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엘리베이터(1) >
꿀꺽.
호국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패가 생(生)인지 사(死)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마지막 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을 보기 위해 승부를 걸어야 한다.
크고 붉은 꽃 두 장. 이것 하나로 확실하게 게임을 잡았다고 말하는 건 다소 섣부른 감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같은 조합인데 이정도면 꽤 강력하지 않을까? 한 번쯤 승부를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유혹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유혹이란 건 참 무서운 놈이다. 살아가면서 온갖 유혹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이런 호국 조차도 가상 현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VR 기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마당에, 붉은 꽃 두 장의 유혹은 꽤 만만찮았다.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을 걸 수 있냐고.
그렇다면 호국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이 걸 수 있는 건 질리지도 않는 제주 감귤 초콜릿 뿐이라고.
"콜."
승부수는 던져졌다.
호국이 먼저 패를 까자 두 장의 카드가 판 위에 펼쳐졌다. 카드를 인지한 게이밍 테이블의 LED 패널은 화려한 광채를 내뿜으며 '6땡!' 이라는 사운드를 토해냈다.
이윽고 상대도 말없이 자신의 패를 깠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분홍꽃과 붉은꽃이 섞여있는 패, 3이었다.
'설마 3땡? 아니면 잡끗?!'
호국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이 승부는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3땡 정도라면 상대도 괜찮은 패라고 냈을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어쨌든 6땡이 압도적으로......
-삼! 팔! 광! 땡!
부정(Denial).
"미친 소리이이이이이!!"
공허 속에서 우주의 미래를 엿본 외계인이 빙의한 것 마냥 호국은 괴성을 내지르며 절규했다.
분노(Anger).
"운빨좆망겜! 어떻게 거기서 삼팔광땡이 나올 수가 있어?! 삼팔광땡이 뉘집 해피 이름도 아니고!!"
자신이 6땡을 잡았다는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 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던 호국은 그대로 죽음의 5단계에서 단숨에 3단계까지 진입했다.
협상(Bargaining).
"한 판만...한 판만 더 해요. 이번엔 이길 수 있어! 초콜릿도 아직 충분해!!"
우울(Depression).
"말도 안 돼. 내가 지다니. 내 눈썰미는 정확했다고......"
수용(Acceptance).
"그래, 사람이 게임 좀 질 수도 있지. 내 IQ가 어디 보통 IQ야? 질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졌겠지."
순식간에 달관한 호국은 게이밍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특수 근무를 끝낸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상층부에선 특수 근무를 무사히 완료한 것에 대한 보상을 논의중이라는 말만 하고 별 다른 임무를 주지 않았다.
다만 이두근으로부터 심적 소모가 매우 심했을테니 따로 휴가를 줄 수는 없지만, 업무 시간에도 마음껏 쉬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연구팀장의 허락이 있었기에 호국은 오전부터 잠옷 차림으로 카지노에 내려와서 정신 수양(게임)을 하고 있었다.
서양식 카지노에 동양화(화투)가 왜 있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건 호국은 상대에게 벌써 5연패나 당했다.
"할아버지 엄청 세시네."
그렇다. 상대는 다름아닌 자신의 어금니를 판돈으로 건 6-01이었던 것.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붉은 눈으로 패를 내려다보면서 항상 게임을 압도해버렸다.
호국이 잡끗으로 블러핑을 넣으며 승부를 걸면 기가막히게 눈치채고 잡아버렸고, 땡으로 승부를 걸 땐 높은 땡인지 낮은 땡인지 귀신처럼 눈치챘다.
역시 젊은 도박사들보다 양로원에서 점당 100원 내기로 고스톱 치는 노인들의 실력이 더 대단하다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6-01이 양로원 출신이라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한껏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말라진 호국은 바텐더에게 시원한 것을 주문했다. 바텐더는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칵테일 컵에 뭔가를 들이붓더니 절제된 동작으로 흔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맹물 위에 흰 가루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비쥬얼적으로는 마약 탄 물이 완성되었다.
'비타민 가루라도 넣었나.'
하기야 손님이 건강을 잃으면 카지노는 곧 손님을 잃게 되는 것이니 이런식으로라도 건강을 챙겨줄 법 했다.
흰 가루 덩어리를 대충 물과 함께 씹어 삼킨 호국은 가볍게 트림을 했다.
평소대로였다면 지금쯤 아침을 부랴부랴 챙겨먹고 편의점에서 죽치고 있을 신입과 해피를 끌고 순찰을 돌고 있었을 텐데. 오랜만에 맛보는 느긋한 여유에 꽉 막혀 있던 속이 조금이나마 뚫린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좀 열심히 일하긴 했어.'
새 나라의 착한 어른 답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곧바로 근무 투입, 야근이나 추가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일전에는 특수 근무까지 해냈다.
군대였다면 포상 휴가를 주고 땡처리 했겠지만, 이두근이 상층부와 직접 담판을 지어 괜찮은 보상을 받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한 바 있으니 더 좋은 것을 기대해도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멋진 작업복 같은 걸 받을지도 몰라.'
호국은 자신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개미가 그려진 작업복을 떠올렸다.
그건 꽤 멋진 디자인이라서 애용하고 있었지만, 호국은 이래 봬도 한창 패션에 신경쓸 2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남들이 SNS에서 자신의 가상 현실 속 아바타 패션을 자랑할 때 마다 그걸 보던 호국은 속이 쓰려왔는데, 근로자친화적 기업인 TF에서 하사하는 작업복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하겠지. 패션쇼에 나가도 될 만큼.
일개 노동자에게 보상을 주겠다는 걸로 거짓말을 할 만큼 TF가 좀생이 같은 기업은 아닐테니 호국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정신없이 게임하다보니 벌써 점심 시간이 다가오네.'
룰렛 머신을 돌려서 눈썰미로 777을 눈으로 직접 봐서 터뜨려보기도 하고, 다트도 던져봤다. 중년 신사와 말라깽이 의사, 귀부인을 끼워서 도둑 잡기도 해봤다. 카지노에 월드 마블(보드게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좀 충격적이었다.
어쨌든 판돈인 초콜릿을 엄청 잃기도 하면서, 역으로 상대가 판돈으로 걸었던 잡동사니를 운 좋게 가져오기도 했다.
중년 신사에게선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회중시계를 받았고, 딜러에게선 검은색의 칩 하나를 받았다. 귀부인은 번번이 승리했기에 그녀에게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귀족답게 게임에 능했는지, 6-01과 박빙의 접전을 펼치면서도 결국 승리를 가져가곤 했던 것이다.
'이거 마음에 드네.'
호국이 회중시계의 덮개를 열때마다 찰칵! 소리가 났다. 꼭 지포 라이터의 덮개를 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작은 침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면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남자들이 기계와 장난감에 미쳐 산다는 건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터라 호국에게 초침 소리는 꼭 자장가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른다는 걸 '소리'만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이하게도 시계의 중심부에는 작은 나침반도 존재했다. 군에서 독도법이나 지형 정찰을 배운 호국에게 나침반을 이용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오전에는 충분히 쉬었으니 오후부턴 다시 일해야겠어.'
아무래도 호국은 전생에 김호구라는 이름의 최참판댁 노비였는지 마냥 놀고 먹고 쉬기만하는 게 몸에 받질 않았다.
좀이 쑤신다고 해야 하나, 무의식적으로 걷고 새로운 것을 찾고,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정식 휴가였다면 싹 다 한편에 치워두고 지냈겠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정식 휴가가 아니라 자유 시간을 받은 것에 불과하지 않나.
바텐더에게 크레딧 카드를 던져준 호국은 여전히 게이밍 테이블에 앉아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는 6-01을 가리키며 그를 부탁했다.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시면 그걸로 결제해 주세요. 카드는 나중에 가지러 올게요."
노인이 먹고 마셔봐야 얼마나 먹고 마시겠나 싶어 카드를 맡긴 호국은 저위험군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B40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테마는 'M' 으로 시작하는 과거의 유명한 락 밴드의 정규 2집 앨범 8번 수록곡이었다. 살짝 음산한 느낌을 느린 템포로 뽐내다가 점차 빨라지는 전형적인 곡이었다.
군 시절 한 운전병이 밖에서 차 타고 다닐때마다 꼭 듣는 곡이라며 들려줬을 때는 코웃음 쳤는데, 어느샌가 입에 붙어버린 곡이었다.
'하여간 이 놈의 방정맞은 기억력이 문제야.'
그래도 이왕 부른 콧노래는 마저 부르는 게 낫지 하고 마저 부르던 순간, 잘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크게 흔들렸다.
덜컹! 덜컹! 덜컹!
이게 무슨 네버랜드 후룸라이드도 아니고 연이어 흔들리는 엘리베이터에 호국은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농사왕이 대탈주 실패 후, 이 놈의 엘리베이터를 싹 뜯어버리고 새 것으로 교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이두근 연구팀장님한테 딴 보상 필요없으니까 그냥 엘리베이터나 바꿔 달라고 할까?'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버튼이 제멋대로 눌리기 시작했다.
버튼만 수십개가 있었기 때문에 버튼 하나를 누르면 해당 버튼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구조였는데, 버튼이 한 번에 여러 개가 눌리면서 흘러나온 다량의 불빛이 패널 위에 커다란 숫자를 만들어냈다.
"4, 2, 6, 2, 10?"
난데없는 숫자 놀음에 당황한 호국은 우선 되는대로 버튼을 갈겨봤다. 패널이 일시적으로 오류를 일으킨 것 같은 자신이 간섭하면 오류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단순무식한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호국이 아무리 힘을 줘서 버튼을 눌러봐도 다른 버튼은 인식되지 않았다. 그저 4, 2, 6, 2, 10 이라는 숫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염병......'
또 다시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른 호국은 식은땀을 흘렸다.
진리교인지 거짓교인지 하는 것들이 이 시설에 침투했을 때 발생했던 불상사. 엘리베이터에 수십 분이나 갇혀있어야 했던 탓에 화장실도 가지 못 했던 지독한 악몽!
'아직은 괜찮아.'
조금 전에 비타민 가루 섞은 물을 원샷 하긴 했지만 당장 화장실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먹은 게 있다면 결국 뱉어내는 법. 머지않아 시간이 흐르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어쩌면 수십 분이 아니라 몇 시간을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국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우...후우......"
자신은 문명인이다.
결코! 엘리베이터 구석에 볼 일을 보는 일은 없다.
'결국 프롯이나 신입이 구해주겠지.'
시설 설비에 이상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게 프롯이었고, 특이하게도 프롯은 신입과 곧잘 소통하고 있었다.
둘은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자랑스러운 경비팀 79기의 맴버였으므로 호국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충 엘리베이터에 구석에 가서 쭈그려 앉은 그는 멍하니 엘리베이터의 버튼 패널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현재 층수를 표시해주는 층수 표시기에 눈이 갔다. 버튼 패널만 맛이 갔고 그건 멀쩡하다면 지금쯤 B40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10?'
B10도 아니고 그냥 10이라니. 심지어 B40에선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지 않으면 상층으로 도달할 수도 없다.
의아함을 느낀 호국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도착을 알리는 띵! 소리도 없이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