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07화 (107/209)

< 경비 업무 일지 : 고찰(2) >

"질문 하나 하지."

한 FCD 의원이 손을 들자 그의 책상 아래에서 푸른 LED 불빛이 흘러나오며 발언권이 주어졌다.

"장 볼로니 의원님.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장 볼로니 의원. 프랑스의 군수기업 '머시)

"그리 대단한 질문이랄 건 아니지만,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다네. 자네가 조금 전에 저런 짓이 가능한 존재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런데 실제로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렇다면 상대는 인간이나 AI가 아닌, ES로 규정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상대를 ES로 규정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침입자로 규정했느냐는 것이 궁금하신 겁니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ES라고 추정할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나 AI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ES 라는 답밖에 남는 것 아닌가?"

요한은 대답 대신 스마트패드를 조작해 미리 늘어놓았던 유출된 정보와 자료 목록을 세분화하여 쪼개 놓았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식으로 유출된 자료들 같았지만, 요한이 스마트패드를 조작함에 따라 일부 조각들이 허공에서 짜맞춰지며 하나의 퍼즐을 완성시켰다.

"다른 자료를 빼간 건 눈속임이었습니다. 그 침입자들은 TF를 비롯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기 위해 이 자료를 빼간 게 아닙니다.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그 자료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빼갔다고 봐야합니다. 즉 ES와 다르게 목적의식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완성된 퍼즐은 최고 수석 연구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해커처럼 보이게 하려고 잡다한 자료들을 마구 빼낸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같은 시설내에 존재하는 ES 끼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시설 내부와 외부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 ES 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는 어떻게 제 1 연구시설을 목표로 잡고, 시설의 중추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분'의 자료만 정확히 빼냈겠습니까? 인간과 AI는 '그 분'에 대해 알고 있으나 이 사건을 실행할 능력이 없고, 반대로 ES는 능력이 있으나 '그 분'을 알지 못 합니다. 때문에 저는 이 용의자들을 정체불명의 침입자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허어...그렇다면 지금 '그'는......?"

"예, 의원님들께서 상상하시는 대로, TF 최초 설립자께서만 알고 계시는 비밀 시설로 이동하셨습니다."

최고 수석 연구원의 눈부신 위상과 업적, 그의 성향을 고려해 요한은 '피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피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그가 외부의 적을 두려워해서 숨어들어간 쥐새끼처럼 보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에 대한 모독이었고, 그를 인생의 멘토로 여기는 요한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좋네. 그 부분은 '그'의 능력을 믿기로 하고. 이제 제 1 연구시설에서 발생한 대학살극에 대해 얘기해보지. 대체 어쩌다 점멸분쇄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됐나?"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얼마전에 독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제 6 처리시설 전 연구팀장인 이홍선이라는 사내가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 6 처리시설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해선 의원님들이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제 6 처리시설에서 탈주한 점멸분쇄기가 제 1 연구시설에 침입했고, 목적은 역시 '그 분'인 것 같았습니다. 점멸분쇄기를 제 1 연구시설 빛의 방에 가둔 것도 '그 분'이었고, 그대로 빛의 방을 제 6 처리시설로 옮겨서 은폐시킨 것도 '그 분'이었습니다. 필시 복수심 때문에 습격한 것입니다."

"그런 것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을 줄이야."

"사실 꽤 많은 ES들이 감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감정이 있는 것 처럼 보이게끔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건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려 한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제 1 연구시설이 습격받은 건,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교묘하게 최고 수석 연구원의 정보를 빼갔다는 것, ES에게 탈주를 허용하면 그 뒤엔 무시무시한 보복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쯤되면 FCD 역시 마냥 돈과 인력으로 지원만 할 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TF의 보안과 인류의 안전에 신경쓰게 될 터.

제 1 연구시설에선 영역화 억제 작업을 제외하면 실패(패배)밖에 남지 않은 사태였으나, 요한은 만족스럽게 발표를 끝마치고 물러섰다.

다음으로 나서야 할 인물은 제 1 처리시설 대표였으나, 제 1 처리시설은 워낙 관리가 완벽한데다 연구시설처럼 습격을 받은 것도 아니라 이렇다 할 만한 보고 내용은 없었다.

그저 구두 보고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모두 잘 해결되었다. 시설 관리는 완벽하다는 말을 끝으로 그의 차례는 빠르게 끝나버렸다. FCD 의원들 역시 요한의 강렬한 발표를 본 탓에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신있게 앞으로 나선 제 2 연구시설 대표,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소장 대리인이 야심찬 얼굴로 스마트패드를 조작했다.

요한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홀로그램화 되어 대회의장 곳곳에 흩뿌려졌다.

"제 2 연구시설 소장 대리로 참석한 최성찬 총괄팀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제 2 연구시설에선 영역화 억제 작업을 위해 만전을 기했습니다. 당시 모니터룸 상황을 녹화한 장면입니다. 모두 영역화 억제 작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24시간, 단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볼 것도 없군. 넘어가지."

대회의장 상석에서 울려퍼진 단호한 목소리. 최성찬의 움직임을 굳게 만들기엔 충분히 단호했다. 단호박처럼.

"어, 저...그러니까."

"못 들었나? 젊은 친구인데 생각보다 귀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제 2 연구시설은 어차피 볼 것도 없으니 넘어가자고 했네."

성량을 조금 더 높이며 압박을 준 노인은 FCD 중에서도 최고참이라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며, TF 설립에 큰 기여를 한 인물. 조지 매그너 였다.

그의 옆좌석에 착석한 제임스 마커스는 무언의 시선으로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가 어떤 의도로 제 2 연구시설 소장 대리를 까버린 것인지 내심 기대했다.

"제 1 연구시설과 처리시설은 '그'의 관리하에 있는 것이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면 안 되지만, 그외 다른 시설의 보고는 들을 필요가 없는 것 같군. 항상 다들 똑같지 않나? 뭘 했고, 어떤 결과가 있었고, 잘 했으니 칭찬좀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말이야."

"푸흡."

제임스 마커스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가상현실 속의 아바타가 아니었다면 성량이 너무 커서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매그너는 노인 특유의 꼬장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지들 말고 좀 참신한 것 없나? 제 4 연구시설처럼 아예 시설 하나를 통째로 날려먹어서 우리 늙은이들의 귀가 활짝 열리게 만드는 그런 내용 말이야. 물론 그 멍청이들은 목숨을 대가로 참신함을 선택했으니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만......"

"푸흐흐흐......!"

"웃으려면 그냥 시원하게 웃게 제임스."

"크흠! 아닙니다."

자신이 지목당하자 제임스는 재빨리 덤덤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FCD 내에서도 최고 고참이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다른 의원들도 한마디씩 불평불만을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연구비나 더 지원해달라는 속셈이겠지."

"연구비뿐이면 차라리 다행 아닌가? 고성능 AI에 안드로이드, 추가 인력과 설비까지! 시설 하나만 그렇게 지원해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거라고."

"아무리 세상이 편해졌다고는 해도 TF의 연구원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돈 귀한줄을 몰라서야......"

"나때는 말이야 25센트 동전 하나로도 다들 행복했었다고."

"빠방하게 지원을 해줘도 '그'처럼 괜찮은 실적을 내면 몰라. 죄다 돈 잡아먹는 기계라니까!"

TF의 주요 물주들이 성화를 부리자 최성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쭈그러들어야 했다.

바로 그때, 그를 제치며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온 자가 있었다.

제임스가 제 6 처리시설의 사태를 수습할 겸, 가드-079의 감시역으로 심어둔 3급 조사관 이두근이었다.

"그런 의원님들에게 제 6 처리시설의 참신하고도 확실한 '실적'을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누구도 감히 나설 생각을 못 하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차례를 빼앗긴 최성찬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당장 그에게 역정을 내며 자신의 발표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실제로 최성찬이 준비해온 내용은 모두 '우리 일 잘했으니 칭찬좀 해주십시오. 덤으로 지원도 좀 해주시고' 라는 내용을 함축한 것 뿐이었으니까.

아마 이 상태로 발표를 이어나가려 했다간 FCD의 눈밖에 나 모가지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퇴장하는 것도 뭣해서, 이두근의 어깨를 치고가며 으르렁거렸다.

"어디 그 유배지에서 얼마나 대단한 실적이 나오는지 보자고."

"그쪽 머리로는 납득하기도 힘들만큼 대단할 겁니다."

최성찬이 자리로 돌아가자 이두근은 자신의 스마트패드로 준비된 자료들을 각 의원들에게 전송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이두근이 전해준 자료들을 확인하기 시작한 의원들은 마치 조금 전에 된서리를 맞은 최성찬처럼 굳어버렸다.

겨우 누군가가 입을 열었을 때는, 무거운 침묵이 5분 가량 이어지고난 뒤였다.

"내가 늙어서 그런건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아니, 이해할 수가 없어."

조지 매그너가 첫 운을 떼자 최성찬이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터무니없는 것을 실적이랍시고 들이밀었으니 이제 저 조사관놈이 공개적으로 깨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성과야! 그러니 묻겠네. 이게 정말인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완벽한 사실입니다. 객관성을 검증하기 위해 다른 조사팀과 기동타격대를 파견해서 조사해보셔도 됩니다."

"굉장하군...굉장해. 설마 '그'도 해내지 못한 것을 제 6 처리시설에서 가장 먼저 해낼 줄이야."

'뭐라고?!'

예상치 못한 조지 매그너의 반응에 최성찬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우는 최고 수석 연구원도 해내지 못 한 것을 제 6 처리시설에서 해냈다, 그 말을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FCD들의 반응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니 더 미치고 환장할 수 밖에.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부우우우웅.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진동하는 자신의 스마트패드를 내려다 본 최성찬은 고개를 들어 이두근을 바라보았다. 그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스마트패드를 확인해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스마트패드에 도착한 이메일에 첨부된 것은 한 장의 짧막한 보고서였다.

-제목 : 제 6 처리시설 영역화 구역 완전 해방 보고서

'미친!'

제목만 봐도 알겠다.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실적이라는 것을.

재빨리 보고서 파일을 열어 확인해보니 제 6 처리시설의 영역화 구역이 완전히 소실된 것을 증명하는 각종 이미지 파일과 영상 파일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FCD를 상대로 감히 조작된 자료를 내밀 수 있을리가 없으니, 사실상 진실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참여 인원은 기존의 방식인 남녀 2인조 팀이 아닌, 가드-079라는 남성 경비 한 명뿐이었다. 본래라면 영역화 억제 작업조차 실패로 돌아갔어야 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완전 해방을 시켜버린 것이다.

확실히 제 1 연구시설의 중추이자 TF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그'조차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다. FCD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빌어먹을."

최성찬은 자신 앞에 더이상 성공 가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6 처리시설의 근무자들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억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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