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종양 제거(2) >
333번은 처음 만난 애송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곳에 왔다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우스운 상황에 입가를 씰룩였다.
"인간이 맞냐고? 진심으로 나한테 그딴 질문을 던지는 거냐? 그럼 1분만 시간을 줘. 자지러지게 웃고 대답해줄테니까."
배를 부여잡고 끅끅 웃는 시늉을 해보이자 눈 앞의 괴물은 뭐가 그리도 불편한지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역사상 인간을 공격한 사례밖에 존재하지 않는 놈들이, 자신들의 사냥감으로 잡아온 인간을 '인간이 맞냐'고 묻는 상황이라니! 이 어찌 웃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나?
적당히 웃음을 터뜨린 333번은 이내 정색하며 대답했다.
"네 놈들이 잡아놓고 색을 빼려던 놈이 인간이지, 그럼 인간이 아니겠어? 좀 얼빵하고 어딘가 결여된 것 같은 놈이긴 해도 인간이 맞아. 그러니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똑바로 서 새끼야. 네 놈 대갈통을 깨버리려고 여기서 25년 간 기다렸으니까."
"인간들은 항상 그런 식이었지요.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제가 마을에서 쥐떼를 모두 몰아냈을 때, 그들은 누구 하나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야 마을에 불을 질러서 쥐떼를 몰아냈으니 마을 사람들이 화가 나지 않겠어?"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그게 333번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탄생하게 된 기원인 것은 맞지만, 그 원전(原典)이 100% 진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피리를 불어 수 천 마리가 넘는 쥐떼를 모조리 마을에서 끌어내 강으로 뛰어들게 했다면 그건 신화적인 역사로써 정당하게 기록되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 처럼.
하지만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민간 설화에서 그쳐버렸고, 그마저도 상당 부분 각색된 채 현대 사회에 공개되었다.
덕분에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일반인'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지금, 놈은 횃불 대신 피리를 들고 있으며, 가해자일 뿐인 사기꾼이라는 악명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속은 선량한 피해자 취급을 받고 있다.
"네 놈이 피리를 불어댈 때 마다 펼쳐지는 그 안개. 사실은 불길이 번져 발생한 연기잖아? 그 연기속에서 고통받는 건 쥐새끼들이 아니라 무고한 인간들이고."
"......"
"아, 그래도 원전에서 전혀 각색되지 않은 부분이 딱 하나 있었지. 불길에 휩싸인 마을이 자욱한 연기로 뒤덮였을 때, 마을의 아이들을 새끼줄 꼬듯이 엮여서 끌고 갔었지. 그래서 그 애들은 어떻게 됐지? 응? 모조리 이 탑의 재료로 쓰였나? 이 역겨운 사기꾼 새끼야."
놈을 살살 자극하던 333번은 상대를 약올리듯 자연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의 혀 위에는 'R' 형태의 룬 문자인 라이도(Raidho)가 새겨져 있었다.
"짓눌려라."
"이익!"
놈을 중심으로 엄청난 중압이 가해졌으나, 동시에 놈이 한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333번에게 투척했다.
괴물과 대적자의 싸움은 단 한 수만으로 판가름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333번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든 단검이 1초만 더 빠르게 던져졌었다면, 그의 미간에 단검이 닿기 직전 탑이 갑자기 흔들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 찰나의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을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지진이라도 온 것 처럼 거대한 바벨탑이 출렁출렁 흔들리고, 333번에게 날아들었던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폭탄을 터뜨리진 않았는데?!'
바닥에 짓눌린 채 가장 연약한 손과 발부터 찌부러지기 시작한 피리부는 사나이를 뒤로 하고서, 333번은 서둘러 '폭탄'을 안쪽으로 옮겼다.
이 탑은 자신이 바친 25년의 세월보다도 훨씬 더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반대로 이곳에 25년이나 바쳤기에 알 수 있었다. 탑이 벌써 완성될 때도, 무너질 때도 아니라는 것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지.'
가장 처음 세워진 주춧돌. 즉 초석은 모든 건축물에 있어서 그 상징성이 비할 데 없이 크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일이 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초석을 잘못 세우면 건축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인간들은 '터'를 살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고, 웃기지도 않는 제사장이나 주술사 따위를 찾아가 초석을 세워도 괜찮은 최적의 위치, 최적의 시간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333번이 폭탄을 이끌고 들어간 장소에는 순백색의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흑빛의 비석이 존재했다.
"그렇겠지.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염원이 그 어떤 인간들보다도 강했을 놈들이, 자신들의 염원을 이 바벨탑에 새겨넣지 않았을리가 없지."
이 반전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괴물들이 각자의 염원을 '내용물' 삼아, 흑빛의 비석이라는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초석으로 세워 바벨탑의 근간으로 삼은 것이다.
한 마디로 추함과 역겨움이 점칠된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이 감옥에서 빠져나와 지구에서 깽판을 치겠다고? 어림도 없지. 네 놈들에겐 여기가 딱 어울려."
준비한 폭탄들을 초석 주변에 차곡차곡 쌓은 333번은 바닥에 짓눌린 채 피를 토해내고 있는 괴물을 돌아보았다.
"아이가 모래성을 거의 다 만들었을 때 발로 걷어차서 박살내버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지? 지금 그게 내 기분이야."
333번은 거의 다 타들어서 간신히 불씨만 남겨진 담배 꽁초를 박스 위에 올려두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색을 지닌 불꽃이 검은 박스에 불씨를 옮기기 시작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이 암덩어리 새끼야."
지나가며 놈의 안면을 힘껏 걷어차준 333번은 순백색으로 가득찬 복도를 전력질주했다.
다시 한 번 그가 혀를 내밀었을 때,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것 같았던 바벨탑의 외벽 일부가 박살나며 구멍이 생성되었다. 딱 한 사람이 몸을 던져 탈출할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크기의 구멍이었다.
------
다른 길목에서 검은 박스를 가득 실은 트럭을 발견한 호국은 망설임없이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이곳의 인간들은 죄다 안전 불감증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달리는 트럭 측면에 누가 들러붙어도, 그 누군가가 운전석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까지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트럭 운전수인 흑색 인간이 반항하려 했지만 호국의 현란한 손기술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터프하게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휘둘러대기에 호국은 그 팔을 역으로 붙잡아 밖으로 끌어당겼다.
안전벨트도 하지 않은 놈이 무슨 수로 버틸 수 있었겠느냐마는, 호국이 생각해도 가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힘으로 운전대를 잡고 늘어졌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국의 자비없는 발길질은 필사적으로 트럭에 붙어있던 운전수를 떨궈내고 말았다.
처음에는 마네킹 같았던 흑색 인간의 정교한 형태도, 거칠게 바닥을 뒹굴면서 처참하게 박살났을 때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어버린 호국이었다..
자신은 멍청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자신의 영혼까지 깎아내면서 필사적으로 원했던 것을 구입하던 백색의 망령들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자신의 기억력이 원래 대단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좀 더 다른 무언가가 호국의 가슴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자신도 VR 기기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랬고.
영혼마저 깎아낼 정도로 무언가를 갈구했다면, 그들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깎아냈겠는가.
'분명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화장실에 못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비참했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심경을 제멋대로 해석한 호국은 저 앞의 바벨탑을 향해 트럭이 쭉 나아가도록 운전대를 맞췄다.
'이것도 따지고보면 불장난이지.'
트럭이 그대로 달리도록 둔 상태에서 성냥에 불을 붙인 호국은 운전석 뒤편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한가득 쌓여있는 검은 박스들. 저 안에 담긴 수많은 백색의 덩어리들은 누군가의 무엇이었을지, 호국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윽고 그의 손을 떠난 성냥의 불씨는 검은 박스에 옮겨 붙었다.
직후, 낙법을 취하며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린 호국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건물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의 시선 끝으로 이동한 불타는 트럭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바벨탑을 들이박았다.
콰가가가가가!!
"윽!"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터져나오며, 잠깐이지만 주변의 어둠을 걷어냈다.
호국이 사용했던 성냥의 불꽃과는 다른, 너무나도 밝고 아름답게 타오르는 백색의 불꽃이 바벨탑의 외벽 일부를 집어삼켰다.
치솟는 불기둥과 주변으로 마구 흩뿌려지는 파편들. 거리로 나온 수많은 흑색의 인간들이 환하게 밝혀진 바벨탑을 올려다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드라마 매니아인 호국은 그 광경을 보고서 한 남자의 명언을 떠올렸다.
폭발은 예술이다.
그러다 문득 등 뒤에서 따끔한 시선을 느낀 호국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부신 불빛 때문에 하필 자신이 숨어있던 영역도 밝혀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상대는 이미 호국의 위치를 파악한 뒤였다.
건물 벽 사이의 골목 속에서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며 순백색의 덩어리를 씹고 있는 그것은 커다란 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도마뱀이라고 해야 할까.
네셔널지오그래픽 애청자인 호국도 저 황소만한 크기의 괴생명체를 분류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처구니 없는 점은, 놈이 입 안 가득한 순백색의 덩어리를 씹어 삼킬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덩치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소만한 크기였던 것이 불도저 만큼 커지고, 이내 건물 외벽을 부수면서 집채만한 크기로 성장했다.
그렇게 무너진 건물들 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백색의 망령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들 소동이 일어난 것을 느끼고 건물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놈은 자신의 발 아래를 정신없이 기어다니는 백색의 망령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둠 속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을 만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이어지는 대학살극.
호국이 어떻게 손 써볼 틈도 없이 동굴 같은 입을 벌린 그것이 마구잡이로 백색의 망령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양껏 포식한 그것은 5층 건물과 맞먹는 크기로 성장했다. 마치 철을 먹으면 성장하는 민간 설화의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군대에서 총을 애인처럼 다루라고 가르친 이유를 알겠어."
총이 없으면 꼭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언제 어느 때라도 총을 지니고 다니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지키지 않은 호국의 잘못이 컸다.
눈 앞의 거대한 괴물에게도 성냥의 자그마한 불꽃이 먹힐지 안 먹힐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국은 천천히 성냥갑을 꺼내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호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거대한 구멍이 지면을 휩쓸며 쇄도하는 순간, 호국의 발치 앞에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났다.
콰앙!!
단단한 아스팔트 지면을 뚫고 올라와 괴물의 턱주가리를 어퍼컷으로 올려친 것은 상당히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검은 헬멧과 기동타격대 복장, 항상 무인편의점에 처박혀서 농땡이나 부리는 건방진 후임.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불린 적 없는 신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