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92화 (92/209)

< 경비 업무 일지 : 매드맥스(2) >

히치하이킹의 기본은 완벽한 자세다.

나는 반드시 이 차를 타야만 한다, 이 차를 타지 못 하면 다리가 부서지도록 걸어야 한다, 그런 절실함과 애절함이 묻어나오는 비굴한 자세야말로 히치하이킹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손을 들어올려서 차를 세워야만 하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호국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레이스에서 엑셀을 미친듯이 밟아대는 차를 세우는 일은 정말 간단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차량을 골라주십시오.

"저기 빨간색 1번 승용차."

모두 자율 주행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는 차량인지라, 호국이 손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프롯이 차량을 원격 제어 해서 메인터넌스 존으로 끌고 들어왔다.

메인터넌스 존은 숙련된 정비공들 대신 즉시 바닥의 덮개를 열고 올라온 기계 팔들이 마모된 타이어를 교체해주고 엔진 상태를 점검했다. 물론 운전석에 묶인 인간을 점검하지는 않았다.

아무렴, 운전자가 있어야 조수석에 편히 탈 수 있는 법. 호국은 정비가 끝난 차의 조수석에 올라타 오늘의 기사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이스 하기 딱 좋은 날이죠?"

"으으읍! 읍읍?!!"

하관보호대 같은 것으로 입이 막혀있는 남자는 호국을 보자마자 거의 발광에 가까운 수준으로 날뛰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옥죄고 있는 구속구는 6-01을 구속하는 것과 같은 재질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금속 소재의 구속구를 해제할 수는 없을 터.

그래도 호국과는 달리 운전 면허가 있으니 운전석에 앉은 것이리라.

"출발!"

-평범하게 경쟁 차량들이 코스를 돌고 나면 타이밍을 맞춰서 자연스럽게 라인에 합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복합 V8 엔진에 일시적으로 과부하를 일으켜 기존 마력 성능을 최대 2배 가까이 끌어올려 초고속으로 후미를 따라잡는 겁니다.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방법을 추천합니다.

"V8."

-미리 말씀드리지만 순간 가속이 엄청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중압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운전에 실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탑승자들의 부담이 큽니다.

"V8."

-바로 전날에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는데, 그런 방식으로 레이스를 즐기신다면 분명 탈이 날 겁니다. 우선 평범하게 라인을 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V8."

-...그럼 운전대를 뽑아주십시오.

프롯의 명령에 따라 호국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운전대를 뽑아들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성이 소스라차게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으으으으읍?!"

"아, 괜찮아요. 운전대좀 뽑는다고 해서 고장나는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발광하는 기사님을 진정시킨 호국은 차창 너머로 몸을 뺀 채 운전대를 높이 처들었다.

"V8!"

-안전 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

"아, 그래."

빠르게 김이 빠진 호국은 안전 벨트를 착용하면서 전광판으로 레이스의 현황을 확인했다.

자신이 탑승하고 있는 1번 차량이 1등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최후미로 밀린 상태였다.

요즘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자율 주행형 택시인 2번 차량이 선두, 그 뒤로 배달 차량이나 SUV, 낡은 용달 트럭이 따라붙었으며, 그 뒤를 5톤 짜리 이세계 전생 화물 트럭이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5톤 트럭은 특유의 마력이 높기로 유명하지만, 차량 구조상 정차와 커브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최고 속력 자체는 의외로 높지 않다. 사실 최고 속력이 높다고 해도 그 어떤 트럭 기사도 최고 속력까지 올리진 않는다.

'두돈반 트럭은 끔찍했었지.'

군에 돈 쓰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높으신 분들께선 여전히 2050년까지도 '개량된' 두돈반 트럭을 사용했다.

실려가는 짐짝 입장에선 탑승감이 매우 뭣 같으며, 운전병 입장에선 차라리 민수용 SUV에 죄다 태워서 실어나르고 싶은 심정이라고 들었다.

그 엿같은 트럭과 동급의 5톤 트럭이 지금막 코스의 절반을 넘어섰다.

"금방 따라잡겠네엑!"

한 번 더 흥에 겨워 V8 이라고 외치려는 순간, 제로백 3초를 기록하며 호국의 등을 조수석 등받이에 묻어버렸다.

속도의 힘 앞에서 호국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팍에 뽑아낸 운전대를 품는 것이 한계였다. 속도 표시기는 순식간에 시속 100km를 넘어, 단숨에 200km를 돌파, 어느덧 250km를 향해 싸이코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드래그 머신도 아닌, 그저 최신예 성능을 갖췄을 뿐인 승용차에 약간의 부품 교체를 했을 뿐인데, 미쳐날뛰기 시작했다.

승용차 특유의 안정감에 AI의 자율 주행 시스템, 거기에 괴물 같은 부품 몇 개를 더한 것으로 드래그 머신 비스무리한 성능이 나온 것이다.

"그르르륵! 그르륵!"

운전석의 남자는 고개를 조금씩 흔들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몸이 파묻혀있는 것은 호국과 별반 다를 것 없었지만, 구속구로 빈틈없이 묶여있는 그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후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쳐!"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후미가 보였다.

육중하지만 탁월한 운전 솜씨를 자랑하는 이세계 전생 트럭. 게다가 트럭 기사의 조심성도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최고 속력을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건방진 트럭의 엉덩이를 포착한 호국의 차량은 본격적으로 스퍼트를 냈다. 어느덧 속도 표시기는 시속 300km가 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육중한 트럭이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느냐마는, 모든 리스크를 다 감수하면서 미친듯이 밟아대기만 하면 나름 무시무시한 속도가 나온다.

-거의 다 따라잡았으니 속도를 줄이겠습니다. 이제 경쟁 차량들보다 '살짝' 더 빠른 수준을 유지하겠습니다.

V8 뽕도 잠시. 이세계 전생 트럭의 옆으로 들러붙은 1번 차량은 서서히 감속해가며 주변과 속도를 맞췄다.

급작스러운 감속은 심각한 타이어 마모나 차량 전복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AI식 운전은 그 모든 걸 리스크 없이 해냈다.

시속 200km 아래로 내려온 속도 표시기를 본 호국은 그제야 조금 편해진 것 같은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그 잘난 트럭이 옆모습은 얼마나 잘 빠졌는지 구경하려는 찰나, 트럭이 순식간에 옆으로 붙어왔다.

조금 앞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차량들 때문에 당장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없었던 1번 차량은 하마터면 트럭과 충돌할 뻔 했다.

"미친 거 아냐?!"

-정상입니다. 6-173은 인간을 들이받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레이스에 참가하는 모든 차량은 경쟁 대상입니다.

"레이스만 끝내면 만족하는 거 아니었어?"

-고기 냄새 실컷 맡았다고 고기를 먹지 않고 식사 끝내는 인간이 있습니까?

"고기 냄새만 즐기는 채식주의자?"

-안타깝게도 6-173은 실물도 맛보길 원합니다.

조금 전에는 프롯의 재치로 차량의 방향을 살짝 틀어 충돌 지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6-173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무시무시한 배기음을 울리며 다시 한 번 몸통박치기를 시전해왔다.

도로 위의 폭군, 지배자, 마왕, 천마.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것이 바로 화물 트럭이다.

도시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일단 대가리부터 들이밀고보는 시내 버스 기사를 욕하겠지만, 고속도로좀 타본 사람은 트럭 기사를 욕한다.

뭘 어떻게 해도 항상 도로 위에서 피해보는 건 트럭 기사를 제외한 모든 운전자들이니까.

그 트럭이 지금 막 승용차를 들이박기 위해 일부러 라인을 좁히면서 옆으로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고 있다.

저 거대한 타이어와 닿기만 해도 차량 도색이 다 벗겨질 것 같은데, 하물며 육중한 덩치의 일격을 받았다간 전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미친 게임을 끝내야 해.'

레이스는 딱 레이스로만 즐겨야 한다.

거기에 함정이나 폭발물, 운전자들간의 총격전을 추가하면 그때부터 삼류 막장 액션 영화가 되는 거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바주카포를 들고 적 차량에 뛰어들어 자폭하는 정신이상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래선 안 된다.

폭발물도, 총격전도, 정신이상자도 존재하지 않는 클린 레이스야말로 오락의 꽃.

호국은 프롯에게 좀 더 감속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차창을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감속한 덕분에 트럭의 측면에서 다시 후미로 이동한 1번 차량은 상대의 꼬리에 바싹 들러붙었다.

'레이스를 레이스로 즐길 생각이 없다면, 직접 깨닫게 해줘야지.'

고작 돈을 걸지 않는 것 만으로도 카지노에서 도박이 아닌 순수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6-173의 충돌 본능만 없앨 수 있다면, 순수한 속도 경쟁의 참된 레이스를 즐길 수 있으리라.

-뭘 하시려는 겁니까? 차창 밖으로 몸을 빼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이 트럭엔 운전자가 없잖아. 운전자가 없으면 브레이크 밟아줄 사람도 없다는 건데, 그러면 안 되지!"

무시무시한 바람 속에서도 간신히 1번 차량의 보닛 위에 올라선 호국은 트럭의 화물 수송칸을 잡고 기어올랐다.

트럭을 운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당히 감속만 시켜준다면 나머지는 프롯이 알아서 특수 컨테이너에 넣어줄 것이라 믿었다.

레이스를 즐기는 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람을 들이박는다? 그럼 사람을 들이박지 않게 될 때 까지 강제로 레이스에 참가시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후우! 영화에선 달리는 차량 사이를 이동하는 게 엄청 쉬워보였는데...! 장난 아니네!"

군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라 호국은 몇 번 더 숨을 고르고, 차량의 운전석 뒷편에 존재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유사시 탑승자가 뒤쪽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끔 설계된 창문인 듯 했는데, 다행히 창문의 잠금 장치는 해제되어 있었다.

"어우, 두 번은 못 하겠네."

가까스로 운전석에 기어들어온 호국은 생각 외로 괜찮은 트럭 내부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고작 트럭일 뿐인데, 조수석이 없는 대신 식수대와 간이 화장실, 보존 식량을 저장하는 작은 수납함이 보였다.

거기에 운전석에는 네비게이션부터 무전기, 소형 냉장고와 에어컨을 비롯해서 여러 편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딱 하나, 운전대가 없는 것만 빼면 정말 완벽한 미래형 트럭 운전석이었다.

"너에게도 V8의 정신을 나눠주지."

진정한 V8은 사람을 들이박지 않는다. 차에 매달아서 끌고 다닐 뿐.

가슴팍에 달고 있던 V8 운전대를 빈 자리에 박아넣자 놀랍게도 네비게이션에 전원이 들어왔다.

TF 직원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스마트패드와는 조금 다른 모델이었지만, 호국이 사용하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조작감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던 것이다.

다만 네비게이션의 작동 유무보다는 먼저 감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호국은 뒤늦게 자신이 트럭의 감속법 따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왠지 냅다 브레이크만 밟으면 될 것 같지만, 본능이 그러길 거부하고 있었다.

'IQ 84라서 죄송해요......!'

자신이 좀 더 똑똑했다면 군을 전역하자마자 재깍재깍 운전 면허를 취득했을텐데, 너무 멍청한 나머지 공장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있었다.

참담함 속에서 운전대 위에 축 늘어진 호국은 문득 푸른 빛이 점멸하고 있는 네비게이션을 들여다보았다.

-차원 항로 자동 설정 시스템 작동중

-돌아가시겠습니까?

-YES / NO

"이전 사용자가 이상한 설정을 해뒀나보네."

NO 버튼을 누른 호국은 다시 한 번 나타난 질문에 의아함을 느꼈다.

-가고 싶은 장소가 있습니까? (20자 이내 작성)

-목표 지점 : --

-확인 / 취소

"일해야 하는데 가긴 어딜 간다는거야."

이왕이면 트럭의 감속법이나 좀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대충 취소 버튼을 연타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귀찮은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장소가 없다면 만나고 싶은 대상이 있습니까? (20자 이내 작성)

-목표 대상 : --

-확인 / 취소

이 또한 취소로 넘기려다, 문득 호국은 부모님을 떠올렸다.

등산 중독자인 부모님들은 현실에서도 정기적으로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며 종종 북한산을 오르곤 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가상 현실에서도 등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가상 현실의 에베레스트 산맥을 등반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부모님과 만나서 첫 월급을 두둑이 받았다느니, 용돈으로 300이나 넣어드렸다며 자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 밖으로 잠깐 나가서 전화를 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전화로만 안부를 전하는 건 조금 밋밋했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 그냥 빈 칸에 부모님을 써넣었다.

-목표 대상 : 부모님

-확인

-도약 준비 완료

프롯은 자율 주행 시스템을 맡고 있는 1번 차량의 카메라를 통해 까무러칠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가드-079를 태운 트럭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다.

-...비상 사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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