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94화 (94/209)

< 경비 업무 일지 : 매드맥스(4) >

끼이이익! 쿵!

"...쿵?"

트럭의 전 주인이 과연 미니 냉장고에 뭘 채워놨을지 궁금해 아래를 살피고 있던 호국은 문득 작은 진동을 느꼈다.

뭔가를 들이박긴 들이박은 것 같은데, 몸이 크게 흔들릴 만큼 진동이 거센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누가 트럭 전면부를 발로 걷어찬 수준의 진동이었다.

차창 위로 고개를 내민 호국은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뀐 것을 눈치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레이스 경기장을 질주하고 있었건만, 레이스는 온데간데 없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황무지가 호국을 반겨주었다.

모래 가득한 사막과는 조금 달랐는데, 우선 바위가 굉장히 많았다. 어느 정도로 많았냐면 이곳에 채석장을 마련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네셔널지오그래픽 애청자인 호국의 기억 속에 이런 풍경이 존재하는 국가는 미국과 호주였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겠지만, 호국이 본 자연 vs 인간 편에선 딱 두곳만 소개됐었다.

당연하지만 호국의 머리로 이곳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중심부인지, 아니면 호주의 사막화가 진행된 드넓은 황무지의 한복판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어딜 보든 다 똑같은 바위와 말라비틀어진 초목, 그리고 작열하는 햇빛 아래에 뜨겁게 달궈진 지면 뿐이었으니까. 포장도로라도 존재했다면 길을 따라 쭉 달려볼 의향도 있었지만, 아쉽게도는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부족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 한눈 팔고 있던 사이에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IQ 84의 한계에 봉착한 호국은 프롯의 도움을 받으려다, 프롯이 든 스마트 패드를 1번 차에 꽂아둔 채로 와버렸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그럼 아쉬운대로 이거라도......"

이 미심쩍인 네비게이션이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호국의 터치 패널 연타를 이기지 못한 네비게이션은 결국 새로운 답변을 토해냈다.

-현 이용자가 만나고 싶은 대상 : 부모님

-목표 대상과의 거리 : 약 200m

-현 위치 : RE 004 호주 할스 크릭(Halls Creek) 외곽 바위산

-자율 주행으로 최단거리까지 접근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웃기는 네비게이션이네. 부모님이 이런 곳에 계실리가 없는데. 컨셉 하난 진짜 잘 잡았어."

호국도 자신의 부모가 등산에 미쳐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속도위반 결혼으로 젊은 시절에 호국과 세희를 낳지 않았더라면 에베레스트 산맥 등반에 도전했을 거라고 큰소리 쳐댔던 것이 그의 부모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현실에서의 등산 대부분을 포기하는 대신, 가상 현실에서 인간이 꿈도 못 꿀 난이도 높은 산에 한창 도전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가상 현실 모드 개발자가 만든 바빌론 산맥(20km)에 도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포기하고, 있는 게 바위 뿐인 밋밋한 산을 찾아왔을리가 없다. 에베레스트처럼 특출나게 높은 것도 아니고, 캠핑을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부모의 등산 취향이 확고하다는 걸 모를리 없는 호국은 피식 웃으면서도 '확인'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고장난 네비게이션의 AI가 멋대로 폭주하고 있는 것 뿐이겠지. 적당히 사람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면 전화를 빌려서 TF에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화물 트럭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급발진을 했다.

목적지는 황량한 바위산. 브레이크도, 감속도 없었다. 즉 빠꾸 없는 바위산 vs 5톤 화물 트럭의 실사판이었다.

"이런 미친......!"

방향이라도 틀어보려 운전대를 쥐었으나, 운전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브레이크도 콱콱 밟아봤지만 브레이크가 들어가는 느낌도 없었다.

미친 트럭에 갇혀 인생을 쫑내기엔 호국은 너무 젊었다.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위험하더라도 차량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집념으로 문을 비틀어 열었으나, 모든 문과 차창의 잠금 장치가 들어가버렸다. 완벽한 밀실. 그리고 교통사고가 융합되는 순간 전대미문의 해결 불가능한 밀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가해자는 없지만 피해자는 IQ 84의 20대 청년으로 확정이다!

"아, 안 돼......!"

그 와중에도 어찌어찌 안전 벨트를 착용한 호국은 바위산 초입과 화물 트럭이 충돌하는 타이밍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눈으로 보지만 않는다면 왠지 덜 아플 것 같았으니까.

카가아아앙!

쾅! 이 아니라 금속문이 볼품없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실눈을 가늘게 떴다.

멀쩡한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광산 내부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지하 갱도였다.

백미러로 후방을 살펴보니 바위로 정교하게 위장되어 있던 철문이 볼품없이 찌그러진 채 나가떨어진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갱도 내에 설치된 경고등이 붉게 빛나며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넓은 갱도의 벽-이라고 생각했던 방문-이 열리면서 몇몇 외국인들이 다급히 뛰쳐나왔다.

그들은 쏜살같이 자신들을 지나쳐 가는 화물 트럭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쳤다. 곧이어 후방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호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낮췄다.

'무단 침입은 내 잘못이 아닌데!!'

미친 트럭이 제멋대로 폭주한 것 뿐인데!

이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싶은 순간, 자신이 두고 온 게 프롯만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장비도 두고 왔어!!'

위험한데다 무겁기까지한 펄스 라이플과 진압봉은 메인터넌스 존에 두고왔다. 차 안에 무겁고 부피도 큰 것들을 가지고 타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손으로 허리춤을 쓸어본 호국은 스턴건 대신 건홀더에 끼워둔 낡은 리볼버 권총이 잡히는 게 느껴졌다. 반대편의 작은 파우치도 그대로였다.

'진짜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방어는 해야지.'

남의 집을 미친놈 마냥 헤집고 다니는 화물 트럭 속에서 호국은 리볼버의 실린더 속을 확인했다. 탄환은 여섯 발이 꽉 채워져 있었다.

군에 있던 시절, 행보관이 자신의 개인 룸에서 자신의 수많은 컬렉션(총기)들을 보여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외국에 나가게 될지도 모르니 배워둬라'며 호국에게 여러 무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쳤었다. 군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총기 분해, 조립이나 사격술과는 다른 맛

이 있어서 꽤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행보관이 실수로 호국을 향해 총을 떨어뜨렸던 것만 빼면 정말 즐거운 한 때였다.

어쨌든, 그 경험을 살리는 순간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행보관님이 가르쳐주신 총기 활용법의 맛, 잊지 않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직접 찾아가서 시원한 맥주라도 사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호국이 손에 쥔 것은 행보관이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리볼버 권총이었지만 구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행보관이 사용했던 것은 방아쇠만 당기면 설령 불발이 일어나더라도 실린더가 돌아가며 다음 탄환을 내뱉는 더블 액션식이었다.

반면 호국이 중년 신사에게 반쯤 강제로 넘겨받은 권총은 싱글 액션식이었다. 한 발을 쏘고나면 반드시 수동으로 해머를 당겨서 코킹을 해줘야 했다. 그래야 실린더가 돌아가고 차탄을 발포할 수 있는 구조였다.

'좀 낡긴 했지만 총기 자체는 문제 없어.'

손때가 잔뜩 묻은 것 치곤 금이 가거나 마모된 흔적도 없었다. 관리를 잘 해줬다는 증거였다.

실린더를 도로 끼워넣은 호국은 때마침 차량 앞을 막아서는 바리게이트를 발견했다. 지면 속에서 올라오는 두꺼운 철골 구조물이었다.

폭주하는 화물 트럭조차 우습게 막아내는 그 바리게이트! 게다가 바리게이트 너머에선 차량이 멈추자마자 즉시 달려들 준비를 한 무장 인원이 다수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충돌할 거라는 느낌이 들어 바짝 긴장했으나, 호국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바리게이트 너머, 약 30m 정도는 떨어져 있던 무장 세력이 순식간에 차량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차량이 그들 앞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호국의 눈썰미로도 그 사이의 과정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혹감도 잠시, 무장 세력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코앞에서 등장한 화물 트럭에 반응하지도 못 하고 치였다. 진동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처음에 느꼈던 그 원인모를 진동과 비슷한 수준의 진동이 여러 번 느껴졌고, 정신을 차려보면 무장 세력들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앗, 아아......!"

호국은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 이제야 멈춘 트럭에서 가까스로 내렸다. 생생한 사고 현장에 피해자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은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총을 들고 이세계로 갔을테니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겠지?'

운 좋은 양반은 엘프 마누라를 만나 팔자를 고칠지도 모른다.

탕! 탕!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총성에 재빨리 자세를 낮춘 호국은 넓은 갱도의 위치한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흡사 공항의 보안 검색대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는데, 통조림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 수십 개가 안쪽으로 운반되는 중간지점인 듯 했다.

상자 몇 개를 발로 밀어 마구 흐트러놓았다. 적들에게 쫓기고 있을 땐 쓸데없이 되돌아 오는 길을 걱정하지 말고, 우선 추적자들의 길을 가능한 엿같이 만들어 놓으라는 가르침 덕분이었다.

갱도에서 들려오는 새된 고함 소리와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국은 즉각 다음 갱도의 구조를 살폈다.

다음 갱도는 차량이 다닐 것을 염두해두지 않았는지 학교의 복도처럼 약간 좁았다. 다만 그만큼 손잡이가 달린 철문이 굉장히 많았다.

철문에 뚫린 빗살 같은 구멍을 통해 흘러나오는 역한 악취는 코가 비틀어질 것 같았다. 이곳이 지독할 정도로 덥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단순히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가 아니었던 것이다.

'희미하지만 피 냄새가 섞여있어.'

호국의 예민한 귀는 작게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철문에 살짝 귀를 갖다대보면 피가래가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뱉는 자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마치 이 갱도 전체에 고통받는 환자들이 한 트럭은 되는 것 같았다.

어째서 화물 트럭이 이곳에 돌진했는지, 이곳의 사람들이 다짜고짜 호국에게 총질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TF 산하의 제 6 처리시설이 이곳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머리에 냉수를 끼얹은 것 처럼 차분해진 호국은 일일이 철문을 열어 안을 확인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당장 호국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복도를 좀 더 뛰듯이 걷자 T자형 길목과 마주했다. 죄다 어려운 영어로 쓰여 있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왼쪽을 선택했다.

왼쪽을 고른 건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왼쪽에서 흘러나오는 피비린내가 좀 덜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중요시 여기는 장소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이유가 없고, 그런 장소라면 탈출구가 존재하거나, 역으로 농성하기 쉬운 구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또한 행보관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만약 갈림길 중에서 어느 쪽도 피비린내가 풍겨오지 않는다면? 소음으로 판단하면 된다.

왼쪽으로 달려나간 호국은 때마침 측면에서 철문을 열고 나오는 한 인간의 머리를 잡아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그가 들고 있던 총이 아슬아슬하게 호국의 옆을 스치며 탄환을 낭비했다.

타카카카카!

매끄러운 콘크리트 갱도 내부에 도비탄이 마구 날아다녔다.

"내가 듣기 싫은 것도 다 들리는 귀라서 어쩔 수 없어."

"커흐으으!"

총을 장전하는 소리, 철문에 기대 선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호흡음, 그리고 호국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철문을 열고 뛰쳐나왔으니 애초부터 기습의 의미가 없었다.

한 번 더 상대의 머리를 벽에 때려박은다음 아래로 축 늘어지는 상대의 배에 자연스럽게 니킥을 차올려주었다.

탄창이 텅 비어버린 상대의 총은 쓸모가 없다. 추가 탄창이야 방 안을 뒤지면 나오겠지만,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복도 끝의 중심부에 위치한 철문은 일반적인 철문보다도 3배 가량은 더 넓어보였다. 그 안에서 작은 덮개를 열어젖힌 상대가 총구만 내민 채 무차별적으로 탄환을 퍼붓기 시작했다.

거의 반쯤 미끄러지듯이 복도 옆으로 피했다가 손으로 벽을 짚고 단숨에 뛰쳐 올라 차탄을 피했다.

즉흥적으로 시도하는 회피 행동이었지만 운 좋게 탄환은 모두 빗나가주었고, 호국은 제비처럼 낮게 움직여 총구가 미처 겨눌 수 없는 사각지대까지 무사히 골인했다.

철문의 덮개가 닫히고 안쪽에선 영어로 무어라 지껄이는 인간들의 목소리와 탄창을 갈아끼우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셋? 넷? 아니 여섯.'

넓은 방이라 그런지 인기척이 제법 느껴졌다.

'지금 되돌아가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있고, 전진하려면 이 문을 뚫어야 하는데......'

덮개는 안쪽의 인간이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여는 구조라 바깥에서 억지로 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문 역시 굳게 잠겨 있겠지.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고 되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 호국은 허리춤의 파우치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파우치를 열어보니 짚인형과 바늘세트, 그리고 어금니를 넣어둔 구토 봉지가 크게 뛰어올랐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어금니가 마치 발이라도 달린 것 처럼 바닥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더니, 호국이 반쯤 죽여놓은 인간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졌던 남자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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