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4) >
하지만 핫팩도 버리기는 아까워 해피에게 핫팩을 주워오게 했다.
왕왕! 하고 짖지만 않았지, 해피는 그야말로 영락없는 똥강아지라 호국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아마 해피가 아니었다면 호국일지라도 벌써 스트레스로 몸져 누웠을지도 모른다.
목도리와 뜨뜻한 핫팩으로 무장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프롯이 6-150의 은폐실 격벽을 개방해주었다.
치이이익 하는 가스가 새는 듯한 소음과 함께 지면위로 새하얀 증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안 쪽과 바깥 쪽의 기온차가 큰 탓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예전에 군 식당 냉동고에 식재료 집어넣으려고 잠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랑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식재료가 아닙니다.
자신이 설마 그걸 모르겠느냐며 프롯에게 핀잔을 준 호국은 양 팔을 거칠게 문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냉기로 가득 찬 거대한 공동 속에는 캡슐 형태의 투명한 유리체가 수십 개도 넘게 존재했다. 마치 벌집 속의 애벌레들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관리하는 게 참 힘들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설마 일일이 뚜껑 따고 세척해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호국의 예상과는 달리 공동 천장의 덮개가 열리며 몇 개의 기계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예전에는 관리봇의 소유였지만, 지금은 모두 프롯이 가지게 된 물건이었다.
-6-150-1의 상태부터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가 이 존재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격으로 추정되는 자입니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98개의 캡슐과는 달리, 공동의 중심부에 홀로 놓여있는 것을 기계 팔이 집어들었다.
거대한 캡슐이 행여나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의외로 튼튼했는지 기계 팔이 꽉 움켜쥐어도 깨지는 일은 없었다.
일행 앞에 놓인 캡슐은 그 크기가 성인 남성을 몇 명이나 집어넣어도 충분할 만큼 거대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 곤히 잠들어있는 존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실망스러울 만큼 작았다.
"이건...해파리는 아니지?"
-아닙니다.
"그럼 말미잘인가?"
-말미잘도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종에 대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 거의 없어 임시로 코드 네임만 부여해두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들과 함께 발견된 소지품이나 기이한 기록을 확인했기에 대략적인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딜 어떻게 봐도 말미잘과 해파리를 융합한 것 같은 형태인데?"
투명한 유리막을 통통 두들겨 본 호국은 순수하게 감상을 말했다.
기억력 하나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호국이기에, 어린 시절 네셔널지오그래픽에서 봤던 해파리와 말미잘의 형태를 잊지 않았다.
캡슐 안에 잔뜩 웅크린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것은 어딜 어떻게 봐도 그냥 촉수 덩어리를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괴생명체였다.
심지어 색도 검은색에 가까웠기에, 멀리서 보면 파래무침이라고 착각할 것 같은 비쥬얼이었다.
'난 파래무침 싫어하는데.'
딱히 반찬 투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파래무침은 특유의 비린내가 너무 심해서 미역줄기무침과 투탑을 달리는 혐오 반찬 중 하나였다.
캡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농구공만한 크기의 파래무침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별 다른 차이점을 못 느끼겠어. 다 똑같은 파래무침이잖아."
-파래무침이 아닙...그냥 파래무침으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파래무침 종족은 언뜻 보면 개체간의 차이가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CT 촬영 결과 이 파래무침 안 쪽에 또 다른 생명체가 하나 더 자리잡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호국은 MRI와 CT를 질리도록 찍어본 적이 있어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대충 호국의 호두 크기의 뇌가 들어있는지 아닌지 알려주는 기계였으니까.
"그럼 다른 파래무침들은 그게 없다?"
-예. 대장격으로 추정되는 이 존재에게만 체내에 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며, 다른 개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량의 방사선을 지속적으로 내뿜는다는 것 역시 확인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자체적으로 준비한 동면용 캡슐이 아니었다면 주위로 퍼져나가는 방사선 수치가 위험한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안전하다는 거잖아. 그럼 어렵게 안전 여부를 체크할 필요도 없겠네."
호국은 주위를 살펴서 혹시 오작동을 일으킨 기계는 없는지, 냉동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만 확인했다.
척 봐도 튼튼해보이는 캡슐이 갑자기 박살날 일은 없을테고, 마찬가지로 캡슐 안의 파래무침이 갑자기 활동을 재개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호국은 신입에게 이상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혼자서 99개나 되는 캡슐을 전부 돌아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필요하다면 이 파래무침 종족의 동면을 해제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데?"
-과거 연구 기록에도 이들의 동면 해제를 시도했던 연구원들이 존재합니다. 최소 기온을 24도로 맞춰준 뒤, 지열이 올라오는 흙 위에 캡슐을 놔두면 주변 환경을 파악한 캡슐이 스스로 동면 시스템을 종료한다고 합니다.
프롯은 스마트패드에 추가 연구 기록을 띄워 올려 호국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제 1XXXX 실험 보고서
-제목 : 남극 중심부의 오래 된 빙하 속에서 발견한 미지의 생명체와의 접촉 실험
-내용 : 2034년에 출발한 남극탐사대 [타우마-01]이 미지의 생명체들이 들어있는 캡슐을 대량으로 발견해 제 1 연구시설로 무사히 이송하는 작업만 무려 1년이 걸렸다. 발견된지 1년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실험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본 연구원은 통탄을 금치 못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명체와의 접촉이 기대된다.
앞선 해독 연구를 통해 밝혀낸 기록으로 이들이 현재 동면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살기 좋은 땅'을 찾아나섰다는 미지의 존재들! 마치 약속된 땅 가나안을 찾아 오랫동안 헤맨 이스라엘 백성들 같다. 물론 나는 성경을 믿진 않지만!
어쨌든 본 실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 최저 기온 24도 조정
2. 새를 비롯한 짐승과 곤충의 울음소리(백색소음) 방송
3. 관찰!
아마도 남극에서 버티고 버티다보면 살만한 기후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하에 동면을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기후가 변한 것 처럼 조성해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99개의 캡슐 중 절반 이상의 캡슐이 동면을 해제하고 미지의 생명체를 오랜 잠에서 꺠웠다.
접촉을 위해 가드 열 명을 대동한 4급 연구원 두 명이 실험실 안으로 진입했다. 무사히 접촉에 성공했다!
오...그러니까 저건...매우...징그럽군. 인간의 몸 속에 저런...오...기록은 여기까지 해둬. 아니, 가능하면 그냥 지워버려.
"누가 기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대충 했네."
-당시의 영상 기록은 특급 기밀 자료 보관용 서버에서도 모두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구원의 반응을 보건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넌 지금 나한테 이 파래무침들을 깨워보자고 말한 거고?"
-미지의 생명체와의 조우, 두근두근 하지 않으십니까?
"안 두근두근 해."
이두근 팀장도 이건 에바라며 칼 같이 거절할 것이다.
확실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특이한 존재들이 신비롭긴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호국은 자신의 업무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가스검침원이 가스만 점검하면 됐지 그 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개인지, 가장의 월 수익은 얼마나 되는지까지 알아낼 필요는 없으니까.
이 파래무침 종족도 괜히 귀찮아질 것 같은 스멜이 팍팍 풍겨왔다.
'가만 보면 이 양반도......'
은근슬쩍 남의 업무에 따라나선 마술사는 지팡이 끝을 열어서 청소기처럼 냉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빨아들인 대량의 냉기를 신입에게 집중적으로 분사해댔다. 신입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본 호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99개나 되는 캡슐 속 주민들이 모두 깨어나면 아주아주 귀찮아질 것이다.
위대한 미국도 동면에서 깨어난 캡틴 노스 아메리카 한 명을 감당하지 못 했는데, 하물며 호국이 99체의 파래무침을 감당할 수 있을리가 없다.
'불만사항이 있다면 들어주는 게 맞고, 필요한 게 있다면 의견을 접수해주는 게 내 업무지만, 그래도 99체는 아니야.'
시간이라도 넉넉하다면 모를까, 99체나 되는 파래무침들 속에 파묻혀있다보면 밤을 꼴딱 세울 것이다.
빠르게 B57로 내려갈 생각에 슬슬 정리하자는 말을 하려던 찰나, 호국은 무심코 바라본 캡슐 속의 파래무침과 시선이 마주쳤다.
'깨어있었다고?'
잔뜩 꼬여있는 검은 촉수들의 틈 속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노란색 눈.
그 눈이 호국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지금......"
-캡슐들의 동면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해제되고 있습니다.
쉬이익, 쉬이익,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몇몇 캡슐이 스스로 열리면서 크고 작은 파래무침들을 쏟아냈다.
투명한 체액과 함께 쏟아져나온 파래무침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꾸물꾸물 기어서 일행에게 접근했다.
스스로 얼음을 깨부수고 나온 신입은 때마침 자신의 발치에 다가온 파래무침을 냅다 걷어차버렸다.
축구공처럼 멀리 튕겨나간다 싶던 그것은, 놀랍게도 허공에서 방향을 전환해 부드럽게 비행을 시작했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비행에 호국은 입을 쩍 벌렸다.
파래무침이 날개도, 프로팰러도, 제트팩도 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몇 놈 잡아서 밧줄로 묶어놓으면 나도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
파래무침이 귀찮은 민원인에서 비행 보조 장치로 격상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호국은 싸한 느낌에 다시 캡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덮개가 열린 캡슐 속에서 스스로 기어나온 대장 격의 파래무침이 촉수 하나를 손가락처럼 뻗어왔다.
"미리 경고하는데, 혹시라도 그 미끈미끈한 걸로 내 배를 찌르면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정확히 호국의 복부를 향해 뻗어지고 있던 촉수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다들 내 배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네. 진짜 내 배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어쩌면 가드-079가 배를 내보이는 것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배를 내보여서 상대를 유혹해?"
-인간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복근을 선보여서 유혹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 상황에는 맞지 않았지만, 호국은 복근에 자신이 있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할 때면 항상 쩍 갈라진 식스팩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짓곤 했다. 튼튼한 맷집과 그에 걸맞는 육체는 호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뼈에 사무치는 냉기에도 불구하고 슬쩍 윗옷을 들어올린 호국은 자신의 복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먹으로 쳐도 문제없을 만큼 단단한 식스팩이 보였다.
"...내가 봐도 좀 매력적이긴 하네."
-그러니 꼭 상대를 탓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프롯의 옹호에 파래무침의 촉수가 다시 뻗어왔지만, 호국은 손뼉으로 후려쳐서 칼같이 거부했다.
"아무리 그래도 찌르는 건 안 돼. 내 배가 샌드백도 아니고......"
-파래무침이 찌르려 한 이유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드-079의 손을 보십시오.
"손은 왜...윽!"
호국은 자신의 손에 묻은 투명한 알갱이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촉수를 쳐내면서 손바닥에 묻은 것 같았다.
-연구 기록에 담겨 있는 '그걸'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거 라니?"
호국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되물으면서 진압봉을 꺼내들었다.
자세히 보면 날아다니는 놈, 기어다니는 놈, 벽에 붙어서 튀어오를 준비를 하는 놈, 모두 촉수에 투명한 알갱이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잘 살피지 않으면 그냥 둥근 곤약 젤리처럼 보이지만, 호국의 눈썰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알갱이 속에 뭔가 있어.'
일행을 에워싼 파래무침들이 '그걸' 하기 위해 촉수에 알갱이들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생명체가 살기 좋은 땅을 찾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건 곧 번식하고 번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셔널지오그래픽을 진득하게 봤던 호국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호국은 경비팀 79기 맴버와 은근슬쩍 끼여든 민간인 한 명에게 명령했다.
"싹 다 조져!"
미지의 생명체와 두근두근대는 접촉(대화)을 하는 건 조지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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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찾아야 하지?
너무 오랫동안 만나뵙지 못 했어.
아아, 걱정된다. 걱정돼!
그런 나약한 몸으로!
그런 하찮은 것을 선택하시다니!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내가 더 잘 지켜드릴 수 있는데!
내가 더 쓸모가 있을 텐데!
그러니 찾아라, 나의 '귀'들아.
울려퍼지는 음악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음 속에서 진실을 찾아라.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단 하나일지니.
우리가 '눈'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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