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특수 근무(2) >
"혼자 일하는 건 오랜만인걸."
B58에서 겪었던 트럭 탈주 사건에 운 나쁘게 휘말린 호국이 호주까지 갔다가 우연찮게 납치되었던 부모님까지 구해오는, 마치 삼류 판타지 소설 일을 겪은 것도 어느덧 3일이나 지난 일이다.
지난 3일간 호국이 한 일이라곤 B41부터 B58을 순회하며 또 영웅담 같은 이야기들을 자랑거리처럼 늘어놓곤 했다.
특히 효도가 아주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며, 어리석었던 지난 날의 자신을 자책하면서 답정너식의 위로를 원하기도 했다. 조금 추했지만, 꽤 유익한 3일이었다.
어느덧 호국을 B59 앞까지 내려놓은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문이 열렸다.
호국은 즉시 CCTV를 향해 OK 사인을 보낸 뒤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어두컴컴한 밤의 도로 한복판이었다. 가로등이 쭈욱 이어져 있고, 차량이 휙휙 지나다닐 것만 같은 밤의 도로.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나 달 같은 건 없었고, 그저 CCTV로 추정되는 점멸등이 어둠속 곳곳에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호국은 개인적으로 밤의 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밤이 무서워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현대 사회에서 가로등 불빛만이 은은하게 빛나는 밤의 거리란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요하고, 정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일하게 불빛이 밝혀져 있는 도심 속의 24시 편의점이나 정크푸드 가게 조차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거리는 놀랍도록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깊은 밤이 되면 설령 대도시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집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굳이 밤을 새면서 술을 퍼마시고, 클럽을 정복하고, 모텔이나 노래방을 갈 필요가 있나?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유흥은 가상 현실로 대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대체하는 것 이상이었다.
호국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을 통해 가상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유흥을 즐기는지 본 적은 있었다.
클럽 죽돌이, 죽순이들의 광란의 밤? 현실의 클럽보다도 더 화려하고, 더 대단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가상 현실을 접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깊은 밤에 나돌아다니는 인구 수는 격감했는데, 그럴 때마다 종종 야식을 먹으러 24시 무인편의점을 이용하곤 했던 호국은 밤의 거리가 너무나도 싫었다.
밤이란 시간은 모두가 잠드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가상 현실로 떠나는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군대에선 그래도 야간 경계 근무 정도는 군용 안드로이드와 함께 했었는데.'
알고보면 군대도 나쁘지 않은 곳이다. 모두가 100점 만점에 마이너스 500점을 준다면 호국은 마이너스 490점을 줄 의향이 있을 만큼.
좌우지간, 살짝 소름돋을 정도로 익숙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다보니 가로등과 가로수 사이로 거대한 대학병원의 실루엣이 보였다.
병원의 이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적십자 모양의 네온사인이 환하게 빛나며 호국을 부나방마냥 유혹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아이러니 했다. 다음 근무지가 하필 병원이라니.
'5배 시급에 별도 수당이란 말을 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내가 병원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았어.'
사람이 돈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저 짜증나는 적십자 네온사인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호국은 정기적으로 받는 신체검사를 제외한 다른 이유로 병원에 가는 것을 상당히 꺼려 했다. 어느 정도로 싫어했냐면, 욱신거리는 사랑니를 향해 아주아주아주 심한 욕을 퍼부을 정도로 꺼려 했다.
'결국 사랑니를 뽑으러 갔었지.'
제발 의사에게 수면 마취를 한 다음 발치를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의사는 어림도 없다며 부분 마취만 하고 발치를 해버렸다.
아직도 그 의사의 사악한 눈웃음이 잊혀지지 않았다.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병원 앞에 당도한 호국은 당초 예정대로 병원 입구(현관)에 비치된 소형 사무실과 1층의 접수 데스크 옆의 소형 사무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입구 근처에서 일하면 좋은 점은 항상 사람이 붐비는 안쪽에서 눈치봐가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만, 단점이라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심심하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없는 바깥에서 일을 해봤자 결국 스마트패드만 만지작 거리게 될 텐데, 그또한 금세 질릴 것이다.
반면 안쪽에서 근무를 할 경우 다른 직원들과 잡담을 나눠도 되고, 인간관찰이라는 명목하에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사고가 터지면 즉각 대응할 수 있어 부담감이 덜했다. 물론 눈치를 봐가며 일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었지만.
"안에서 일해야지."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네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배운 명언 한 줄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상기한 호국은 병원 1층의 접수 데스크 옆으로 향했다.
정말 들었던대로 딱 4~5평 크기 정도의 투명한 방탄 유리 재질의 방이 존재했다.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손잡이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과 책상 앞에 뚫린 작은 대화용 구멍 뿐이었다.
투명해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는 방 안에는 8대의 CCTV모니터와 인터폰, 그리고 넓은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물 끓이는 전기포트도, 스마트패드 충전기도, 남들 눈엔 안 보이는 작은 화장실도 없었다. 그냥 딱 앉아서 업무만 볼 수 있게 만든, 현대판 노예의 통조림 감옥이었다.
정확히 몇 시간이나 일하게 되고, 또 별도의 휴식 시간이 존재하는 건지는 따로 들은 바가 없지만, 최소한 업무중에는 동물원의 동물 신세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사람이 텅 빈 밤의 거리보단 낫다. 바깥에서 일했다면 멍하니 어두컴컴한 바깥만 바라보며,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머리만 까딱이는 게 전부였겠지.
짐을 대충 구석에 처박아둔 호국은 의자에 앉아 스마트패드부터 켰다.
통신 기능이 제거된 기종이라 외부와의 연락은 물론이고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했다. 대신 시간 때우기용으로 볼만한 것들을 잔뜩 넣어뒀다고 했으니, 환자들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잠깐 정도는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잠깐의 여유가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기 전까지는.
-안내 방송 드립니다. 금일 오전 8시를 기점으로 저희 *&[email protected]@%% 병원의 통상 업무가 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출근자들은 의복과 청결에 신경써주시길 바라며, 반드시 명함을 착용해주십시오.
"명함...명함...명함 없는데?"
주머니를 뒤적이던 호국은 그제야 입사 한달하고도 4일째인 자신에게 명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ID 카드와 보안 카드는 이미 지급받았지만,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대기업 엘리트 사원들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명함은 없었다. 애초에 연구원들 역시 명함을 달고 다니지 않았기에 TF는 원래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결해야 하는 법. 호국은 짐을 뒤져 명함을 만들만한 재료를 찾았다.
일전에 매우 아름다워보이는 귀부인에게서 받았던 바늘 세트에서 실과 바늘을 구한 뒤, 예비용 군화끈 일부에 실을 연결해서 박음질 한 뒤, ID 카드의 작은 키홀더에 실을 묶어주면 끝이었다.
엉성했지만 일단 명함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것을 만들자 그대로 목에 걸었다.
한창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어 몰랐었는데, 어느새 8시 정각을 기점으로 병원내 직원과 환자들이 1층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최소한의 전등만 켜져 있었던 1층 대합실도 모든 전등이 환하게 밝혀졌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건지도 모를 손님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호국의 사무실 바로 옆에 위치한 기계에서 번호표를 뽑아갔다.
그들이 번호표를 뽑아갈 때 마다 꼭 한 번씩 호국과 시선을 마주했는데, 정말로 동물원의 동물 신세가 된 것 같아 살짝 부끄러웠다.
특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온 곰인형을 든 아이는 콧물을 훌쩍이면서 호국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갇혀있는 인간이라면 확실히 신기할 것 같긴 했다.
조명은 슬쩍 품속에서 제주도산 명물 감귤 초콜릿을 꺼내 대화용 구멍 너머로 건네주었다. 대놓고 콧물을 흘릴 정도면 감기에 걸렸다는 건데, 감기에 걸리면 뭐든 잘 먹어야 낫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걸려도 하필 여름 감기를 걸리냐.'
어머니쪽이 '무슨 이유로 병원을 방문했는지에 대해 입력하고 있는 사이, 꼬마는 조심스럽게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병원 짬밥을 원 데이 투 데이 먹은 게 아닌 호국은 병원을 싫어하면서도, 병원의 모든 풍경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노인들, 마스크를 쓰고 업무를 보는 간호사들, 환자의 손을 붙잡고 아련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보호자들.
항상 똑같은 풍경이며, 자신을 포함해서 의료 종사자들이라면 질리지도 않고 봐온 인간군상들이었다.
이윽고 번호표를 뽑은 어머니가 꼬마를 데리고 대기석으로 돌아가자 다음 차례인 휠체어를 탄 여성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 모자와 마스크까지 착용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흰 피부와 가녀린 체구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다만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을 법한 외관과는 달리, 기계를 몇번 조작하다가 잘 안 풀리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마침 어정쩡한 자세로 경비용 사무실에 앉아있는 호국이 눈에 들어왔는지, 유리벽을 통통 두들기곤 번호표 발급기를 가리켰다.
'난 기계 전공이 아닌데.'
그래도 환자가 도와달라면 도와줘야지. 특히 휠체어까지 타고 있는 여성의 도움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앉은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온 호국은 번호표 발급기를 살폈다.
액정 속에는 '무슨 용무로 본 병원을 내원하셨습니까?' 라는 질문과 함께 4개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1. 진료
2. 심층 검사(혈액, 소변 검사 포함)
3. 입원 또는 수술 일정 상담
4. 기타
각기 다른 목적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만 고를 수 있는 구조인듯 했지만, 호국은 그녀가 왜 이곳을 방문했는지 몰랐다.
그럼 대체 왜 도와달라고 부른 것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오히려 상대는 묵묵히 호국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마치 '왜 오셨어요?' 라고 질문해주길 바라는 것 처럼.
왜 오셨어요? 라고 질문하려던 순간, 호국은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건에 입을 다물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마녀사냥 사건. 당시 양 팔을 사고로 잃어버린 한 손님이 보호자와 함께 식당을 방문했었다가, 직원이 두 사람 모두에게 수저를 지급한 사례가 있었다.
직원 입장에선 '아차' 싶은 일이었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이라 깜빡하고 수저를 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지금 양 팔이 없는 자신을 놀리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사건을 인터넷에 올려 '이 식당과 직원은 장애인인 나를 조롱했다'며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가게측은 직원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결코 조롱할 의도가 없었다고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모든 손님에게 식기와 수저, 컵을 지급하는 건 모든 가게가 당연히 하는 것이라며, 홀 직원이 반복 업무가 몸에 밴 탓에 실수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여론의 못매를 맞고 급기야 장애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가게로 낙인 찍혀 폐점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서비스를 하다가 '당연한 것'을 깜빡하고 놓친 사람을 죽일 놈으로 몰아간 희대의 마녀사냥 사건으로 기억했다.
만약 여기서 호국이 '왜 오셨어요?' 라고 자연스럽게 질문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탄 휠체어를 보고도 모르겠냐며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을까? '당연한 것'도 모르고 눈앞의 환자를 조롱한 죽일 놈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1초 앞의 미래를 아는 건 '현재' 뿐이다.
'오해 살 일은 아예 만들지를 말아야지.'
호국은 즉시 기타 버튼을 눌러 번호표를 발급하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기타 사유는 진료든 검사든 상담이든 다 포함될테니까.
그녀가 뚱한 눈빛으로 호국을 올려다보았으나,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이윽고 휠체어를 밀어 대기열에서 이탈했다.
한숨 돌린 호국은 다시 좁은 유리 상자로 돌아와 앉았다.
아침의 병원은 시골이든 도시든 전부 바쁘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사람이 빠져나가고, 오후부터 다시 환자들이 몰려든다.
그렇다고 저녁에 한가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호국이 기억하는 한, 저녁이든 새벽이든 병원 밖에서 울려퍼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의료인들이 스트레처 카를 끌고 가는 시끄러운 소리는 꽤 자주 들려왔었다.
만약 야간 근무까지 자동적으로 이어진다면, 호국은 생각했던 잠깐의 농땡이는 꿈도 못 꿀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여기에 내가 잘 곳이 있나?'
옆에서 머리를 묶은 간호사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열심히 접수 업무를 진행하고 있어 물어볼 틈도 없었다.
괜히 물어봤다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짜증을 낼 것 같아 두려웠다. 사회 생활을 하는 직장 여성이란 호국의 삶에서 항상 안드로메다 이상으로 멀었던 존재인지라 부담감 백배였다.
'늦어도 저녁 전에는 알려주겠지.'
설마 사람을 병원 대합실에서 재우려는 건 아닐테고.
바로 그 순간, 호국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이 고전적이면서도 향수가 느껴지는 전자음. 호국은 광속의 속도로 인터폰의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메뉴얼대로 대답했다.
"당직근무자입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하지만 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호국은 힐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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