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89화 (89/209)

<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6) >

둘은 마지막 탐문을 위해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한 정부 지정 거주구역에 들어섰다.

정부 지정 거주구역이라 함은 일반적인 주택 밀집 구역과는 조금 다르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만 갖춰둔 구역을 말한다.

거주에 필요한 주택은 모두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자동화 대형매장과 소수의 병원 및 치안 안정화를 위한 지구대 몇 개가 전부다.

상업적 목적을 띈 유흥 업소나 오락 시설은 일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빈 자리마저도 모두 넘쳐나는 인구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를 우겨넣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유흥이니 오락이니 하는 건 모두 가상현실에서 해결하는 추세였고, 식사조차 영양 드링크로 때우는 경우가 잦다.

일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부가 알아서 치안을 지켜주고, 가상현실에 틀어박힌 사람들의 건강도 돌봐준다.

학교를 다니려면 최소한 수십 분은 걸어야 하는 이 인구과포화 동네에서 김호국이 지난 23년간 성장한 것이다.

"난 이런 동네만 보면 으스스 하더라니까요."

"요즘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니 어쩔 수 없어. 우리 동네도 한창 재개발에 들어가고 있으니까."

"가상 현실 전용 모드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주는 돈 받아먹으며 일하는 월급쟁이긴 해도, 막상 가상 현실의 급격한 발전 때문에 뒤바뀐 현실과 마주하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가상 현실의 상용화 직전까지는 자본만능주의 세상 답게 특유의 양극화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긴 했으나, 그래도 서민이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밖을 나가보면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수많은 차량과 일터로 나가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장을 보기 위해 나서는 주부들, 잠깐의 햇빛을 쬐기 위해 기어나온 한량 백수들까지.

각자의 사정은 달랐을지라도 그때는 거리마다 생기가 흘러넘쳤었다.

하지만 2050년에 이른 지금, 더이상 거리에서 생기를 찾는 것은 힘들었다.

여전히 이른 아침이 되면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넘쳐났지만, 그들 모두 바쁘게 살아간다는 느낌이 없었다.

어차피 직장에 출근해도, 학교에 등교해도, 정해진 업무와 시간에 맞춰서 가상 현실에 접속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상 현실에 접속 하느냐, 바깥에서 가상 현실에 접속하느냐의 차이였을 뿐. 더이상 현대인들에게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장 자신들만 해도 어떤가? 탐문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도 회사 전용 VR 기기를 이용해서 가상 현실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시킨 업무를 가상 현실에서 처리하고, 짬이 나면 가상 현실의 다양한 컨텐츠를 즐기고, 그러다 어느새 끝난 짧은 하루를 아쉬워하며 퇴근했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 정부 지정 거주구역은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 없었다.

철저하게 가상 현실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정예 VR 유저들의 훈련소 같다.

배정된 집에서 머무르며, 정부에서 지급해준 보급형 VR 기기를 이용해 가상 현실 속으로 뛰어든다. 현실 따윈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끔 골치 아픈 문제는 전부 해결해주었으니까.

그런 환경에서, 전 인류중 유일하게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하는 청년이 23년 간 자라왔다.

"후우, 좀 떨리네요."

"나도 그래."

이전까지의 탐문과는 다르다.

가족이라면 타인이 모르는 당사자의 비밀 하나 둘쯤은 알고 있을 터. 어쩌면 그토록 집요하게 김호국을 연구하려 했던 사람들보다 가족들이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직장인은 퇴근하고, 가상 현실 속에서 한창 즐기던 사람들도 잠시 한 숨 쉬어가는 타임. 저녁 8시에 맞춰 김호국의 자택에 방문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어딜 어떻게봐도 똑같기만한 모 아파트의 1동 404호의 초인종이 울렸다.

"네, 나가요~."

안쪽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크게 안도했다.

잠시 후, 문이 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대 자식을 둔 어머니 답지 않게 꽤 젊어보이는 여성이었다.

의료 기술이 크게 발전한 요즘, 간단한 피부 미용 클리닉이나 시술을 받기만 해도 중년이 청년처럼 보이는 시대가 됐다.

가상 현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대부분은 피부 같은 건 신경쓰지 않지만, 그녀는 신경쓰는 타입인 듯 했다.

"갑자기 이런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MOD 사의 홍보마케팅부 소속인 조현석 과장이라고 합니다."

"영업부 소속 임기춘 과장입니다."

"어머, MOD 사라면 그...가상 현실 전용 모드를 개발하는 회사 맞죠? 이번에 출시한 편의증진 모드는 잘 사용하고 있어요."

"하하, 알고보니 자사의 귀중한 VIP 고객님이셨군요. 감사하는 마음에 이것부터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조현석 과장이 너스레를 떨며 미리 준비해온 선물 세트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선물 세트를 받아든 그녀는 놀란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살갑게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이렇게까지 준비한 것으로 보아 일단 안에서 이야기 해야 할 손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밖은 더우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마침 아이 아빠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이거든요. 괜찮다면 두 분도 함께 해주세요."

"아, 괜찮습니다! 잠깐 이야기만 하려고 온 거라...오히려 두 분께서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빠르게 용무만 끝내고 돌아가겠습니다."

"MOD 사의 소중한 고객이신 두 분께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조금 번거로우시더라도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탐문 자체를 탐탁치 않아 했던 임기춘도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두 사람의 예의바른 태도에 싱긋 미소 지어 보인 그녀는 넓은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때마침 중년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소파에 앉아 저녁 8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똑같이 인사와 함께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접대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반대편의 소파에 앉은 두 부부는 낯을 가리는 기색도 없이 흔쾌히 두 사람의 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선열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은 없지만서도, 부끄럽게도 이 집 가장입니다."

"어휴, 아닙니다. 저희 MOD 사에선 모든 고객 분들이 가족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먼저 악수를 건넨 것은 김호국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이세령이라고 해요. 저희 남편 말은 무시하세요. 가상 현실에서도 컨텐츠를 이용해서 돈 벌어오는 든든한 가장이니까요."

"좋은 아내분을 두셨습니다."

"하하! 이 사람도 참 쑥쓰럽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받은 두 사람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최대한 사람 좋아보이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서 MOD 사의 직원 분들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오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저희가 이번에 신 모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아주 획기적인 기술의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품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홍보 대사를 찾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요즘 같은 세상에 무작정 연예인을 홍보 대사로 쓰는 건...조금 올드해보이지 않습니까?"

홍보마케팅부 소속 답게 조현석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 그렇죠. 요즘은 세상이 휙휙 바뀌는 시대라 우리들 같은 사람들도 트렌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집사람도 정기적으로 MOD 사에서 발표하는 새로운 모드 정보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얘기를 계속 하자면, 때마침 저희 MOD 사에서 이 혁신적인 신기술의 상품화를 알리기 위한 홍보 대사에 딱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이 잡안의 자제 분 되는 김호국씨 입니다."

김호국의 얘기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조현석이 재빨리 더 말하려는 찰나, 임기춘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실례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시간에 귀하의 자택에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저희 MOD 사의 혁신적인 신기술이 김호국씨에게 아주 잘 맞을 거라 내부 분석 결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신기술로, 지금껏 안타깝게도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했던 김호국씨에게 새로운 빛을 드릴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홍보 대사인 만큼 모든 비용을 지원해드릴 겁니다. 물론 홍보에 따른 별도의 계약금 및 판매량에 따른 인센티브까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인체에 해가 되는 어떠한 요소도 없으며, 당사자가 원할 시 언제라도 위약금 없는 계약 해지를 약속드립니다."

있지도 않은 신기술에, 계약 담당이 들었다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저세상 계약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두 사람은 가히 목숨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김호국에 대해서 아주 작은 정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무리수에 초강수를 따따블로 던져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만 잘 풀린다면 뒷일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해주실 테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예전에 줄기차게 찾아왔던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군요."

"예전에 찾아왔던 사람들이라 하심은......?"

이미 알고 있다. 여러 연구기관 소속의 과학자, 저명한 뇌 전문 의학자, 기업 소속의 VR 기기 개발자들이 이 집에 벌써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다녀갔다는 것을.

"저희 아들 놈이 처한 상황을 이용해서 한몫 챙겨보려는 장사치들, 인권이나 윤리의식은 개나 줘버리고 과학계를 위해 양보해달라던 미치광이들.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다녀갔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저희 내외는 그런 자들의 꾀임에 몇 번 속아넘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씁쓸한 어조로 말하는 김선열에게선 희미한 분노와 좌절감이 묻어나왔다.

부모된 자 입장에서 자식에게 안 좋은 경험을 시켜줬다는 점, 자식이 가상 현실을 즐기지 못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 했다는 점 등등. 그밖에도 여러 이유로 이제는 미련밖에 남지 않은 듯한 한탄을 내뱉었다.

짠한 모습에 조현석은 울컥할 뻔 했지만,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김호국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자사와 계약을 하신다면 스토리를 짤 때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과대 광고를 위해 각색을 한다거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지금 이 대화를 녹음하셔도 괜찮습니다."

조현석이 슬쩍 밑밥을 던지자 두 부부는 그정도면 괜찮겠다는 식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젊은데다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도 못해 미래의 비전이 없는 아들을 대신해 대기업과의 계약을 따준다면?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가장 먼저 호국의 과거사를 꺼낸 건 이세령이었다.

"호국이가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초등학교 입학 당시의 VR 적성 검사였죠. 그때는 한창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VR 적성에 관심이 깊을 때라 대학병원에서 단체로 검사를 진행했었는데, 저희 아이만 VR에 안 맞는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래도 아들 놈이 원체 씩씩해서 그런지 딱히 불평불만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 고맙고 미안했었습니다. 사실은 자기도 또래 아이들처럼 가상 현실에 접속해서 같이 놀고 싶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두분 잘못이 아닙니다. 김호국씨도 두분께서 상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진 않을 겁니다."

"빈말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이거 손님들에게 위로를 받으니 굉장히...부끄럽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네 사람은 호국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김선열, 이세령 부부가 주로 호국의 불운하면서도 안타까운 과거에 대해 말하면, 조현석과 임기춘은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는 얼굴로 위로를 건네거나, 분위기를 띄우려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던 호국의 과거가 몇 개인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했지만, 거의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 네 사람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조현석과 임기춘은 각자의 명함을 건넨 뒤, 녹음 기록을 들고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조현석의 차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장례식에 다녀온 것 처럼 우중충한 분위기를 띄고 있던 두 사람은, 차문을 닫는 순간 태도를 돌변했다.

"내가 그만두자고 했었지......!"

"...설마 이렇게 됐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옆에서 으르렁 대는 임기춘을 무시한 채, 조현석은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접니다. 예정대로 기동타격대 투입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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