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비밀 친구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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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처지끼리 이해해달라?
그 말은 꼭 호국과 노의사에게 아주 큰 공통점이 있다는 의미 아닌가. 허나 공교롭게도 호국은 자신과 노의사간의 공통점을 느끼지 못 했다. 오히려 차이점 투성이다.
탄창이 없어서 빈 총에 불과하지만, 호국은 권총을 거꾸로 쥐었다. 이 묵직한 권총도 잘만 휘두른다면 얼마든지 흉기로 둔갑할 수 있었다.
비밀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히죽히죽 웃고 있는 노의사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건 아주 간단하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이 늙은이에게 폭력이라도 휘두를 셈인가? 개 목줄을 잘 잡는 모범 주인인줄 알았더니 개나 주인이나 똑같군."
"필요에 의한 폭력은 비록 정당화할 순 없어도 합리화할 순 있다. 그렇게 배웠거든요."
"왜냐하면 항상 가해자가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폭력이니까. 합리화는 가해자의 기본 소양이지."
"누구도 제가 가해자라고 생각하진 않을 걸요."
"그럼 피해자인가? 아니지. 아니고 말고."
노의사는 물러서거나 도망치는커녕, 오히려 호국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밤하늘 같은 검은 눈동자로 마주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자네와 나는 같은 처지야. 내가 가해자면 자네도 가해자인거고, 내가 피해자면 자네도 피해자인 셈이지."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을 계속하는 모습에 호국은 역수로 쥔 권총을 휘둘렀다.
유교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선 여자, 노약자, 아이를 때려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호국은 일반적인 상식은 상당부분이 다른 것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상대가 설령 폭력을 휘둘러선 안 될 존재라고 해도,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주저하지마라. 그게 호국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철썩!
보통은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퍼져야 정상이지만, 권총의 그립이 노의사의 안면을 후려쳤을 때 울려퍼진 소음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물?'
촤악, 하고 터져나온 물줄기는 호국의 안면을 때리며 땀으로 절어있던 그의 몸을 차갑게 식혔다.
"자넨...참...이기적이야."
"......!"
호국의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 노의사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흐물흐물한 젤리 같은 것이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입이라고 할 만한 구멍을 통해 상당히 거슬리는 음성이 간혈적으로 새어나왔다.
"설마설마 했지만, '우리'가 이런...소모품 같은 몸을...쉽게 구할 수 없다는 걸...알면서도...주저하지 않는군. '우린' 그저 즐기고 싶은 것 뿐인데!"
순식간에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젤리는 빠르게 녹아내렸다.
누가 난방을 켠 것도 아닌데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흘러내린 그것은, 인간의 장기로 추정되는 온갖 살덩어리와 새하얀 뼛조각들을 토해냈다.
급기야 야생동물이 싸지른 푸짐한 똥무더기처럼 변해버린 노의사는, 유일하게 봐줄만하다고 할 수 있는 입으로 영문모를 말을 내뱉었다.
"똑같이 즐기고자 '몸'을 얻었다면...최소한 서로 방해는 하지 말았어야지!"
"...방해는 제가 받았는데요."
쏟아져나오는 악귀들, 걸어다니는 경비팀 시체, 지금 이 순간도 옥상 문을 박박 긁어대고 있는 저것들 모두 호국에게 있어서 큰 방해 요소였다.
하지만 노의사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양 일방적으로 폭언을 퍼부었다.
"우둔하기는! 난 자네에게 협조적이었어.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그래도 큰 마음 먹고 이 구역까지 양보 해줬다고. 그런 나를 이렇게...이토록 모욕적인...! 최소한의 배려조차 해주지 않다니!!"
그륵, 그르르륵. 듣기 싫은 거친 숨소리가 절규 같은 고함소리에 섞여 나왔다.
완전히 무너진 젤리 속에서 검은 기포가 올라오다가 이내 뻥 터져버렸다. 왠지 모르게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검은 액체를 쏟으며 노의사는 결국 종국을 맞이했다..
"빌어먹을...새로운 몸을 찾아야겠군."
그 말을 끝으로 똥무더기 같았던 젤리는 더이상 거슬리는 목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일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생태계의 일원이었던 것 처럼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를 보는 듯 했다.
'네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이런 장면을 내보냈어야 했는데.'
인간의 흉내를 냈던 똥무더기의 최후. 얼룩말을 짝짓기나 외로운 사자 삼바 스토리보단 훨씬 더 잘 팔릴 것이다.
더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굳게 닫혀있던 옥상 문을 열어보면 계단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악귀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도, 벽과 바닥을 마구 긁어대던 소음도, 끼익끼익 하고 철제 계단이 불안하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지독한 정적만이 호국을 짓눌렀다.
"돌아가자."
1층으로 내려와 자신의 짐을 챙긴 호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열려있는 정문으로 걸어나왔다.
별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익숙한 밤의 도로를 걸어,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직전, 병원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병동의 밝은 불빛도, 적십자 모양의 네온사인도, 을씨년스러운 옥상의 철조망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의 이기적인 유희도.
누군가의 절망적인 고통도.
비로소 모든 것이 '해방'된 것이다.
해방, 해방, 해방...해장. 해장국.
"점심으로 얼큰한 해장국 먹고 싶다."
호국을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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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 파지지지!
마구잡이로 뜯겨나간 전선 다발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비상등이 붉게 점멸하고 있는 복도 내부는 진득한 핏물로 한층 더 붉은빛을 더하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경고! ES 대량 탈주 사태 발생! 모든 경비팀과 기동타격대는 B40에 집결하여 재정비 하라! 반복한다! 모든 경비팀과 기동타격대는......
"으윽...씨발."
자신의 위로 널부러진 이름모를 연구원의 몸뚱이를 밀어낸 요한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주 잠시간 주변의 난장판에 얼이 빠져 있던 그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영역화 억제 작업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됐지?!"
황급히 스마트패드를 조작해보니 다행스럽게도 허가받지 않은 접속자는 차단된 상태였고, 희생 절차를 위한 메뉴얼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고대 유적 연구소의 유리관을 통해 공급되고 있는 약물들은 순서에 맞게 재공급되었으며, 곧 절차에 따라 희생될 경비 2인조 역시 별 다른 문제 없이 연구소를 살피기만 했다. 모든 게 안정적이었다.
'주변이 이 꼬라지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시설 시스템 셧다운. 이건 시설 종말 시스템 다음으로 절대로 해선 안 될 선택지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월권 행위까지 하면서 셧다운을 강행했다.
그 결과, 제 1 연구시설내의 모든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셧다운 되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있었다.
단순한 지진이었는지, 아니면 폭발에 의한 충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충격으로 인해 모니터룸에 있던 연구원들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는 것이다.
전등이 모두 나간 탓에 캄캄한 상황에서 천지가 마구 요동친다고 생각해보라. 오히려 이정도로 끝난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끄응......!"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자 깜빡이는 전등 불빛 아래로 주변의 풍경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다행히 심각하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대부분 미끄러져서 넘어졌거나, 어디에 머리를 처박은 게 고작이었다. 구조물이 쓰러지면서 누군가를 깔아뭉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적 피해는 최소화했다고 볼 수 있었다.
비틀비틀 걸어서 메인 모니터에 전원을 넣은 요한은 때마침 연결된 관리봇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갑자기 시스템을 셧다운 시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쨌든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영역화 억제에 실패하느니 그러는 게 차라리 나았어. 그보다 지금 시설 내부 상황은 좀 어때? 아까 경고 방송을 들은 것 같은데......"
-영역화 억제 작업을 위해 대부분의 ES가 실험실이 아닌 은폐실에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설내의 모든 시스템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면서 은폐실의 잠금 장치도 일시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전력이 복구되자마자 모든 구역의 은폐실을 확인해본 결과, 약 40체에 달하는 ES가 탈주했습니다.
"아직 중간 거점을 넘지는 않았겠지?"
-예. 하지만 경비팀과 기동타격대만으로는 미쳐 날뛰는 ES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도 안 하지. 최고 수석 연구원님의 현 소재는 파악할 수 있나?"
-불가능합니다. 최고 수석 연구원님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FCD 뿐입니다.
"쯧...그럼 일단 경비용 안드로이드라도 동원해봐.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해. 시설 꼬라지가 이 모양이라 변명의 여지는 없겠지만, 최소한 노력이라도 했다는 걸 보여 드려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난데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관리봇의 대답에 요한은 소스라차게 놀랐다.
감정이 없지만 인간처럼 스스로 사고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AI는 그 행동양식이 인간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대단한 인공지능이라고 한들 결국 인간의 손에 창조된 한낱 프로그램.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코드로 짜여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다.
감히 누가 TF 내에서 최고 수석 연구원을 '그런 것' 이라고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관리봇이 세상물정 모르는 애새끼도 아니고.
"지금 무슨 말을......"
-시설 외부에서 ES의 침투를 감지했습니다.
요한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내부가 아니라...외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패턴을 분석해본 결과, 절대로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될 ES 였기에, 최우선 사항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대체 뭔데? 어떤 ES 이기에......!"
-지금 요한 메르긴 연구원님의 뒤에 있습니다.
"!"
재빨리 뒤를 돌아본 그는 쓰러진 연구원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저 전등 불빛이 깜빡이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
모니터룸 입구에 위치한 전등이 완전히 꺼지고, 그 다음 전등 불빛이 환하게 켜졌다.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분석이 끝난 패턴, 하지만 절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ES.
당시 최고 수석 연구원이 고안해낸 기발한 아이디어로 은폐에 성공할 수 있었던 상대. 그 기발한 아이디어란 '절대로 꺼지지 않는 전등으로 가득한 방에 가둬두자' 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 계획은 먹혔고, 재단의 덫에 걸려든 그 ES는 시설 종말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꺼지지 않는 전등으로 가득한 방에 갇혀버렸다.
그랬어야 할 터인 놈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전등의 불빛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가둔 그를 찾아온 것이리라.
"이런 젠장."
요한은 조용히 빛이 들지 않는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정신을 잃은 수많은 연구원들이 허무하게 빛에 의해 갈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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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특수 근무 체제 현황 (Day 1) (AM 11 : 35)
-제 1 연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25%) (대규모 ES 탈주 사태 발생)(ES 외부 침입 확인)
-제 1 처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5%)
-제 2 연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8%)
-제 2 처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0%)
-제 3 연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4%)
-제 3 처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0.8%)
*B 특수 근무 체제 현황
-제 4 연구시설 : 시설 폐쇄
-제 4 처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4%)
-제 5 연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2%)
-제 5 처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22%)
-제 6 연구시설 : 준비 완료(진행률 : 16%)
-제 6 처리시설 : 해방 성공
*예외
-AREA 51(정보 없음)
-마리아나 해구 특수 감옥(술래 분열중)
-제 3 우주 정거장(유럽 관측 속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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