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10화 (110/209)

< 경비 업무 일지 : 엘리베이터(3) >

슬렌더한 체형의 남자가 호국을 데려간 곳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높고 거대한 탑이었다.

마치 새까만 밤하늘 처럼 탑 또한 칠흑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대체 어느 곳이 입구인지, 창문이 달려있기는 한 건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칠흑의 거탑은 주변의 모든 건물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 처럼 둘러쌓여 있었으며, 특정 건물과 벽을 맞대고 붙어 있었다. 탑의 크기가 워낙 거대한지라 주변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은 모든 백(白)을 응집한 흑(黑)의 탑입니다. 바깥 세상의 말을 빌리면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오...얼마나 높나요?"

"당신들께 닿을 만큼 높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요. 이것은 우리의 자랑이자 보배이며, 또한 영원불멸을 약속해주는 미래입니다."

꼭 서울의 63빌딩을 소개해주는 관광 가이드 같은 설명을 들으면서, 호국은 목이 빠져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자신의 대단한 눈썰미와 시력으로 올려다봐도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를 자랑했다.

이런 대단한 랜드마크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결국 답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난 잘 모르겠지만, 여긴 꽤 유명한 관광지구나.'

먹자 골목이 있고, 유명한 랜드마크도 있고, 야경도 끝내주는 장소라고 한다면 결국 관광지일 수 밖에 없다. 그게 IQ 84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답이었다.

문제는 TF 산하의 제 6 처리시설 엘리베이터를 탔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곳에 와버렸냐는 것이었다. 디멘션 점핑 트럭을 탔다면 모를까, 엘리베이터에 그런 기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정말 그런 기능이 있는 엘리베이터였다면, 그걸 알고도 내버려둔 회사 잘못이지. 이건 근로자 기만이야.'

돌아가면 따져야할 게 또 늘었다.

일전에도 특수 근무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느라 이두근의 진땀을 빼게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는 B59와 B60은 안전을 위해 순찰 업무 일정에서 빼버려도 된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일거리는 줄고, 월급은 그대로. 누구나 원하는 신의 직장인지라 호국도 좋게좋게 받아들였다.

거대한 바벨탑으로 가까이 다가간 슬렌더 체형의 남자는 희고 가는 손을 내뻗어 바벨탑의 외벽을 건드렸다. 그러자 칠흑밖에 보이지 않았던 외벽이 직사각형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두운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백색의 빛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긴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외다리를 건너기도 하면서 그를 따라가보니, 어느새 호국은 흑빛의 문을 앞에 두게 되었다.

"이 방 안에서 잠시 머물러 주십시오. 곧 당신의 '색(色)'을 빼내기 위한 준비를 해오겠습니다."

'VIP가 대접 받는 기분이네.'

이렇게 개인 룸 까지 배정받을 만큼 극진한 대접을 받는 건 군에서도 꽤 높으신 분들이 방문할때나 봤던 광경이었다.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호국은 심심찮게 부대를 방문하는 높으신 분들을 뵐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별을 단 장성이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행보관님이 나만 콕 집어서 잡일거리 병사로 써먹으셨지.'

장교들이 차고 넘치는 자리에 병사 계급으로 끌려가서 구경거리겸 일꾼이 되어야 했던 호국이, 지금은 누군가에게 대접-이유는 모르지만-받는 신세라니. 세상 일은 역시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큰 키와 기세에 맞지 않게 정중히 인사를 해보인 그는 다시 백색의 길을 걸어 어느샌가 모습을 감춰버렸다.

순순히 검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호국은 검은 방 안에 작은 백색의 전등이 달려있는 광경을 보았다. 가구라곤 검은 침대 하나가 고작이었다.

"VIP가 아니라 땅그지 취급이었나......?"

문득 호국은 자신의 차림새가 짜증나는 제주 감귤이 프린트된 잠옷이라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으니 어쩌면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침대에 앉아보니 그럭저럭 푹신하기는 했다. 검은색 천지인 게 영 센스가 없었지만 침대란 게 원래 표백제 냄새와 부드러운 촉감만 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천장에 달려있는 백색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백색의 등이 깜빡거리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땅그지라 등 상태가 좋지 않은 방에 처박은 건가 싶었는데,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1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음?"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는 불빛만 멍하니 보고 있자니 호국이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옛 기억들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배웠고, 기억도 했지만, 정작 써먹을 일이 없어 기억의 한켠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던 지식. 덕분에 자기가 대체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냐고 되물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던 기억까지 한 번에 떠올랐다.

'모스 부호다.'

기억력으로만 따지면 초일류 천재도 찍어누를 자신이 있는 호국은 전등이 깜빡거리는 간격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면 단순히 전등의 내구도가 다했거나, 전력에 이상이 생겨서 일어나는 점멸 현상이 아니었다.

[·–– · ·–·· ––· ···· –·–· ··· ···– ·.]

"박수 쳐라?"

몇 번이고 반복되던 빛의 점멸을 순서에 맞게끔 조합해보니 그런 말이 해석되었다.

짝!

슬쩍 손을 들어 박수를 치자 놀랍게도 전등의 깜빡임이 멈췄다. 그리고 난데없이 전등 옆의 천장 타일이 들리며 그 안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못 알아먹으면 그냥 갈 생각이었는데 이걸 알아맞추네?"

"제가 올 때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전등이 갑자기 깜빡거리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 것 치곤 1분이 넘도록 신호를 보내도 멍하니 누워있지 않았나? 모스 부호를 아는 놈이 이런 간단한 것도 눈치 못 채서야......"

쯧쯧 혀를 찬 상대는 서구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30대 초의 사내였다. 마냥 중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젊은 감이 있었고, 그렇다고 호국처럼 청년이라고 부르기엔 짙은 고단함이 얼굴에 깔려 있었다.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색과 온전한 형태를 지닌 인간을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도 못 해서 생뚱맞는 질문부터 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말 잘 하시네요?"

"한국말? 아아, 그쪽 나라 출신이야? 여기선 언어 같은 건 신경쓸 필요 없어. 입을 통해 대화를 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게 아니니까. 일단 올라와."

그가 천장 환풍구에서 전선 피복으로 만든 튼튼한 줄을 내려주었으나, 호국은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어서......"

"그 말라깽이 새끼가 그러던?"

슬렌더한 몸매를 지닌 인간인 건 맞았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아래로 늘어뜨린 줄을 흔들었다.

"지금 이 줄 안 잡으면 네 색(色), 감정, 그리고 영혼까지 모두 잃게 될 거다. 너한테 나쁠 거 없으니 얼른 올라오기나 해."

호국은 굳게 닫힌 검은 문을 한 번 돌아보곤, 줄을 잡고 천장으로 기어올라갔다. 이런 방에서 머무르며 땅그지 취급을 받는 것 보단 왠지 이름모를 서양인을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호국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호기심이 강한 호국이 자신과 같은 인간을 그냥 떠나보낼리가 없었다.

호국이 무사히 올라온 것을 확인한 그는 서둘러 천장의 타일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환풍구의 덮개까지 완전히 닫은 후에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했다.

"후우, 이 짓거리도 벌써 몇 번째인지......"

"환풍구에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시나봐요?"

"그런 게 아냐! 여기서 머무른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간 너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운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인간들을 종종 봤었어. 원래는 내 개인사 때문에 도울 여유가 없었지만...역시 그냥 지나치긴 힘들어서 몇 번 도와줬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여기로 끌려 오면서 봤을 거 아냐. 내가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자신과 같은 인간을 본 건 상대가 처음이었다. 호국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밖에서 제 영혼을 깎아가며 찰나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던 불쌍한 것들을 못 봤다고?"

"검은 옷을 입은 하얀 인간들이, 하얀 옷을 입은 검은 인간들에게 음식을 사먹는 걸 보긴 했어요."

"그래, 그걸 말하는 거야. 그것들은 원래 우리와 같은 온전한 색과 감정, 영혼을 지닌 인간들이었다고. 어떻게 그걸 보고도 멀쩡할 수가 있지?"

"그냥...마네킹 같았으니까?"

"미친 소리. 그것들은 인간으로 따지면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 나가서 뼈와 신경, 혈관이 훤히 드러난 인체 해부도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어지간한 인간은 그 광경을 보기만 해도 미쳐버려."

자신은 안 미쳤으니 평균 이상은 된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호국은 이런 자신도 고평가를 받은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너 대체 밖에서 뭐 하던 놈이냐? 콘스탄틴은...당연히 아니겠고. 역병의사? 구마사제? 헌터?"

"TF 경비요."

"......?"

고개를 갸웃한 그는 이윽고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이 지옥도에서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인간이랑 만나서 기쁘네. 난 존...아니. 333번이라고 불러라."

"이름이 333번이예요?"

"아니야! 다만 과거의 내 이름은...조직 규율상 버릴 수 밖에 없어서 코드 네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야. 내가 괜히 이런 견장을 달고 다니는 것 같냐?"

그는 자신의 낡은 코트에 달린 견장을 보여주며 짜증을 냈다. 견장에는 33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호국도 자신을 증명할만한 것을 찾으려 품속을 뒤졌지만 나오는 거라곤 회중시계와 검은색의 칩, 그리고 제주 감귤 초콜릿이 전부였다.

"...초콜릿 드실래요?"

"넌 초면인 사람한테도 아부할 줄 아는구나. 그건 아주 좋은 자세야."

냉큼 초콜릿을 받아든 그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특유의 단맛을 음미했다.

"후우! 얼마만에 먹어보는 바깥 음식인지 모르겠네. 여기선 음기와 양기 아니면 따로 섭취할 게 없어서 질려가던 참이었거든."

"음식이라면 바깥에 잔뜩 팔고 있던데요."

"그게 바로 음식(陰食)과 양식(陽食)이다. 검은 것은 음의 먹거리, 즉 그림자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영양분이지. 반대로 흰 것은 양의 먹거리, 영혼을 구성하는 영양분이다. 아니, 이런 걸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알아듣기는 좀 어렵나......?"

333번은 오랫동안 감지 못해 덥수룩한 머리를 괜히 벅벅 긁어댔다.

"어쨌든. 저건 정상적인 식사가 아니야. 바깥이라면 백(白)에 해당하는 영혼과 흑(黑)에 해당하는 그림자의 비율이 맞지 않을 경우 신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음식이나 양식을 밸런스 있게 섭취해서 조정해줄 필요가 있어. 하지만 여기선...백(영혼)을 갈취당하고 있을 뿐이야. 그 말라깽이 새끼가 잡아온 어린아이들이 제 수명을 다 할 때 까지 영혼을 깎아내면서 백의 색채를 토해내는 곳이라고."

333번이 뭔가 엄청난 열변을 토해낸 것 같지만, 정작 호국은 대부분의 말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선에서 그치기만 했다. 그걸 이해하는 건 뇌를 업그레이드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미안.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이렇게라도 떠들지 않으면 진정이 안 되거든. 내가 여기에 들어온지 얼마나 됐더라? 대충 2025년에 들어왔으니까......"

"25년 됐네요."

"그래, 25...25?!"

333번이 화들짝 놀라 호국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댔다.

"25년? 25년이라고? 그럴리가 없어! 내가 아무리 시간감각에 무딘 놈이라도 그정도가 아니란 건 알아!!"

"지금은 2050년이니까요. 제가 아무리 계산을 못 해도 그정돈 알아요."

"...확실해?"

"확실해요."

그는 호국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환풍구에 등을 기댔다.

"그 말라깽이 새끼가 어떻게든 바깥 세상에서 오래 버텨보겠다고 닥치는대로 애들을 잡아가길래 때를 맞춰서 뒤따라왔는데...여기서 조사를 하는 동안 25년이나 흘렀을 줄이야."

"나가시면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나도 이 고생 안 했지. 난 그냥...호기심 많은 학자였을 뿐이야. 그 말라깽이 새끼의 비밀을 알아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토벌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고.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거란 말이야."

"엘리베이터만 타면 될 것 같은데요."

"엘리베이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여긴 바깥에서 반전의 술을 펼쳐서 차원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아공간(亞空間)이야. 게다가 다시 나가려면 그 이상의 힘으로 구멍을 뚫어야 한다고."

신경질적으로 되묻는 그에게 반대로 호국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전 엘리베이터 타고 왔는데요."

"하! 바깥 세상에 남겨진 침식(ES, Erosion)의 구멍에 운 나쁘게 빠져서 들어왔다면 이해할 수라도 있지. 그게 아니라면 백(白)이 미친듯이 흘러넘쳐서 끌어당겨졌다던가......"

갑자기 눈을 부릅 뜬 그는 호국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시선에 적의 같은 건 없었기에 호국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너, 혹시 밖에 있을 때 몸이 안 좋은 적 있었냐?"

"건강해서 탈이었는데요."

"아냐, 분명 몸이 안 좋았을 거야. 마치 체내에서부터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 처럼...괜히 안쪽부터 쿡쿡 쑤시고, 불에 지진 것 처럼 뜨겁기도 했겠지. 속이 메스꺼운 건 일상다반사였을 거야."

호국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속이 메스껍거나 탈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적은 제법 많았다. 모두 TF에 입사하고난 뒤 부터 느꼈던 증상들이었다.

"내 말 맞지? 맞을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갑자기 이런 곳에 끌려 왔을리가 없어. 침식(ES)화로 생긴 차원의 구멍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확실히...속이 메스꺼웠던 적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대뜸 호국의 복부를 아무렇게나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지난 번과는 달리 지금은 멀쩡했기 때문에 호국은 그냥 자신의 튼튼한 복근 자랑만 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군. 흑(黑)이 압도적으로 부족해서 신체의 붕괴를 일으키다가 다시 회복한 것 같은데...혹시 바깥에서 음기를 섭취했냐?"

"어...잘 모르겠는데요?"

"잘 기억해봐! 분명 지독하게 검고, 고약한 맛에, 식감도 병신같은 뭔가를 먹었을 거 아냐!"

호국에게 기억 좀 잘 해보라고 말한 인간은 그가 처음인지라 듣는 호국도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곧 기억을 더듬어보니 의외로 답이 쉽게 나왔다. 그가 먹은 검고, 고약한 맛에, 식감도 병신같은 것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크다크 레인보우?"

"뭐야 그 병신같은 네이밍 센스는?"

"그런 이름의 검은 음료수를 자주 마시긴 했어요. 공짜였거든요."

"그럼 그거겠지. 그걸 자주 먹어서 흑과 백의 균형이 어느정도 맞춰진 것 같은데...자세히 살펴보니 네 몸은 백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 어디 산에 수십 년 처박혀서 도 닦다 나왔냐?"

홀로 가상현실을 체험하지 못해 지독한 인생의 풍파를 겪은 것도 도를 닦은 것과 같은 효과라면 고개를 끄덕였겠으나, 호국은 일단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선천적으로 그냥 흑과 백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엄청나게 큰거야. 가끔 그런 놈들이 있어. 전생에 뭘 쳐먹고 태어난 건지 모를 이상한 놈들. 그런 놈들은 다들 시대를 풍류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위인이나 악인으로 남는데...넌 아무리봐도 그냥 평범한 놈이야."

"제 나이에 연봉을 1억씩 땡기는 평범한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요?"

"넌 고작 손에 쥘 수 있는 돈으로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냐? 돈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인간의 탐욕을 먹고 자라는 기생충일 뿐이라고."

그 기생충이 있어야 자신에게 걸맞는 VR 기기를 살 수 있는 호국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호국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는 넓은 환풍기를 기어서 움직였다.

"일단 따라와. 너나 나나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마냥 여기에 처박혀 있기만 해선 안 돼. 대책을 세워야지."

'엘리베이터만 찾으면 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엘리베이터만 찾으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여기에 엘리베이터 같은 건 없어. 그런 좋은 게 있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어?"

"......"

"자세한 건 내 보금자리에 가서 얘기하자고."

호국은 그의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며, 환풍구를 생쥐처럼 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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