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40일째(2) >
"으허어어어어......"
B43에 위치한 사우나. 호국은 지난 날 동안 이 사우나를 거의 이용한 적이 없었지만, 그 흑백으로 뒤덮인 세계를 빠져나오면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냥 가드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실을 이용해도 충분했겠으나, 역시 뜨끈한 물에 몸을 불리고 피로를 털어내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세낸 것 처럼 혼자서 사용할 수도 있고."
보통은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이 좋다, 시원하다, 같은 말을 하며 욕탕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다 함께 뜨끈한 물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흘려보내는 건 좋은 일이 맞다. 다만 누구나 한 번쯤 사우나를 홀로 독점해보고 싶은 법. 과거 로마 황제가 그런 기분을 만끽했던 것 처럼.
우선 가볍게 샤워해서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샴푸로 한 번, 린스로 한 번, 머리를 두 번이나 감는 건 귀찮으니까 둘 다 섞어서 감는다.
대머리들은 느낄 수 없는 두발의 상쾌함을 모공으로 하나하나 느끼면서 열탕에 발부터 집어 넣는다.
뜨거운 열기에 몸이 적응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허벅지, 복부, 목까지 물에 잠기도록 한다. 이후에는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넓은 욕탕에서 진정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입에서 절로 행복에 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오면 효과가 있었다는 의미다.
지친 삶의 활력소, 일에 지친 샐러리맨이 주말 내내 잠만 자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 셈이다. 고작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것 만으로도.
'아버지가 왜 등산을 끝마치면 사우나에 가셨는지 알겠어.'
해로운 병균마냥 몸속 곳곳에 침투한 부정한 것들도 이 마법의 뜨끈한 물에 닿는 순간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다.
평생 잔병치레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호국은 감기로 열이 올랐다가 어느 순간 말끔하게 낫는 기분을 이해하지 못 했다. 여동생은 몇 번이고 잔병치레를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게 어떤 기분인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여동생 못 본지도 꽤 됐네.'
지금쯤이면 대학교는 한창 여름방학 중일테고, 호국과 마찬가지로 더럽게 성실한 여동생은 졸업 준비와 동시에 취직을 위해 이것저것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호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님과는 달리 여동생은 무려 40일이나 얼굴을 못 봤음에도 통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용돈까지 두둑하게 보냈건만, 문자 메시지로 "ㄱㅅ." 한 번 보낸 게 고작이었으니까.
"누굴 닮아서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 거지? 일단 난 아닌 것 같은데."
뜨거운 속성을 지닌 호국은 매우 열정적으로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난 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부모님께 연락도 꾸준히 드리고 있고, 두둑하게 받은 월급의 일부도 드렸으니까.
하지만 자신에겐 항상 앙칼진 목소리와 흘겨보는 듯한 시선만 보내던 여동생은 뜨겁다기보단 차가운 속성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를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
'아니.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IQ가 110을 넘는 애한테 그러면 안 되지.'
호국과 IQ를 합치면 정확히 199를 기록하는 김씨 일가 최고의 수재. 머리가 똘똘한 만큼 노력도 어마어마하게 하는지라 여동생은 항상 학교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아왔다.
아마 두 사람이 지금처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고 해도 호국은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면, 여동생은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나 미래 따위를 예측하고 있으리라.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여동생이 대신 해줬을 때는 그렇게나 귀엽고 믿음직했는데, 격투기를 배우자마자 오빠를 찍어누르고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는 악귀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고통스러웠던 기억 같은 건 아예 잊어버리기도 한다던데, 호국은 여동생에게 당했던 기억도 그대로 남아있어 입맛이 썼다.
"진짜 딱 한 대만 때려보고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40일간 제대로 된 연락 한 번 없고, 성의있는 감사 인사도 하지 않으며, 오빠 걱정도 안 해주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여동생. 시원하게 쥐어박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과거에 쌓인 무언가가 싹 사라질텐데.
어느덧 수십 분이 지났음을 알고 호국은 열탕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불어오른 몸에서 간만에 때좀 벗겨내고, 아주 격렬하게 바디워싱좀 해주면 된다. 그게 남자의 목욕이니까.
"후우!"
후끈한 열기를 내뿜으며 수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니 기분 좋은 시원함이 전신을 어루만져 주었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냉장고에서 막 꺼낸 커피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주고, 헤어 드라이기를 마구 흔들면서 호들갑스럽게 머리를 말렸다.
약간 시큼하면서도 느끼한 냄새가 나는, 대체 뭔지도 모를 투명한 로션을 양 손에 뿌린 뒤 뺨을 찰싹찰싹 때려주는 것으로 겨우 목욕이란 이름의 작업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방심해선 안 된다. 목욕을 끝내고, 커피 우유까지 원샷 했다고 해서 사우나에 온 목적을 모두 달성한 건 아니니까.
호국은 텅 비어있는 카운터를 살피곤, 카지노에서 되돌려받은 카드로 수정과와 과자를 멋대로 계산해서 자리를 옮겼다. 사우나에 왔으면서 사우나를 즐기지 않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피로는 완전히 가셨지만, 열기가 올라오는 토굴 속에서 잠시 자신을 가두고 여유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었다.
최소한 그 여유가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잊게 해주진 못 해도, 흑백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게는 해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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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타공인의 엘리트입니다."
뚜벅뚜벅.
매끈한 금속 플레이트 위를 걷고 있는 한 남성의 말이 느리지만 강단있는 말투로 울려퍼졌다.
"여러분은 지난 40일간 이곳에서 숙식하며, 일반인은 평생 접하기도 힘든 각종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작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뿐이라면 굳이 이곳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겠죠.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바로 '경험' 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험 말입니다."
우뚝 멈춰선 그가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모두 20대의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이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것들을 접하며 자란 다양한 가능성들.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이 저토록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마침내 40일이라는 하드코어한 교육을 완벽하게 수료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은 모두 울상이 되어 교육소를 떠나야 했고, 아마도 기억이 지워졌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훈련생들만이 자신은 성공했다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으리라.
"저는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교육소를 거쳐간 그 어느 누가 자랑스럽지 않겠느냐마는, 요즘 같은 시국에 성공적으로 교육을 끝마친 여러분은...특히나 자랑스럽습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푸흐흡, 큭큭.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교육 과정에선 그 누구보다도 무서웠고 엄했던 인간이, 엘리트라고 불리며 자라왔을 소년 소녀들에게 "네 머리통에 든 건 뇌가 아니라 피클인가보다!" 하고 소리쳤던 양반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본인이 말하고도 우스운 이야기라는 건 아는지, 남자는 겸연쩍은 듯 밋소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엘리트인 여러분을 가르치면서 저 또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제대로 지도할 수 없었고, 제 방식이 잘못 됐기 때문에 누군가는 효율적으로 배울 수 없었습니다. 예, 압니다. 48시간 연속 실험을 시켰으면서 그것 하나 똑바로 못 하냐고, 어떻게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냐면서 윽박지르기도 했죠. 스트레스로 폭식을 한 청년에겐 네 머리에 갈 당분을 왜 배가 먹고 있냐고 비아냥댄 적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걸 교육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명백한 괴롭힘이었죠. 그럼에도 저는 그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범생이의 팔치곤 꾸준히 운동을 한 흔적이 있는 매끄러운 근육을 지닌 소유자. 이번 기수의 훈련생 중 가장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여성. 유일하게 대한민국 출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수료를 끝마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말해보세요 수석 수료자."
"엘리트란 주변의 모든 환경에 적응하고, 대응하고, 바꿔나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예요."
"맞습니다. 엘리트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예측해야 하고,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며, 모든 것을 성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때문에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못 하고 휩쓸리는 자는 엘리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점에서 여러분은 모두 성공한 엘리트입니다. 단순 노동자라면 자신의 단순한 일을 배우는 것에 40일은커녕 4시간도 걸리지 않았겠지만, 여러분은 정말 많은 것을, 단기간내에 배워야 했기 때문에 40일의 지옥 훈련 속에서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40일의 시간을 최고의 효율로 활용하여, TF를 위해 헌신하고, 나아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영웅 후보로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여러분은 성공했습니다."
그는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여있는 수료 증서와 함께 비닐팩에 포장된 흰 가운을 하나 집어들었다.
"이제 여러분은 정식으로 TF 소속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동네에서 신동이니 천재니 하고 추켜세워지던 떨거지들이 아닌, 범세계적인 엘리트의 반열에 올라선 겁니다. 수석 수료자, 단상 위로 올라오세요."
손을 들어 대답했던 여성이 흑빛의 긴 생머리를 흔들며 단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 한복판에 위치한 한 연구원 훈련 시설에서 그녀는 40일간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것이다. 눈 앞의 흰 가운과 수료 증서를 받기 위해서.
"수석 수료자. 당신은 이제부터 4급 연구원입니다. 수석 수료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5급 인턴 연구원으로 시작하겠지만, 당신만은 특별합니다. 내가 본 그 어떤 이들보다도 가장 엘리트라는 말에 어울리는 여성이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네며 흰 가운과 수료 증서를 받아든 순간. 그가 고개를 살짝 낮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제 6 처리시설로 가게 될 겁니다. 하청 업체에서 먼저 일하게 될 인턴들과는 달리, 당신은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겁니다. 잘 할 수 있겠지요?"
"...물론이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자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로 그게 엘리트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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