원 내부에 설치된 모든 CCTV가 손상된 것을 확인. 인공정원의 벽면에는 무언가로 벅벅 긁어댄 것 같은 흔적이 상당했으며, 대량의 혈흔이 발견되었으나 경비팀의 시체는 발견할 수 없었다. 3급 경비팀장 막스 배넌은 모든 실험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 연구 지휘자인 최고 수석 연구원은 이를 거부하고 안드로이드를 투입. 약 1시간 후, 모든 안드로이드는 그녀의 충실한 '기사'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모든 실험은 중지되고 기동타격대 2개 중대를 투입, 안드로이드를 원거리에서 격파후 귀부인을 제 6 처리시설에 은폐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 건지 우리는 단 하나의 진실조차 알아내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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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여동생을 괴롭혀준 호국은 속이 뻥 뚫린 기분으로 B40으로 복귀했다. 여동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의 커피에 탕비실 소금을 한 숟갈 크게 퍼부어주고 왔던 것이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거하게 커피 분수를 뿜었을 여동생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하아...너무 행복해. 이런 직장이라면 휴가 없이 365일 즐겁게 일할 수 있어."
B40의 중간거점을 넘어 엘리베이터를 갈아탄 호국은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그런 호국에게 프롯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핀잔을 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난 이유가 여동생 분의 커피에 고작 소금을 타기 위해서였습니까?
"걔는 꼴에 머리 쓴답시고 아침을 반드시 토스트와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거든. 커피로 정신을 맑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나 어쨌다나. 한 번은 부모님한테 비싼 커피머신에 토스트기 사달라고 떼를 쓰기까지 했다니까. 덕분에 지금도 그 패턴을 잘 기억하고 있지."
-그러다 여동생분이 직장을 그만두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안 그만둬. 우리 가족들은 전부 고집불통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거든. 거기에 걔는 쓸데없이 자존심 강하고 오기가 있어서 누가 괴롭히면 더 맞서는 타입이야."
당연히 호국도 여동생이 대학 중퇴 무직 백수가 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기 때문에 장난(괴롭힘)에 어느정도 선은 그어둘 생각이었다. 가능한 오래오래 괴롭히려면 호국이 충분한 돈을 모아 퇴직 하기 전까지 붙들어둬야 하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다시 정상 업무 시작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휴식 기간에도 가드가 짬짬이 순찰 업무를 해준 덕분에 B41~B58 구역은 당분간 유지보수 작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카지노 고정 맴버들이 날 그리워하겠는데."
호국은 순수하게 실력이 중요한 게임이라면 카지노내에서 누구보다도 강했지만, 적절한 운과 심리전 능력이 필요한 게임은 호구중의 호구였다. 특히 6-01에게 털린 초콜릿 수가 하늘의 별 만큼이나 됐다.
한 번은 '운빨좆망겜!'을 외치며 초등학생처럼 테이블 샷건을 치던 자신이 부끄러워 도망치듯 카지노를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카지노는 다음에 또 즐기면 되니까. 그래서 오늘 업무 내용은 뭔데?"
-우선 B61 구역으로 가야 합니다. 그 곳에서 ES 6-199와 오직 그 개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집사', '기사', 그리고 '정원사'와 '요리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주 업무 내용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경비 업무란 건 어떤 일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상태만 확인하는 것 뿐이라면 호국도 편하고, 해당 ES도 편하다.
하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때부터 얘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거대 바퀴벌레와 정기적으로 '교감'을 하라거나, 투명하고 푹신한 무언가에게 3시간 59분이나 깔려있어야 한다면 업무 스트레스로 반쯤 미쳐버리는 것이다.
'그 바퀴벌레 새끼는 기껏 풀어줘도 돌아오고 지랄이야.'
영영 떠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거대 바퀴벌레는 틈틈이 랜덤한 구역의 복도 구석에 숨어 호국을 훔쳐보곤 했다. 그러다 들키면 '사사사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전에 신입에게 바퀴벌레 퇴치제를 주고 혼구멍을 내주라고 했지만 딱히 바뀐 건 없었다.
호국이 울분을 삭히고 있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부드럽게 B61 구역에서 멈췄다. 이전에 고장나서 마구 날뛰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음?"
호국이 엘리베이터를 나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복도의 중심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십자가 돌기둥이었다. 매끈하고 깨끗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였는데,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괜히 거룩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군대 종교활동은 불교가 최고였어.'
교회를 선택한 동기는 작은 쿠기를 받았지만 불교로 간 호국은 커다란 소보로 빵과 음료 세트를 받았던 것이다.
거룩한 십자가상 앞을 지나가며 호국은 대한민국 교회들이 좀 더 배포가 커지길 기도했다. 인간적으로 한창 때의 군인들에게 조그마한 쿠키는 아니지 않은가.
-이미 알고계시다시피 각 구역의 저위험군에는 고위험군에 은폐된 ES들이 탈주하지 못 하도록 잠시 시간을 벌어주는 특별한 장치들이 존재합니다.
"그럼 카지노는 어떻게 올라오는 거지?"
-카지노는 여러 ES들의 '본능적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영향을 하기 때문에 방문이 적극 권장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ES가 카지노에 방문하기 위해 특수 격리 컨테이너에 자진해서 들어가면 제가 기계팔로 직접 옮겨줍니다.
이제야 궁금증이 해결된 호국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자주 고장나는 이유도 호국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마구 이용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거대한 십자가상을 지나쳐 저위험군과 고위험군을 이어주는 돌계단을 내려가보면, 마치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에나 존재할 법한 거대한 철문이 호국을 반겨주었다.
철문 아래, 잘 깎인 석재 타일 위에는 머리 셋 달린 짐승 문양이 새겨져 있어 고풍스러움을 한층 더 했다.
철문 중심에는 사람이 직접 잡아당겨야 하는 손잡이 대신 보안 카드만 인식하는 터치패널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전 관리봇 시절엔 호국이 안전 점검 및 유지보수를 위해 은폐실의 문 하나를 열어달라고 할 때마다 잔소리를 들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굳이 보안 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프롯이 알아서 문을 열어주었다.
-업무를 진행하기에 앞서 ES 6-199에 대한 것이 재단내에서도 그다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을 유의하셨으면 합니다. 굉장히 위험하거나, 반드시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ES의 경우는 기밀 정보가 철저하게 감춰져 있는 반면, ES 6-199 처럼 아예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똑하신 연구원분들께서 일을 제대로 안 하나봐?"
-엘리트 집단조차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변칙적이거나, 수수께끼로 가득한 개체가 주로 그런 편입니다. ES 6-199는 변칙적이면서도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기에 많은 연구원들이 관찰 실험에 실패했습니다.
철문 치곤 삐걱대는 쇳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것에 의외성을 느끼며, 호국은 새가 지저귀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정원에 발을 들였다.
예전에 방문했던 B56의 저위험군에 형성된 밋밋한 식물원에 비해, 이곳은 숙련된 정원사의 솜씨와 노력이 사소한 부분까지 닿아있는 훌륭한 정원이었다. 가만히 풍경을 보고있노라면 예술가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 할아버지도 넓기만한 밭보다는 이런 정원이 딸린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 내가 돈 많이 벌면 그런 집을 사드리는 게 효도일까?"
-가드의 부모님에게도 사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만 효도는 맞습니다.
"그럼 다 사드릴 만큼 벌면 되겠지."
막연하게 30년쯤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 그정도는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던 찰나, 호국은 석재 타일 위로 울려퍼지는 규칙적인 금속음를 들었다.
분수대의 뒤편에서 2열종대로 걸어오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분수대의 양옆으로 갈라지며 호국을 향해 다가왔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기사들이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걸어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롱소드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면 보통은 지레 겁을 먹을 것이다.
물론 호국은 상대가 다짜고짜 검을 뽑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짜 상대를 죽이고자 마음 먹는다면 무기는 빼든 상태로 움직이는 게 낫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눈앞에서 여봐란듯이 검을 뽑아들어 공격한다고 해도 눈으로 보고 있기만 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연히 유지보수를 위한 안전 점검이었다.
"갑옷 상태는 좋아. 흠집은 좀 있지만 녹슨 곳은 없고 전체적으로 관리를 잘 했어. 삐걱대는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니 기름칠도 정기적으로 해준 것 같은데?"
-사람의 손길을 자주 타는 물건인 만큼 관리를 잘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이전 관리봇의 관찰 기록에 따르면 이전 경비팀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중을 나온 것은 '기사'가 아니라 '집사' 였습니다.
"큰 일 보시는 중이겠지."
호국은 기사들의 떡대 너머로 고풍스러운 저택을 바라보며, 이런 양식의 건물 화장실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했다.
어쩌면 꿈 속에서도 보지 못 했던 황금 휴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때, 선두의 기사 중 한 명이 호국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뻗어 무언가를 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방문증이나 초대장따위는 없었던 호국은 얼떨결에 자신의 ID 카드를 제시했다.
이윽고 홍해의 기적처럼 기사들이 가로막고 있던 길이 크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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