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7) >
"당신들이 최초 신고자인가요?"
늦은 시간이라 의자에 기대어 꿈뻑꿈뻑 졸고 있던 조현석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의 앞에 서있는 것은 TF의 중추인 것 치곤 꽤 젊어보이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금발의 외국인인 것 치곤 한국어가 매우 능숙했다.
"반가워요. TF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를 일임하고 있는 현장 지휘관 모르슬락 보리스라고 해요."
"마,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단은 TF 산하에 속한 대기업인 MOD 사의 과장인 만큼 조현석도 TF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굳은 얼굴로 서있는 임기춘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렇게 딱딱한 어조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최초 신고자 겸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한 것 뿐이니까요. 그럼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눠 볼까요?"
조현석과 임기춘은 앞서 가는 타국 현장 지휘관을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심문실-이라는 이름의 고문실-의 벽 하나를 통째로 블랙 미러로 바꿔둔 관찰실이었다.
블랙 미러를 통해 심문실 내부의 광경을 확인한 두 사람은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TF와 관련이 있는 만큼 자신들도 더이상 일반인이라 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살아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치 못 했던 것이다.
"지금 이게......?"
"1급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유력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있는 광경을 본 건 처음인가보죠?"
세상 어느 일반인이 그런 걸 두 번 봤겠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조현석은 간신히 욕지기가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 대신 블랙 미러를 통해 보이는 끔찍한 광경을 최대한 눈에 담아두려 노력했다. 단순히 보기 싫은 광경이라고 해서 눈을 돌렸다간 뒤끝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래서 TF가 무섭다 무섭다 하는 거였군.'
신고를 한 건 조현석과 임기춘이었으나, 신고한지 단 10분 만에 출동한 기동타격대와 조사관들이 현장을 뒤엎을 때는 소름이 돋았었다.
김선열과 이세령 부부는 처음에는 경찰로 위장한 조사관들을 돌려보내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보였다.
하지만 직후에 들이닥친 기동타격대 대원들이 부부를 습격했고, 놀랍게도 부부는 반격을 가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양 팔에서 권총이 생성되었고 마구 난사해댔다. 갑작스러운 총기 난동에 인근 지역이 발칵 뒤집어졌지만, TF는 별 어려움없이 처리해버렸다.
그 결과가 지금 심문실의 벽에 구속된 채 해부당하고 있는 두 부부의 모습이다.
아니, 정확히는 김호국의 부모로 위장한 극렬 테러리스트 추정자들이라고 해야겠지.
"저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진리교는 아니더군요. 진리교는 교인 개개인의 생명보다 교리를 더 중요시 여기긴 해도, 이 시대의 첨단 기술을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경향이 있어요. 가령 안드로이드를 사용할지언정, VR 기기나 사이보그 시술은 절대로 하지 않죠."
"저희는...그런 집단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냥 김호국의 부모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신고한 것 뿐입니다."
"그런 판단을 하신 이유가 듣고싶네요."
이미 심문을 통해 모두 밝혀냈을텐데 굳이 재차 묻는 건 참 나쁜 취미라고 생각했다. 이건 두 사람을 떠본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조현석은 TF에겐 최대한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다.
"김호국이 세계 최초, 유일무이하게 VR 기기 부적합자 판정을 받은 사건은 정말 유명합니다. 당시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조차 접속할 수 있었던 VR에 김호국 한 명만 접속하지 못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세간이 떠들썩 했었습니다.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게 아닌 이상, 김호국의 부모가 그 사건을 잘못 알고 있었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을 해서 수상쩍게 여겼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저들이 사이보그라고 밝혀졌는데, 사이보그는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체내에 심어진 각종 기계 부품들이 VR 기기와 충돌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저희가 방문하기 전 부터 느긋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을 만큼 VR에 대한 집착과 열망이 옅어보였습니다. 애초부터 사이보그였으니 VR과 가까울 일이 없어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겁니다."
"놀랍군요. 괜히 가상현실 전용 모드를 개발하는 회사의 직원이 아니란 건가요? 그정도의 관찰력이면 TF의 조사관으로 활동해도 괜찮은 성과를 낼 수 있겠어요."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는지라......"
조현석은 조금 튀는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줄 아는 남자였다.
임기춘 만큼은 아니어도 눈칫밥 하나는 잘 먹었고, 남몰래 하는 행동은 쓰레기 같을지언정 주변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게끔 신변 관리도 잘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높으신 분에게 점수를 따두고 싶었기에, 현장에 출동했던 조사관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또 다른 비밀을 보리스에게 슬쩍 밝혔다.
"그리고 아들을 그렇게나 걱정하면서, 정작 아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눈치더군요. 아들의 거짓된 과거를 술술 털어놓기는 했지만, 정작 지금 김호국이 뭘 하는지는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씩씩하고 배려심 깊은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지금 그 아들이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았으니, 사전에 습득해둔 정보가 제한적이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짝짝짝.
보리스는 가볍게 박수를 쳐보이곤 블랙 미러 너머의 테러리스트 추정자들을 가리켰다.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으니 저도 한 가지 알려드리죠. 저것들은 인류퇴화연맹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어요."
조현석은 왜 그게 좋은 정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이만한 인물이 좋다고 하면 좋은 거고, 설령 야구공을 사과라고 해도 사과라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조현석과 달리 임기춘은 다른 의미로 정보를 받아들인건지 선뜻 질문을 던졌다.
"설마 그...모든 인류가 생태계의 자연 도태 순응에 따라 퇴화하고, 도태되고, 종국에는 멸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알고 계셨나요?"
"지금은 퇴물이나 다름없지만, 제가 젊었을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영업직의 특성상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들을 남몰래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됩니다."
조현석은 바로 수긍했다.
영업직의 가장 친한 친구는 술이고, 그 술을 무기로 이용해서 많은 고객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그 고객이란 양반들은 하나같이 잘난 양반들 뿐이라 술좀 걸쳤다 하면 촉새마냥 떠벌대곤 했다.
특히 나는 이런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도 가지고 있다, 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은 영업직을 죽마고우처럼 여기면서 이것저것 마구 털어놓기도 한다.
그게 언젠가는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괜히 술이 원수라는 말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당시 모 대학 총장과 교수진을 단체로 VIP로 모시면서 신 모드 납품 건을 조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한 교수가 요즘 사상이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게 분명 인류퇴화연맹이라는 특이한 집단이었습니다."
"지식과 사상을 남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위치에 올라선 대학 교수라면 알고 있을 법 하지요. 아마 그때 들은 것과 크게 다를 건 없을 거예요. 정말 '그런' 집단이니까요."
"그런 집단이 대체 왜 김호국을......"
"뻔하죠. 인류 퇴화의 심볼로 삼으려는 거예요."
보리스가 블랙 미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들기자, 블랙 미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심문실과 관찰이 연결되었다.
심문관에 의해 정신이 멀쩡한 채로 해부를 당한 두 명의 사이보그는 죽일듯한 시선으로 일행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이 본래 김호국을 납치하려 했던 시기가 지금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였다는 건 알고 있어요."
"......"
"그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대충 20세 안팎이었겠죠. 하지만 김호국을 납치하기 직전에 그는 군대로 가버렸고, 납치 계획이 꼬여버렸을 거예요. 제 말이 틀렸나요?"
두 사이보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입을 여는 순간 페이스에 말려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필시 전문적으로 고문 훈련을 받았으리라.
"전 세계 인류 중 유일하게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낙오자, 나날이 진보하는 인류의 최첨단 기술의 유일한 부적합자. 퇴화, 도태, 그리고 멸종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기에 가장 걸맞는 인물이었겠죠. 가족을 인질로 잡고 그를 협박하면 인류퇴화연맹의 훌륭한 선전대사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 것 아닌가요?"
보리스의 추측은 정확히 핵심을 찔렀을 것이다.
두 사이보그는 유의미한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에 담긴 살의가 등골을 축축하게 적실 만큼 늘어났다. 아무리 눈치 없는 놈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그가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날을 잡아 가족들과 함께 납치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세간에서 모습을 감춰버리자 당황했을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주 최근에, 그의 가족들부터 납치한 거겠죠?"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조현석의 질문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최근에 김호국이 휴가를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 했고, 납치 당하지도 않았다는 건 그때까지 그의 가족이 납치당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모든 게 정상이었으니까."
모든 걸 꿰고 있는 듯한 보리스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김선열로 위장하고 있던 남자 사이보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너희 TF가 한 발 앞서 '퇴보자'를 확보했다는 건 이미 파악해두었다. 그래서 퇴보자의 가족들을 먼저 납치했지. 항상 가족에게 배려심이 깊었고, 효심이 지극정성인 그라면 모든 걸 버리고 우리 연맹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게끔!"
"그때는 김호국을, 아니. 가드-079를 은폐해버릴 텐데요. 당신들이 원하는 퇴화 버전의 선구자는 영영 찾을 수 없겠죠."
"흐흐, 허세 부리지마라. 너희 TF가 퇴보자를 어쩌지 못 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결국 퇴보자는 가족들을 찾아 연맹의 품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다."
남자 사이보그의 공격적인 어조에 보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군요. 조금 전의 발언으로 TF내에 인류퇴화연맹의 끄나풀이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으니, 우린 그쪽을 먼저 잡아 족치면 될 일이죠. 끄나풀이 핵심 정보원인 만큼 당신들과는 정보의 질이나 양이나 차원이 다를 테니까요."
"지금껏 꼬리도 밟지 못 한 주제에 바로 찾을 수 있다는 것 처럼 말하는군. 너희 TF가 싸질러 놓은 똥과 닦지 못한 뒤의 수를 합치면 기네스북 등재 기록보다는 많을걸."
"적에게 걱정을 받을 정도로 TF의 사정이 어려운 건 아니예요. 대출을 받은 것도 아니고."
농담처럼 안 들리는 농담으로 웃어넘긴 보리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인류퇴화연맹 소속의 사이보그라는 건 밝혀낸데다 김호국의 가족의 현 상황과 적들의 목적까지 파악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은 이정도면 충분했다.
"독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체내 어딘가에 송수신기가 존재할 거예요. 메모리 칩과 함께 찾아내서 제출하도록 하세요."
심문관이 고개를 숙여보이며 다시 연장을 집어들었다. 이제 두 사이보그는 세포 하나, 부품 하나 모두 분해 당할 것이다.
"그럼 두 공로자 분은 따로 얘기를 하실까요. 적절한 보수도 드려야 하는데 이런 자리는 좀 안 맞네요."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고 했던가.
패배자는 이런 골방 같은 지하실에 처박힌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고, 승자는 술자리에서 역사를 논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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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째의 업무도 무사히 끝마친 호국은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B40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에도 다시 한 번 여러 ES의 은폐실에 들러 뒷정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하루종일 몸만 쓰는 노동이 가득했던 농사왕 대탈주 미수 사건 사후처리가 좀 더 괜찮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정신적 피로는 육체의 컨디션과 관계없이 항상 사람을 지치게 만드니까.
게다가 한술 더 떠서 호국의 육체 컨디션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잠깐 쉬면 괜찮아지겠거니 싶었던 이 몸살감기 같은 상태는 오후 내내 지속되었다. 업무 중이라 별 다른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통증을 참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뭘 잘못 먹기라도 헀나?"
화장실에 갔을 때는 건강함의 상징인 황금을 봤다.
여러 번 먹은 적 있는 바텐더의 식사에 문제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고,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워먹은 기억도 없다.
문득 의사양반이 줬었던 다크다크 레인보우가 떠올랐지만 그건 아예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의사가 준 게 독일리도 없고, 애초에 다크다크 레인보우는 자신이 거의 매일 마셨던 음료가 아닌가.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루종일 에어컨 바람만 쐬다보니 냉방병인지 뭔지 걸린 게 틀림없다며, 호국은 따스한 침낭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프롯에게 부탁해서 B40의 전등을 꺼버리고, 침낭 속에서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훌륭한 눈썰미를 자랑하는 눈도 이 순간 만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다만 눈처럼 귀를 어쩌지 못 한다는 게 조금 거슬렸다.
'눈은 감으면 그만이지만 귀는 항상 열려있으니까 듣기 싫은 소리도 억지로 들어야 해.'
귀마개를 하면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린다.
귀마개를 하지 않으면 주변의 잡음과 미묘하게 거슬리는 이명이 신경을 자극한다.
그래도 결국 언젠가는 잠들게 된다. 눈만 감고 있으면 결국 피로에 지친 몸이 스스로 전원을 꺼버리니까.
하지만 눈처럼 귀를 '통제'하지 못 한다는 건 정말...예전부터 불만스러웠다.
주변에서 항상 쉴새없이 들려오는 의사들의 복잡한 대화, 울려퍼지는 드릴의 소리. 연결된 튜브를 통해 무언가를 밀어넣는 소리. 체내의 세포 하나하나의 잡음까지도 강제로 들어야만 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듣기 싫은 소리, 떠올리기 싫은 기억, 보기 싫은 것.
'그래도 눈이라도 감을 수 있는 게 어디야.'
이명이 점점 더 커지고, 정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자신에게 딱 맞는 VR 기기만 산다면, 듣기 싫은 것과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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