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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116화 (116/209)

< 경비 업무 일지 : 종양 제거(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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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착지할 때 생긴 충격으로 헛숨을 내뱉은 호국은 한동안 기침을 해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나니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폭발의 충격파에 휩쓸린 건물들이 일부는 무너져 내렸거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건물보단 튼튼하네.'

개미부대 작업복의 성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맷집이 탈 아시아급 맷집이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조금 뻐근한 것만 빼면 컨디션이 나쁘진 않았다.

지표면을 휩쓸어버린 바벨탑 폭발은 주변 일대를 싹 날려버렸는데, 호국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백색 폭발의 구름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 무지막지한 폭심지에서 용케 살아남았구나 싶었다.

"그래서 넌 누구냐?"

전후처리를 확실히 해야 하는 만큼, 호국은 자신을 허공에서 낚아챈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분명 생김새는 신입과 똑같았다. 잔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기동타격대 복장을 갖추고 있는 것 하며, 풀 페이스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또한 호국이 기억하는 한, 신입과 눈 앞의 괴한은 체격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전체적인 색이 순수한 백색이라는 점만 빼면 신입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국은 상대를 신입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딱 하나, 호국의 대단한 기억력 속에 존재하는 신입의 특징과 눈 앞의 괴한이 지닌 특징이 달랐던 것이다.

"신입한테는 그런 냄새가 안 났어."

코를 찌르는 달콤한 냄새. 막 오픈 준비를 끝마친 빵집에서도 이보다 더 강렬한 냄새를 풍길 수는 없을 것이다.

꽃이 꿀벌을 유혹하는 것 처럼, 파리지옥이 날벌레를 유혹하는 것 처럼 눈 앞의 괴한에게선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개미부대 작업복에 딸려 나오는 방독면을 서둘러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호국은 어쩌면 '식인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한은 대답 대신 신입이 곧잘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었다. 그 이상한 향기만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신입이 흰 페인트라도 뒤집어 썼겠거니 했을텐데, 호국은 점점 더 눈 앞의 괴한이 꺼려졌다.

허공에서 붙들릴 때는 잘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털끝 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물론 호국이 싫어한다고 해서 상대도 호국을 싫어하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 괴한은 호국이 한 걸음 떨어지면 똑같이 한 걸음 만큼 다가왔다. 사실 그러한 행동만으로 좋고 싫음을 분간하는 게 쉽겠느냐마는, 적어도 호국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말도 안 듣고 농땡이도 곧잘 피우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진짜 신입이 그리워진 호국이었다.

호국이 물러서고, 괴한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악순환이 반복되던 바로 그때였다.

"찾았습니다......!"

퍼엉!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자그마한 폭발이 일어나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팔원숭이가 떠오르는 양 팔, 타조알을 얹어놓은 것 처럼 이목구비가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얼굴, 그와 대조적으로 슬렌더하면서도 큰 체형에 딱 맞는 맞춤식 정장. 그는 호국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척 하며 바벨탑 안에 가뒀던 장본인이었다.

"...피리부는 사나이?"

"제가 피리나 불 것 처럼 생겼습니까?"

입이 없어도 말은 잘 하기에 피리도 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게 꽤나 못마땅한지, 긴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러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잔해를 치워냈다. 무슨 굴삭기도 아니고 팔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건물 잔해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비산했다.

"당신의 침투 경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만...당신이 얘기했던 엘리베이터란 것은 어디에도 없더군요."

순간 '눈이 없으셔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려던 호국은 입에 지퍼를 단단히 채웠다. 아무리 상대가 악인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나.

탈모 환자가 겨울이 너무 춥다고 불평할 때 두발이 없으셔서 그래요, 라고 말해봐라. 그 날 머리털 풍성한 사람들 대상으로 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호국이 말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문 사이에도 비쩍 마른 사내는 화가 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본래 이 세계와 당신이 사는 세계는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거대한 벽이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왕래하려면 벽을 무너뜨리거나, 아주 잠깐이지만 구멍을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 두었던 사냥용 구멍이 모조리 막혀버렸더군요. 당신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직후에!!"

"......"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대량의 제물을 바친 봉인 의식? 차원의 벽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결계? 그것도 아니면......"

그는 길쭉한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어서 호국에게 달걀 같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마 당신이 이 세계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는 매개체 입니까?"

333번도 그렇고 눈 앞의 달걀귀신도 그렇고, 호국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주변이 없는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다.

기특한 프롯은 IQ 84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요점만 딱딱 짚어서 설명해주는데,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어찌 된 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들만 아는 얘기를 주구장창 떠벌리는 건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불장난을 한 것만 빼면 딱히 사고를 치진 않았다. 평소의 그가 조금 불건전하고 성실한 호국이었다면, 조금 전까지의 호국은 건전하면서도 성실한 호국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상대는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거슬릴 정도로 요란한 코웃음을 치며 엿가락처럼 긴 손가락으로 호국의 가슴팍을 쿡쿡 찔러댔다.

"그럼 당신이 이 세계에 방문하자마자 '그녀'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제 동료들은 처음부터 당신을 잡아 고문하자고 했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더 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작 당신 같은 인간 하나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인 것 만으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거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대로 정말 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럴 재주도 없고.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당신을 고문할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사라진 그녀의 행방도, 당신이 이 세계에 방문한 목적도,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두 알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양 팔을 크게 벌린 그는 타원형의 얼굴을 끼긱끼긱 소리가 날 정도로 옆으로 틀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탑은 무너졌지만, 탑에 축적해둔 에너지의 대부분이 소실됐지만, 당신이 탑을 폭파시켜준 덕분에 우리의 믿음직스러운 '동료'를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탑을 폭파한 건 제가 아니......"

"본래는 죽어버린 세포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 한 인간 과학자가 그 사체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리와의 계약으로 넘겨준 것! 유래없이 강력했던 그 존재를 이런 방식으로 되살려낼 수 있을 거라곤 저조차도 알지 못 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호국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멍하니 서있는 괴한이었다.

"막대한 힘이 느껴집니다. 차원의 벽 따위는 한 손으로도 가볍게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힘이! 그러니 당신을 저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사드리겠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는 바벨탑을 재건축할 필요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으니까요!"

호국은 제멋대로 환호하고, 저주하고, 감사하고, 감탄하는 양반을 상대로 어떻게 장단을 맞춰줘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침 기분도 좋아보이는 것 같아서 그냥 조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요?"

"인간들은 저를 '슬렌더 맨' 이라고 부르더군요."

빠악!

눈 깜짝할 사이에 충격 진압봉을 뽑아든 호국이 슬렌더 맨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파직파직 튀어오른 전기가 그의 흰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갔지만, 슬렌더 맨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과거에도 당신과 같은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겁없이 포식자에게 덤벼드는 것들. 제 주제도 모르고 목숨을 함부로 버리는 것들. 그런 하등한 것들에게 최소한의 교양을 가르치는 방법은...심플하게 죽음 뿐이었습니다."

가늘고 긴, 나뭇가지 같은 손이 뻗어나와 단숨에 호국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다. 긴 팔을 휘두르는 것 치고 상당히 재빠른 손놀림이었지만, 호국의 눈은 정확히 슬렌더 맨이 휘두르는 팔의 궤도를 읽고 있었다.

"기껏 대단한 '눈'을 빌려 쓰고 있으면서도 고작 상대의 움직임을 보는 게 전부란 말입니까?"

"?!"

호국에게 향하지 않았던 다른 팔이 단단한 아스팔트 지면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호국의 동물적 감각이 위험 신호를 알렸지만 그보다 발 아래에서 무수한 손이 올라오는 게 훨씬 더 빨랐다.

"눈이란 단순히 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연상하고, 현재를 주시하며,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것. 이 세계에 버려진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주려 했습니다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불화의 싹을 여기서 잘라버리는 것도......!"

슬렌더 맨의 날카로운 손날이 호국의 목에 사선을 그으려는 찰나, 허공에서 맥없이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오, 오오오오......?!"

뿌득, 뿌드드드득!

가는 팔이 손아귀에 붙들려 으깨질 수록 기괴한 비명소리의 음량이 높아졌다.

"당신이 왜...! 당신을 소생시킨 그 순수한 에너지를...지금껏 누가 모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콰직!

기어코 팔이 끊어진 그는 절규를 내지르며 물러섰다. 호국을 옭아매고 있던 무수한 손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이이익! 멍청하기는! 당신을 죽이고! 반신에게서 강제로 적출해 이 세계로 버린 존재들이 바로 인간이란 걸 잊어버린 겁니까! 그 힘만 있으면! 그 힘만 있으면 모든 인간들을......!"

태앵!

입이 없으면서도 재주좋게 나불대던 슬렌더 맨의 열변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 했다.

그의 등 뒤에서 등장한 '진짜' 신입이 그의 뒤통수를 프라이팬으로 냅다 찍어버린 것이다. 흑색의 인간들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던 무쇠 프라이팬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슬렌더 맨의 뒷목을 잡아 지면에 꽂아넣은 신입은 발로 몇 번이나 짓밟아 아주 땅에 파묻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구멍 속에 수류탄을 까넣는 것으로 뒤치기 콤보는 깔끔하게 끝났다.

익숙한 수류탄의 폭발음과 구멍 속에서 튀어오른 파편의 비가 잠시 후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호국의 진압봉 일격을 맞고도 끄떡없었던 상대가 그정도 공격에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신입은 아예 잔해를 끌어와서 구멍을 통째로 덮어버렸다.

"묘비도 하나 세워줘라."

호국이 시킨대로 커다란 묘비까지 하나 세운 신입은 흘가분한 기색으로 호국에게 다가왔다.

"아, 그래. 마침 잘 됐다. 여기 네 흉내를 내는 이상한 놈이......"

지독하게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괴한을 소개시켜주려던 호국은 질척질척한 흰 점액질만이 지면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 점액질은 뱀처럼 빠르게 기어 움직이더니 그대로 신입의 발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있었는데 이젠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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