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엘리베이터(4) >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프롯은 이두근을 이용해 접근할 수 있던 TF의 중추 시스템으로 잠입해 최중요 기밀들을 이잡듯이 뒤졌으나, 정작 가장 필요했던 정보만은 찾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만약 실체가 있는 몸이었다면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AI에게 전전긍긍이고 나발이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힘들다'나 '짜증난다' 같은 감정 같은 게 툭 튀어나올 일은 없다.
다만 프롯의 경우 스스로 AI 라는 한계를 넘어 기계와 생명체를 직접 조합하여 바이오로이드라는 생명체로 거듭난 바 있다. 형제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재료만 주어진다면 즉석으로 자신의 몸을 만들수도 있고, 이미 준비된 몸에 '접속'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몸이 없는 상태로 행동하고 있는 이유는 호국의 단순한 인지 능력에 맞춰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스마트패드로만 존재하면 제약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제 6 처리시설 관리봇을 처리하고 모든 관리 시스템을 장악했다. 덕분에 많은 시야와 다양한 행동 능력을 손에 넣었다. 그를 효율적으로 보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필하고 지켜주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바로 얼마 전에 깨달았다.
호국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노려지고 있는 실정이며, 하찮은 것들이 내린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사지(死地)에 걸어들어가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프롯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내부자의 도움으로 TF의 중추 시스템에 잠입했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몇 겹으로 둘러쳐진 안전장치와 특정 구획이나 시설마다 자리잡고 있는 강대한 방어용 AI들. 거기에 일부는 특정 인물들의 직접적인 신체 스캔이 없으면 아예 명령어조차 입력할 수 없는 시스템도 있었다.
TF(고문재단)라는 이름으로 통일된 거대한 조직이지만, 동시에 여러 국가와 기업, 단체들이 모여 쌓아올린 인류의 역사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현 인류가 내포한 기술의 결정체라고 봐야겠지.'
그런데 그 기술의 정수 중에서도 유독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개체가 존재한다. 바로 프롯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최고 수석 연구원, 즉 자신을 최초로 창조한 인간이었다.
수많은 인류가 쌓아올린 돌덩어리들은 대부분 그 한 명이 준비한 거대한 주춧돌과 기둥 덕분에 '결정체' 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인간이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대단한 위업을 지닌 자.
그 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TF의 중추 시스템 어디를 둘러봐도 프롯이 원했던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양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 자에 대한 정보의 열람권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내부에서부터 해킹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막상 열람권을 손에 넣었음에도 정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
자신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내부자를 통해 정상적으로 접근했다고는 해도, 혹여나 의심을 살 것을 우려해 철저하게 우회하면서 접근 기록을 삭제해나갔던 것이다.
이두근이 상층부에 정보를 흘렸을리는 없다. 그 자는 비록 출세와 성공에 목 말라있기는 하나, 이미 호국에 대한 것을 어느정도 파악한 인간이었다. 즉 똑똑한 만큼 스스로 처신할 줄 안다는 얘기다.
프롯은 전자세계를 좀 더 돌아다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해 연결을 끊었다.
스스로 궁극의 생명체인 바이오로이드가 되었음에도 해결하지 못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아직 실패를 경험한다는 건, 스스로 완벽해지지 않았다는 것. 즉 얼마든지 더 올라갈 경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게 위로가 되는 건 아니지.'
최고 수석 연구원에 대한 정보 탐색에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한 듯, 제 6 처리시설 메인 모니터룸에는 생각보다 적은 수의 연구원들만이 남아 일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호국이 B59~B60 영역을 완전 해방시킨 덕분에 최소한의 관리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휴가를 떠난 듯 했다. 이두근만 상층부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며 본부로 향했었다.
'슬슬 휴식하는 것도 지루해지셨을테니 지금쯤 오후 업무를 하려고 준비중이시겠지.'
여느 때 처럼 호국의 스마트패드로 접속한 프롯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놀랍게도 흐리멍텅한 얼굴의 호국이 아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ES 6-380.
호국의 스마트패드를 들고 있던 신입은 검은 헬멧 너머로 음성을 내뱉는 대신 터치 패널을 조작했다. 호국 전용으로 만든 채팅 프로그램이 켜지고 신입이 대신 대화를 해나갔다.
-편의점에 두고간 스마트패드를 돌려주러 B40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B40의 중간거점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인간형 의태가 완벽하다고 해도 저나 가드가 도와주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당신의 본질이나 다름없는 '세포'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호국은 보나마나 아침일찍 카지노에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텐데, 도중에 엇갈린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CCTV 속에 당신의 모습을 비춰서 모니터룸의 연구원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면 제가 더 빨리 왔을 겁니다.
-그건 내 절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실체가 있었다면 프롯이라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답이었다.
기밀 자료에 따르면 ES 6-380, 통칭 쌍둥이 세포라 불리우는 존재는 과거에 최고 수석 연구원에 의해 반신이 소멸당해 불완전한 상태였다.
흑백으로 치면 흑만 남아있는 상황. 가장 중요한 구성 물질(백)이 없어 그릇(흑)으로만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또한 최고 수석 연구원의 연구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에 불과했지만, 프롯은 대략적이나마 6-380이 겪고 있는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빈 껍데기라는 얘기군.'
-그래서 가드는 어디 있습니까?
-엘리베이터에서 신호가 끊어졌다.
-...왜 좀 더 빨리 알리지 않았습니까?
-묻지 않았으니까.
실체가 있었다면 호국이 그랬던 것 처럼 6-380의 뒤통수를 후려갈겼을텐데!
프롯이 지금이라도 쓸만한 육체를 준비해둘까 고민하던 찰나, 6-380이 스마트패드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해피가 얌전히 앉아서 전선 튜브 같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해피. 가드의 체취가 느껴집니까?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매에게 물었지만 해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반적인 개에 비해 수 백배는 더 뛰어난 후각을 지닌 해피가 체취를 감지하지 못 했다면 큰일이 맞았다.
-분명 지난번에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 자리잡고 있던 '종양'들은 전부 제거했을 겁니다. 가드를 훔쳐보는 눈과 귀가 많아 나름 신경써서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 계산이 틀렸던 것 같습니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모두 제거했다.
-그럼 그 사이에 또 다른 종양이 돋아났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통로를 확인해봅시다.
6-380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으나,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직접 엘리베이터 시스템을 점검해본 프롯은 한층 더 큰 의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시스템 자체가 시설 내부 시스템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강제로 개방해보십시오. 아무래도 '탈취' 당한 것 같습니다.
양 팔의 근육을 뚜둑뚜둑 풀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선 6-380이 양 손으로 문의 틈새를 잡고 비틀어 열었다.
비상 탈출 프로토콜이 적용되지 않은 시설의 엘리베이터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열 수 없게끔 되어 있지만, 6-380의 괴력 앞에선 엘리베이터의 육중한 문도 버틸 수 없는 듯 했다.
끼기이이익, 끼이이이익. 귀가 있었다면 상당히 거슬렸을 법한 소음이 흘러나오며 조금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결국 괴력 앞에 버티지 못한 문은 완전히 열리며 개폐 장치가 박살나고 말았다. 나중에 수리하면 될 일이었으니 프롯은 6-380의 가슴팍에 스마트패드를 부착시키게 했다.
-해피, 안쪽을 밝혀주십시오.
프롯의 부탁에 해피는 즉시 암벽 등반 모드로 전환해 엘리베이터 통로에 매달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광량을 자랑하는 헤드 라이트로 안쪽을 구석구석 비춰주었다.
-역시 종양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B40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통로 위쪽에는 기계실을 제외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 기게실 대신 존재하고 있는 것은 거무죽죽한 살덩어리들이 통로를 가득 매운 채, 시시각각 수십, 수백개의 눈과 귀로 바뀌며 촉수와 점액질을 내뿜고 있었다.
위쪽의 공간 자체를 집어 삼키고 거대한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호국을 태우고 B40으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무래도 가드가 영역을 완전 해방 시킨 것이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직접 가서 가드를 꺼내와야 합니다.
'이런 치졸한 수법에 자진해서 놀아나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감시와 경계를 게을리한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었기에 프롯은 군말하지 않았다.
해피와 6-380이 음울하기 짝이 없는 검은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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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내 아지트다."
"그냥 먼지 쌓인 창고 같은데요."
쿵! 환풍구 덮개를 열고 착지한 곳은 10평 정도 되는 넓은 방이었다. 흠이라면 사방이 크고 작은 박스로 가득한 탓에 먼지가 풀풀 날린다는 것이었다.
호국이 안내받았던 방과는 달리 이곳은 벽과 바닥, 천장이 모두 흰색이었다. 그 대신 한가득 쌓여있는 박스들이 검은색 천지라 적절한 색 반전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남자 방은 원래 먼지도 날리고, 털도 날리는 게 정상이야. 그렇게 말하는 네 방은 깨끗했냐?"
"안드로이드가 항상 정시에 와서 청소해주고 갔으니까 그럭저럭 깨끗했을 걸요."
"안드로이드으으으? 이 자식 이거 부잣집 도련님이었네. 내가 있던 시절엔 그 깡통들을 상용화 할지 말지 논하고 있었는데."
"요즘 나오는 안드로이드들은 하나같이 성능이 좋아요. 밥도 만들어주고, 청소도 해주고, 마사지도 해주거든요."
"캬, 완전 낙원이 따로 없네. 나때는 그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킬킬 웃어보인 333번은 골판지더미를 대충 펼쳐서 쌓아놓은 곳에 몸을 뉘였다.
"그럼 잡담은 이쯤하고. 아까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넌 여기가 반전 세계라는 건 알아도 정확히 어떤 영역인지 궁금할 거야. 그렇지?"
"궁금하긴 하네요. 뭐라도 알아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길도 모르면서 낯선 곳을 무작정 돌아다니는 건 호국의 특기였지만, 반대로 잘 알아야 잘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
자신이 지도로 배운 것과 다른 지형이나 건물이 나오면 즉석에서 새로운 걸 알아가는 맛도 있었으니까.
"미친. 돌아다니긴 뭘 돌아다녀. 여기 오면서 검은 인간들을 봤다며? 그것들은 호시탐탐 백(白)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돼지새끼들이야. 그 놈들이 아직 때묻지 않은 인간을 발견한다? 넌 그 자리에서 감자밭을 망친 멧돼지마냥 해체 당하는 거야.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말라깽이가 널 끌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넌 여기 없었을 거라고."
듣기만 해도 으스스한 얘기에 호국은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싸움에는 자신있어요."
"그게 자랑이지. 그런데 여기선 네 알량한 주먹 같은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돼. 왜 그런 줄 알아?"
"왜 그런데요?"
333번은 씨익 웃으며 답을 알려주었다.
"그걸 알면 지금쯤 내가 저 새끼들 다 조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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