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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121화 (121/209)

< 경비 업무 일지 : 40일째(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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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자신을 청소부라고 착각하며 화를 꾹꾹 눌러참다가 결국 폭발해버릴 때, 호국은 최고로 high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들러붙는 이두근과 연구원들을 잠시 뗴어놓은 호국은 모니터룸 구석에서 시원한 쌍화차를 들이켰다.

-저분은 가드의 여동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겁니까?

인간의 생태, 특히 형제지간의 먹고 먹히는 관계를 잘 모르는 프롯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긴, 가족과 정기적으로 안부 연락을 하며 월급을 받자마자 일부를 뚝 떼서 용돈까지 부치는 호국치곤 상당히 이상한 반응이었으리라.

"간단해. 내가 여동생한테 당한 게 많아서 그런 거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당하셨습니까?

"꼭 말해야 해?"

-AI는 가장 객관적으로 상황과 인물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동생분이 잘못한 게 맞다면 저 역시 가드를 거들겁니다.

호국은 잠시 머릿속으로 자신들의 상하관계를 정리해보았다.

김호국 : IQ 84

김세희 : IQ 115

프롯 :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함

똑똑한 프롯이 도와준다면 제 잘난 맛으로 사는 여동생을 골탕먹이는 게 훨씬 더 쉬워질 것은 당연했다. 어디 그뿐인가? 프롯은 이 시설의 관리봇도 겸하고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뭐든 할 수 있었다.

가령 증거를 없앤다던가, 알리바이를 만들어준다던가 하는 지능전도 가능할 터. 세계 최고의 대기업에 입사해 코가 높아질대로 높아진 여동생을 갈굴 생각에 벌써부터 손이 떨렸다.

"뭐부터 얘기할까? 어릴 때 내 간식 뺏긴 거? 바가지 금액으로 숙제 대신 해주던 거? 아니면 푹신한 내 침대 힘으로 뺏아간 거?"

-......

기억력이 좋은 호국은 장장 10분 동안 자신이 여동생에게 당했던 수치와 모욕에 대해 낱낱이 읊었다. 호국의 10대는 여동생의 엉덩이에 깔려 지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처참한 패배 기록들로 가득했다.

"조금 전에 시험 삼아 걔 움직임을 살펴봤는데, 지금 힘으로 붙으면 확실하게 내가 이겨. 10초도 안 걸려서 제압할 수 있어. 그런데 막상 그러자니 영 아닌 것 같아. 다 큰 어른이 동생을 힘으로 이기면 폼이 안 나잖아?"

프롯은 굳이 사내 부조리로 괴롭히는 건 폼이 사냐고 되묻지 않았다. 호국이 말은 그럴듯 하게 해도 사실 타인의 시선 보단 자신의 만족감을 더 우선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제와서 힘으로 짓누르는 건-너무 쉬우니까- 만족할 수 없으니까 야금야금 정신적으로 괴롭혀주겠다는 의미였다.

-가장 쉬운 괴롭힘은 일감을 잔뜩 몰아주는 겁니다. 신입의 실전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업무를 잔뜩 맡기는 수단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무난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걔가 일에 파묻힌다고 우는 소리 하는 애는 아닐걸. 내 한 달치 여름방학 숙제도 앉은 자리에서 다 끝내버린 적이 있거든. 그리고 일을 많이 주면 많이 주는 만큼 잘난 척 해댈 게 뻔해."

-여동생분에게 일감을 몰아줄 수록 그녀가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기 때문입니까?

"맞아. 내 23년 오빠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직감이 말해주고 있어. 보나마나 식사 시간 되면 내 앞에 앉아서 '내가 없으면 업무가 안 돌아가네' 같은 식으로 자랑할걸."

-사이가 안 좋긴 해도 서로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일을 아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연구원다운 일을 주지 않는 건 어떻습니까?

"드라마에서 본 적 있어. 책상 빼기라고 하던가?"

프롯은 옛 자료를 뒤져 TF식 자진퇴사권고 메뉴얼을 보여주었다.

무턱대고 '처리'하기에는 직원이 과거에 세운 공이 제법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능력이 부족해져서 TF가 데리고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되는 직원을 합법적으로 방출하기 위한 메뉴얼이었다.

-자진퇴사권고 메뉴얼에 따르면 해당 직원이 맡은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업무를 할당한다던가, 혹은 굉장히 위험한 현장 업무를 할당하는 방법이 일반적입니다. 그게 먹히지 않으면 24시간 모니터링 요원으로 지정해버립니다.

"잠도 못 잔다고?"

-자는 건 상관없지만 절대로 지정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식사도, 생리활동도 모두 지정석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너무 비인도적이야."

식사는 둘째치고 화장실을 가지 못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호국에겐 세계 최대의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납치범이 호국에게 화장실 금지를 명령하고 TF의 기밀 정보를 요구한다면 모두 불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좀 더...치욕적인 방법은 없을까? 저 콧대 높은 자칭 엘리트가 부들부들 떨 만한 그런 거."

-간단합니다. 직접 발로 뛰게 하십시오.

"자세히 말해봐."

-보통 연구원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스마트패드나 만지작거리거나 개인 실험을 하곤 합니다. 애초에 책상 앞이 익숙한 족속들이라 하루의 반을 책상 앞에서 보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책상에 못 앉게 할 만큼 굴리면 됩니다.

"굴린다...굴린다...그건 또 내 전문이지."

호국은 아련한 군 시절의 악몽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힘든 훈련과 경계 근무, 기타 잡무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주말. 늘어지게 한숨 더 자려는 순간 귀신같이 영내 방송이 울려퍼지기 시작하고, 행보관의 일광건조와 세탁, 청소 명령이 떨어진다.

-홀애비 냄새 안 나게 창문 싹 열고, 날씨 좋은데 일광건조도 좀 하고, 괜히 먼지 안 날리게 청소도 해둬. 여러 번 말하지만 이 행보관은 지킬 것만 지키면 터치 안 하는 성격인 거 알지?

그럼 아침 일찍부터 가상현실에 접속하려던 상, 병장들을 비롯해서 호국을 포함한 아랫것들까지 육두문자를 지껄이며 주말의 피 같은 여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선진병영이라며 개인 침대도 존재했는데, 정작 주말에도 개인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적었던 아이러니함! 호국은 원치 않음에도 굴러야 했던 불합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그 방법이라면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하는 자칭 엘리트 연구원에게 큰 치욕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당장 하자."

프롯이 뽑아준 몇 가지 '치욕적인 업무'를 기억하며, 호국은 한 연구원에게 자신의 자리를 안내받고 있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윗사람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데도 팔짱을 끼고 있는 꼬락서니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롯, 아버지한테 전화좀 걸어줘."

-걸었습니다.

스마트패드와 연결된 이어셋을 통화 모드로 바꾼 호국은 한창 가상현실에 있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지금 에베레스트 산맥 하드 모드 도전 하고 있다. 용건만 간단히 말...이런 씨발!

쿠르르르르! 스피커 너머로 설산의 산사태 소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다행히 김선열이 예비 목숨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아 호국은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여동생이 이번에 저랑 같은 직장에 취직했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아, 어디 시설 연구원으로 간다는 얘기는 들었다.

"제가 거기 경비로 일하고 있어요."

-역시 내 자식들이야. 똑똑한 애는 전문직! 안 똑똑한 애는 단순 노동직! 아주 자랑스러워!!

"예, 저도 하루 20시간 가상현실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아버지, 여동생이 어디서 나쁜 물을 좀 먹은 것 같아서 그런데 혹시 제가 합법적으로 교육을 좀 해도 될까요?"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때리진 마라. 네 엄마 알면 다 죽는다.

"에이, 어떤 미친 오빠가 자기 동생을 때려요."

호국은 속으로 아깝다는 말을 연발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뗐다.

"그럼 '교육'은 해도 된다는 거죠?"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 너 어릴 때 세희한테 막 얻어 맞고......

"쟤도 이제 사회인인데 최소한의 개념은 있어야죠. 직장 선배인 제가 도와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아, 최씨! 핀을 그렇게 박으면 라이프라인이 못 버틴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암벽 등반 원데이 투데이 해봐?!

어른의 허락까지 받은 호국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에 물건을 놓기 시작한 김세희에게 다가갔다.

"이야, 여기 놀려오셨나봐요? 화장품에 세면도구에 간식거리까지?"

김세희가 자신의 책상에 개인물품을 배치하다말고 움직임이 멎었다. 모기 소리보다 작게, 일반인이었다면 절대로 듣지 못 했을 씨로 시작해서 발로 끝나는 욕이 새어나왔다.

"여기 소풍왔어요? 세상에 이 과자 칼로리좀 봐.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까먹으면 하루마다 뱃살이 1cm씩 늘겠는데요?"

"그만큼 머리로 소모하는 게 많은 직업이라서요. 아 그 쪽은 소모하는 게 상대적으로 적을테니 이런 걸 보면 놀랍긴 하겠네요."

"저는 살 안 찌는 체질이라서요. 그런데 어차피 햇빛도 못 보는 직장인데 화장품은 뭐 이리 바리바리 챙겨오셨어요? 아, 혹시 전등 불빛만 받아도 피부가 안 좋아지고 그러시나?"

"남자들이랑 다르게 여자들은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기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남자들도 피부 관리에 힘 쓴다던데 경비 아저씨는 그런 거에 관심없으신가봐요?"

호국이 경비라는 설명은 듣고 왔는지 청소부에서 경비로 호칭이 바뀌었다. 게다가 은근슬쩍 아저씨라고 꼬집는 솜씨도 아주 일품이었다.

"어휴, 저는 워낙 피부가 좋아서요. 화장품을 안 쓰면 못 버티는 피부를 가진 누나에 비하면 타고났다고 할 수 있죠. 혹시 피부 이식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싼 가격에 해드릴테니까."

"땀내나는 남자 피부를 이식하느니 차라리 그대로 살고 말겠죠. 씻어도 씻어도 몸에서 땀내가 난다면...좀 그렇잖아요?"

"아무렴요. 독한 향수 냄새로 가리지 않으면 직장에서 후덥지근한 땀내를 풍겨댈 게 뻔한 사람은 피부 이식을 받을 자격이 없죠. 제가 실언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

"어머, 혹시 향수 쓰시나봐요? 어디 제품이죠? 땀내 향수를 아주 잘 만드는 회사인가봐요~."

"진정한 사나이라면 향수로 냄새를 덮을 필요가 없죠. 혹시 인중에 땀이 많이 나시는 거 아닌가요? 그럼 인중 냄새가 그대로 올라갈 것 같은데......"

꿀꺽.

옆에서 두 남매의 치열한 혈전을 지켜보던 이두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전생에 진짜 카인과 아벨이었나?'

뒤늦게 인사 발령 정보를 확인한 이두근은 김세희가 가드-079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심장이 멎을 뻔 했다. 그녀의 개인 교육을 맡기로 한 상두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혹시 겁없이 가드-079의 여동생을 겁박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서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어뜯을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조사관들이 움찔움찔 떨 정도였으니까.

"아니 그보다 저 양반 IQ 84 아니었나? 갑자기 왜 저렇게 말을 잘해?"

"혹시 여동생분 괴롭힐 때만 지능이 미친듯이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죽음을 앞둔 바퀴벌레처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인마."

문제는 그 말같지도 않은 광경이 실시간으로 그들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드-079와 4급 신입 연구원 김세희가 TF에 입사한지 정확히 40일째 되는 날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서로의 살점(멘탈)을 사이좋은 물어뜯는 남매의 사투는 밤 늦게까지 이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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