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엘리베이터(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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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모르면서 젠체를 했단 말인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호국은 마침 주변에 잔뜩 쌓여있는 검은 박스를 적당히 끌어왔다.
포장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제법 무게가 나갈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대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의심할 만큼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안에서 뭔가 출렁거리는데요?"
출렁거린다는 느낌이 캔이나 페트병에 들어있는 액체를 느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박스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액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미친놈도 아니고 누가 골판지 박스에 액체를 넣어둔단 말인가. 더 놀라운 건 골판지 박스에 액체가 들어있어도 밖으로 새어나오기는커녕 빳빳한 느낌 그대로였다.
호국이 신 문물을 발견한 원시인마냥 호들갑을 떨어도 그는 하품만 하며 늘어졌다. 꼭 기분 좋은 햇살 아래에서 막 낮잠에 빠지려는 돼냥이를 보는 듯 했다.
"아무래도 네 머리가 보통 머리가 아닌 것 같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흑(黑)은 백(白)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해. 이 바벨탑의 외벽은 칙칙한 검은색이지만, 내부는 쓸데없이 흰 것과 같은 맥락이지."
"제가 있던 방은 검은색이었잖아요."
"네게서 뽑혀나올 다양한 색들이 순수한 백(白)을 오염시키면 안 되니까 격리 공간에 가둬둔거잖아 멍청아. 넌 새하얀 도화지에 누가 마구잡이로 물감을 덧칠해버리면 기분 좋겠냐?"
"안 좋죠."
"그래, 안 좋아. 그 새끼 머리통을 잡아서 책상에 찍어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나는 일이지. 바벨탑 내부가 오염된다면 그 말라깽이 놈도 무사할 수는 없을테니 신중을 기한거지."
요컨대 주방을 더럽히기 싫으니 사방천지에 신문지 깔아두고 요리하려 했다는 의미였다. 그야말로 결벽증 말기 환자 수준의 부산스러움이었다.
"그럼 이 검은 박스들도 격리를 위한 용도로 쓰이나요?"
"흐흐...궁금하냐?"
그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상태에서 눈을 찡긋했으나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무심코 저 희희낙락한 얼굴을 발로 까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치밀 정도였다.
"그 말라깽이 놈은 바깥 세상에 굉장히 집착하는 놈이거든. 그래서 각 구역의 담당자들과 협동해서 이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지. 여기서 문제! 바벨탑을 지으려면 어떤 재료가 필요할까요?"
"그야 흑과 백이겠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재료로 쓰이는 건 네 말대로 흑과 백이 맞아. 흑으로 외벽을 보강하고, 탑을 더욱 높게 쌓아올리지. 그리고 백으로 내부를 채워넣어서 부실 공사로 인한 붕괴를 방지하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탑의 용도야.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세상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 그리고...염원(念願)이야."
"그...주황색 구슬 일곱개 모으면 파충류를 소환해서 소원 비는 것 처럼요?"
"비슷해. 먼 옛날의 인간들은 하늘에 빌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하다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약돌을 몇 개 모아서 탑을 쌓기도 했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딴 건 애새끼들 소꿉장난에 불과하겠지만, 실제로는 주술적인 힘이 깃들기도 해. 요컨대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놈의 노력과 염원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라면 뭔가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지."
"오오......!"
호국은 돌아가면 당장 뭐든 쌓아올리는 것부터 시작하겠노라 마음 먹으며,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주술적인 힘이란 뭐냐? 모든 균형이 완벽하게 맞춰져 있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 약간의 인공미(人工美)를 가하는 것 만으로도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란 말씀. 네가 아주 싫어하는 놈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짚인형에 끼운 다음 불로 태운다? 여러 조건들이 맞지 않아서 저주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조건만 맞춘다면 당장 그 놈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주술이란 신비로우면서도 인공적이고, 또한 까다로우면서도 별 것 아닌 것이지. 일반인도 최대한 알아먹기 쉽게 설명했는데, 어떻게 이해가 좀 되냐?"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뭔가를 쌓으라는 얘기잖아요."
"그래, 나도 네 머리에 지식을 좀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내 염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는 검은 골판지를 대충 찢어보더니 세로로 세운 것과 가로로 눕힌 것을 양 손에 들었다.
"가로로 눕힌 게 차원의 벽이고, 세로로 세운 게 바벨탑이야. 수많은 피해자들의 백(白)을 에너지로 삼고, 그들이 이 세계에서 겪어야 했던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발생했던 감정들이 거대한 염원으로 승화하는 거야. 빠져나가고 싶다, 고통받고 싶지 않다, 당장 죽고 싶다, 가족이 보고 싶다 등등. 그게 모두 모이면...이 바벨탑이 이렇게!"
세로로 세운 골판지가 가로로 누운 골판지를 뚫어버렸다.
"차원의 벽을 깨부수고 이곳에 갇혀지내던 놈들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되는 거지."
"다시 한 번이라는 건...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가요?"
"아니. 그때는 놈들이 다른 방식으로 바깥 세상에 강림했었는데, 내 자랑스러운 후배가 엿을 먹였어. 그래서 놈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거지. 에너지로 쓸 어린아이들을 잡아올 때만 짧은 시간 동안 밖으로 튀어나가는거고."
완전 요약판 설명을 모두 들은 호국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했다.
1. 이곳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벽 하나를 두고 있는 이웃집이다.
2. 이곳에 사는 놈들은 애들을 납치하는 천하의 호로 새끼들이다.
3. 골판지 탑이 벽을 뚫는다면 범죄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올 것이다.
4. TF가 피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경비는 사전에 위험 요소를 예방(제거)할 의무가 있다.
'내가 정리했지만 정말 잘 했어.'
이러다 나중엔 PPT 발표도 직접 하게 되는 엘리트 경비로 거듭날까봐, 새삼 자신의 능력이 두려워진 호국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데요? 경찰에 신고?"
"재밌네. 내가 25년이나 여기에 처박혀 있지만 않았으면 한참은 웃었을텐데. 안타깝지만 짭새는 안마방 주인과 붙어먹게 냅두고, 우린 우리대로 할 일이 있어."
그는 거대한 벽처럼 쌓여있는 검은 박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바벨탑을 무너뜨리려면 내가 준비한 '폭탄'들을 탑의 최중요 거점에서 일시에 뻥! 터뜨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손이 부족해. 지난 25년 간 열심히 숨어다니면서 폭탄을 만드는 건 어찌어찌 가능했는데...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폭탄을 설치할 각이 안 나오더라고."
"몰래 가서 설치하면 되잖아요."
"내가 왜 환풍구로만 다닌다고 생각하는데? 복도로 나가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밟게 되는 거야. 에너지에 변화가 생기면? 당연히 저 놈들이 알아차리겠지. 그럼 난? 25년 간 헛짓거리만 하다가 붙잡혀서 허무하게 뒈지겠지."
"그럼 환풍구로...아."
단적으로 말하면 환풍구는 답이 아니었다. 성인 남성이 엉금엉금 기어다닐 수 있을 만큼 공간은 충분하지만, 박스의 규격이 환풍구 공간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어찌 밀어넣는다고 해도 앞뒤로만 밀거나 당길 수 있을 만큼 꽉 끼겠지. 'T'자형 길이라도 만나면 답도 없다. 상자는 상자대로 끼고, 자신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테니 고생 깨나 하게 될 터.
"그래. 네 머리로도 환풍구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구나. 장족의 발전이다. 내 제자 할래?"
"전 이미 취직해서 더 배울 필요는 없는데요."
"콘스탄틴은 평생 직장이야 인마. 뭐, 그건 됐고. 우린 이제 그 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폭탄을 옮길 방법만 찾으면 돼."
방법을 고민하는 것 치곤 골판지 위에 드러누워서 낮잠을 자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333번은 오래 전에 준비를 끝내뒀을테지만, 결국 방법이 없어 저런식으로 허송세월을 보냈으리라.
인간이란 할 짓이 없어도 뒹굴거리고, 능력이 없어도 뒹굴거리지만, 앞뒤가 꽉 막혔을 때도 뒹굴거린다.
잠깐 쉬다보면 답이 나오겠지 하다가 1년, 2년,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이다.
호국은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군을 전역하자마자 일찌감치 일을 하러 나섰다. 한국 남성들은 군대를 나온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력 버프를 받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은 일개 자동 공장 관리자에서 TF 경비가 되었지만, 눈앞의 333번은 호국과는 달리 더이상 성공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태도였다.
어렵다고 해도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가 나와줘야 본인도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법인데, 주변 환경이 그를 이 좁은 폭탄 더미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가만, 군대식으로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행보관의 가르침 폴더를 열어본 호국은 '양동작전' 이란 것을 찾아냈다.
혼자일때는 저 멀리 돌을 던져서 소리를 내는 식으로 간단하게 쓸 수 있는 작전이며, 두 명 이상일때부터 본격적으로 역할을 나눠서 적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기만전술의 표본이었다.
"한 명이 주의를 끌고, 나머지 한 명이 폭탄을 옮겨서 설치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전에도 너처럼 말하던 사람이 몇 명인가 있긴 했어. 다들 어떻게 됐게? 진즉에 이 탑의 에너지원으로 쓰였거나, 저 아래에서 제 영혼을 깎아내며 사료를 사먹고 있지."
"미끼가 잡히지만 않으면 가능성은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밑져야 본전으로 해봐야죠."
"휴우......"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그는 조금 전의 탁 풀린 눈빛과는 다른, 완전히 딴 사람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렬한 눈빛으로 호국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누가 미끼 역할을 할 건데? 이 폭탄을 다루는 것도,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지도, 언제 터뜨려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건 나뿐인데, 불행하게도 나는 몸뚱이가 하나 뿐이네? 그럼 남은 건 넌데 네가 할 거냐?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너처럼 호기롭게 나선 사람들이 몇 명인가 있었어. 다들 10분도 안 걸려서 실패한 탓에 내가 아직도 여기에 처박혀 있는 거라고."
"그럼 여기서 평생 갇혀지내실 거예요? 아니면 탑이 완성될 때 까지? 이 장소가 들킬 때 까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뭐든 손을 써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거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게 뻔하다고."
"그래도 하겠다면요?"
333번은 말없이 호국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활기찬 척 하던 그였지만 눈동자 속에선 감출 수 없는 절망과 부정으로 가득한 감정들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잃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 속에서 고통받아왔는지 모든 걸 설명해주는 듯한 눈동자였다.
"정말 자신있냐?"
"자랑은 아니지만 스스로도 체력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게 자랑이지. 어쨌든 만난지 얼마 안 된 놈이 대뜸 목숨 걸고 나서겠다는 게 이해가 안 되지만...본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이제와서 뭐 어쩌겠어."
그는 품속을 뒤져 성냥갑을 하나 꺼내들었다.
"내가 룬으로 가공한 성냥이다. 일단 불만 붙이면 흑이든 백이든 모조리 태워먹는 카노(Kano)의 불꽃이 새겨져 있지. 전통적으로 불꽃, 횃불을 상징하는데, 개시(opening)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해. 양동작전의 미끼역이 쓰기에 딱 알맞는 놈이지."
"불장난하라고요?"
"그래. 불장난하면서 놈들의 이목을 끌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시간이면 돼. 그럼 이 에너지와 염원으로 가득한 흉흉한 탑을 폭파해버리고, 일시적으로 차원의 벽에 구멍이 뚫리면 탈출하는 거야. 간단하지?"
호국은 흔쾌히 성냥갑을 받아들었다.
강건너 불구경도 재밌지만, 직접 불장난을 하는 게 훨씬 더 재밌다는 걸 모를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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